"김영삼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냐"...박정희가 두려워한 40대 기수론

박정희와 김대중<17>
박정희의 집권 연장을 위해 대통령의 3선이 가능하도록 한 3선 개헌안이 1969년 야당의 격렬한 반대에도 여당의 새벽 기습 날치기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고, 이어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65.1%의 높은 찬성률로 확정되자 야당은 무력감에 빠졌다. 김대중은 "국민투표는 정부가 이기게 되어 있었다. 특히 한국처럼 지방자치제를 실시하지 않고 공무원이 총동원되어 부정을 저지르는 나라에서는 야당이 결코 승리할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김대중, ‘김대중 자서전1’).
3선 개헌으로 장기집권 길 연 박정희...대항마 없었던 야당
3선 개헌안이 국민투표에서 압도적 지지를 얻은 것은 공무원과 교사를 포함한 관권 총동원 체제의 몫이 크다. 하지만 박정희 집권 이후 이루어진 경제발전 성과도 일정 부분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당시는 자립경제 기반 마련, 전력‧석탄 등 에너지 확보, 의류 신발 등 경공업 육성 중심의 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마무리 되고, 산업구조 근대화, 철강‧기계 등 기초 공업육성과 수출중심의 2차 경제개발 계획 3년 차에 들어섰던 시기였다.
박정희의 3선 길은 열렸고, 야당에 남은 선택은 1971년 대선에서 승리해 박정희 3연임을 막는 것이었다. 문제는 제1 야당 신민당의 원로나 중진 중에 희망을 줄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유진오 총재가 다음 대선 후보로 꼽혔지만 박정희 대항마로는 약했고 건강도 좋지 않았다. 그의 후계자로 유진산이 있었지만 권모술수에 능하고 ‘사쿠라’라고 비아냥 받을 정도로 그의 타협적 정치노선은 선명성을 요구하는 민주당 지지층에 인기가 없었다.

야당에는 새로운 대안이 필요했다. 김대중을 따르는 그룹에서는 그에게 대통령 후보로 나서라는 인사도 있었다. 고민을 해오던 김대중은 내색은 하지 않고 참모진을 정비해 전국 지구당을 돌며 조직을 다지고 있었다(김대중, 앞의 책). 그러는 사이 함께 3선개헌 반대투쟁에 앞장섰던 같은 당 원내총무 김영삼이 먼저 깃발을 들고 나섰다. 이른바 40대 기수론이었다.
“패배감과 무기력에 젖어 있는 당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박정희 독재에 신음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보여 주어야 한다. 누군가 이러한 역사적 대임을 맡아야 한다. 그러나 당 내외를 통틀어 봐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 그렇다면 내가 그 십자가를 지겠다.” (김영삼, ‘김영삼 회고록-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백산서당, 2000)
박정희에 맞서 40대 기수론 들고 나온 김영삼
김영삼은 1969년 11월 8일, 예고 없이 기자회견을 갖고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것을 전격 선언했다. 유진오 총재가 3선 개헌 날치기 통과에 충격을 받아 뇌졸중 증세로 쓰러졌고, 치료 차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총재직 사의를 표명한 즈음이었다.

당시 나이 41세, 김영삼의 전격적인 대선 도전 선언은 신민당 안팎에 큰 충격파를 주었다. 당 원로와 중진들은 이를 당 질서에 대한 정면 도전으로 받아들이고 냉소적인 반응으로 일관했다. 유진오에 이어 총재직에 오르게 되는 유진산은 “구상유취(口尙乳臭, 입에서 나는 젖비린내) 아이들이 무슨 대통령이냐”고 힐난하며 40대 기수론을 펴는 젊은 사람들을 정치적 미성년자로 치부해 버렸다. 40대 기수론은 당내 노장층으로부터 거의 외면당했고 김영삼은 고독한 싸움을 벌여야 했다.
그래도 김영삼은 굴하지 않고 40대 기수론을 밀고 나갔다. 1970년 정초에는 한국일보의 ‘신춘수필 릴레이’ 네 번째로 ‘동주의식 재발견’(同舟意識再發見)이란 제목의 기고에서 “4천 만이 한 배에 타고 있다”고 동주의식을 강조하면서도 젊은 세대에 길을 내어주는 ‘후퇴의 윤리’를 내세웠다. 당내 노장층의 퇴진, 나아가 장기집권 중인 박정희의 퇴진을 겨냥한 것이다.
1월 24일에는 43세의 김대중이 기자회견을 갖고 “신민당 대통령후보 지명전에 나설 용의가 있다”고 선언하며 40대 기수론에 합류했다. 1월 26일 유진오 총재의 후임을 뽑는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당선된 뒤 당 안팎의 관심은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로 모아졌다. 45세의 이철승도 대선후보 경쟁에 뛰어들어 40대 기수론은 제1 야당 신민당의 대세로 굳어졌다.
김대중과 이철승도 가세...신민당의 40대 후보 바람
김대중은 전당대회 다음날인 1월 27일 국제신보(국제신문)에 ‘40대 기수론’이란 제목의 글을 실었다. “민주조국의 운명을 회생시키려면 아직도 강력하고 노쇠하지도 않은 50대의 박정희 씨보다 더욱 힘차고 더욱 젊은 40대 후보가 대결선상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 오늘의 국민적 공통의 열의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국민의 세대 구조의 변화를 들어 40대 기수론의 불가피성을 논리적으로 뒷받침하기도 했다.

