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이이라는 두 위인 [글로벌 칼럼]

2026. 5. 7.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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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아산 이충무공 유허' 내 기념관 내부.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제공

한국 역사와 가족 제도에 관심을 가진 대학원생이던 나는 족보를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양반' 가문을 연구해 보고 싶었는데, 여러 족보를 살펴보던 중 지도교수로부터 덕수 이씨를 살펴보기를 권유받았다. 그가 말하길, 이 가문이야말로 이상적인 양반 가문이라는 것이었다. '양반'이라는 말은 (조선시대) 두 집단을 뜻하며, 문관을 의미하는 '문(文)'과 무관을 의미하는 '무(武)', 즉 관료 체제의 두 축을 가리킨다.

그는 이어 덕수 이씨 가문에는 문과 무 양쪽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인물들이 있다고 설명했다. 바로 이순신과 이이였다. 이이는 그의 호인 율곡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하버드 대학원 시절, 덕수 이씨와 관련해 또 하나의 인연이 생겼다. 어느 날 족보를 연구하고 있는데, 한국학 자료실 책임 사서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오라고 했다. 그는 나를 지하로 데려갔다. '하버드 옌칭' 빌딩 도서관의 한국 자료실은 지하에 있었는데, 그 아래층에는 새로 들어온 책들을 정리하는 또 다른 공간이 있었다. 그곳에서 사서는 내가 연구하던 것과 똑같은 족보 세트를 보여주었다. 세 상자, 총 16권으로 된 것이었다. 사서는 "우리가 이걸 실수로 두 세트나 샀어요. 이건 당신이 가져가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얻은 족보를 연구하면서 나는 이순신(1545~1598)과 율곡 이이(1536~1584)가 항렬이 비슷한 인척 사이라는 걸 확인했다. 생존 시기는 겹치지만, 서로 다른 '파(派)'에 속해 있었다. 촌수로는 19촌으로, 실제 관계로는 숙질지간이었다. 율곡이 조카 항렬이었지만 나이는 더 많았다. 이른바 '젊은 삼촌, 나이 많은 조카'의 사례다.

문관 계열에서 율곡과 퇴계 이황(1501~1570)을 비교할 때, 먼저 강조하고 싶은 점은 이들이 결코 경쟁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두 사람은 종종 사상적 라이벌로 묘사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두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제강점기(1910~1945)에 한국인을 분열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해석이다.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이(理)'와 '기(氣)'를 두고 한쪽은 이를, 다른 한쪽은 기를 강조했다는 식의 설명이 있지만, 두 사람이 실제로 함께 살던 시기에는 뚜렷한 대립이나 중요한 사상적 차이가 없었다는 점을 나 또한 최근에 알게 됐다. 율곡은 평생 단 한 번 퇴계를 만났다. 당시 젊은 학자였던 그는 당대 최고의 학자를 찾아간 것이었다. 퇴계 역시 젊은 율곡을 기쁘게 맞이했다. 그때 율곡은 이미 아홉 번의 과거 시험에서 모두 장원급제한 '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이었다.

앞서 나는 이순신을 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군사적 인물이라고 말했다. 조선 시대(1392~1910)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 전체 역사에서 그렇다는 의미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세계사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해군 지휘관 중 한 명이라고 말하고 싶다. 해군 제독으로서 이순신과 견줄 만한 인물은 영국의 호레이쇼 넬슨 제독 정도다.

두 사람의 삶에는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둘 다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들의 군대는 승리했지만, 정작 본인은 최종 승리를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넬슨은 여러 차례 부상을 입어 한쪽 눈과 팔을 잃었고, 이순신은 무과 시험에서 다리를 다쳐 4년간 응시하지 못했다. 그에게는 더한 시련이 있었다. 일본 함대가 특정 지점에 정박해 있어 공격하기 쉽다는 첩보가 있었지만, 그는 함정일 것이라 판단하고 출전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는 파직되었고, 후임 장수가 출전했다가 (적의) 함정에 빠져 12척을 제외한 모든 배를 잃었다.

이후 복직된 이순신은 곧 명량 해전이라는 결정적 전투를 치렀다. 그는 13척(12척에 추가로 1척 준비)으로 일본 함선 133척을 격파하며 전세를 뒤집었고,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결국 일본은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마지막 해전에서 이순신은 전사했다.

이순신은 평생 정직하고 강직한 인물이었다. 어느 날 그의 나이 많은 조카 율곡이 한양에서 요직을 맡고 있을 때, 누군가 이순신에게 유명한 조카를 만나보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이 이를 통해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오해를 할 수 있다며 만남을 거절했다. 어떤 부당한 의심도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순신과 율곡은 무와 문을 아우르는 '양반'의 가장 이상적인 모습이다. 덕수 이씨 가문은 이 두 위대한 인물을 