“지금 우리나라 인구의 73%가 35세 미만이며 40세까지 치면 80%를 넘는다. 35세는 해방 당시 10세 미만이며 40세면 15세다. 그들은 군국주의와 일제, 그리고 전근대적 봉건사회를 전혀 모르고 자랐으며 그와 정반대의 민주주의와 미국의 물결 속에 자랐다.(중략) 지금 우리 사회의 관계, 언론계,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지도층이 30대 후반 내지 40대로써 점령되고 있는 현실이 우리 사회와 인구패턴의 단적인 반영이라 할 것이다. 오직 신민당만이 지금까지 노장 인사들이 지배해왔었는데 이제 여기라 해서 금단의 지역은 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국제신보, 1970년1월27일자, ‘김대중, 내가 걷는 70년대, 범우사, 1970’에서 재인용).
노회한 정치인 유진산 총재는 40대 기수론을 억누르려고 백방으로 애를 썼다. 하지만 그동안 민주당의 노쇠한 지도부에 실망을 거듭해온 야당 지지 국민들이 선명 야당과 40대 젊은 리더십에 쏠리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유진산은 점점 수세로 몰렸다.
박정희는 야당의 대선후보 지명 경쟁이 이렇게 흘러가는 것을 매우 못마땅해 했다. 그는 다음 대선에서 패기만만하고 적당한 타협을 거부하는 40대의 김영삼 혹은 김대중과 맞서고 비교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3선 개헌 후 김형욱 후임으로 중앙정보부장이 된 김계원은 박정희의 이런 심경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진산이 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되도록 음으로 양으로 뒷받침을 했다. 박정희는 타협적이고 자신보다 나이가 12살이나 많은 유진산과 대선을 치르는 게 여러 가지로 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40대 기수론 잠재우려 유진산 지원한 중앙정보부
김계원 중앙정보부장은 유진산을 신민당의 대선 후보로 밀어올리기 위해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했다. 야당 대선 후보지명대회를 앞두고 야당 대선후보로서 국제적 안목을 갖춘 정치지도자라는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려고 베트남, 필리핀, 일본 해외 순방을 다녀오게 한 것도 그 하나였다. 유 총재는 한국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상대국 지도자들과 만나 사진을 찍고 외교 역량을 과시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유 총재가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뒤에는 박정희-유진산의 여야 영수회담을 갖게 했다(김충식, ‘남산의 부장들’, 폴리티쿠스, 2012).

그러나 청와대와 중앙정보부의 이런 노력은 야당 대선후보 40대 기수론의 거센 바람을 막지 못했다. 유진산은 대선후보 지명 전당대회 1주일을 앞두고 40대 후보자 3인이 단일화를 하면 후보 경쟁에 나서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3선 개헌안 처리 후 1년여 동안 중앙정보부를 필두로 정성을 기울여왔던 공작이 물거품이 된 것이다.
박정희는 이 사태에 매우 화를 냈고 중정에 “내가 김영삼 같은 애송이와 어떻게 싸우라는 말이냐”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김충식 앞의 책). 유진산이 대통령후보 경쟁을 포기하고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기에 대의원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의 승리가 기정사실처럼 여겨지던 때였다.
후보 경선 1차 투표에서 1위한 김영삼...결선 투표 결과는?

그러나 신민당 임시전당대회에서 1차 투표 결과 김영삼이 1위를 했으나 과반을 얻지 못했고,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이 김영삼보다 48표 많은 458표를 얻어 극적으로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됐다. 세불리를 느낀 이철승이 1차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바람에 백지투표를 했던 이철승계 대의원들이 김대중-이철승 밀약(김대중이 후보가 되면 당권은 이철승을 민다는 내용)에 따라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지지로 돌아선 결과였다. 김영삼은 의외의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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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김대중
- ① 자유당의 방해로 후보 등록 실패...분노한 김대중은 박정희의 부대를 찾아갔다
- ② "김대중은 공산주의자" 흑색선전 뚫고 첫 당선...그러나 이틀 뒤 쿠데타가 일어났다
- ③ 박정희 유신 선포 때 일본 머물던 김대중…1년 전의 교통사고로 체포·고문 면했다
- ④ "실로 나라가 위중합니다" 김대중의 간곡한 제안, 박정희는 끝내 거절했다
- ⑤ 김대중 “내 어머니는 둘째부인”…누나 젖먹고 큰 ‘늦둥이’ 박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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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⑦ 성적 ‘꼴찌그룹’ 박정희와 대학 진학 포기한 김대중…그들의 발목을 잡은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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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⑨ 나이 많아 만주군관학교 입학할 수 없었던 박정희...혈서를 써보냈다
- ⑩ 전쟁 탓에 목포 떠나 부산에서 사업한 김대중, 그곳에서 대학생 이희호 만나다
- ⑪ 박정희·김대중 모두 좌익으로 몰렸던 이유는...1946년 대구의 그날
- ⑫ 박정희가 추진한 한일국교정상화...'변절자'로 몰렸지만 "필요하다" 소신 밝힌 김대중
- ⑬ "반드시 낙선시켜라" 박정희 엄명이 '정계 거물' 김대중 탄생시켰다
- ⑭ "잔꾀와 속임수로 선거 치르는 사람"…김대중 겨냥해 방해공작 편 박정희
- ⑮ "뭐? 야당이 반대한다고 못해?" 불같이 호통친 박정희…경부고속도로의 탄생
- ⑯ 박정희 최측근 차지철이 김대중과 함께 베트남 전투부대 파병 반대한 이유
이계성 전 한국일보 논설위원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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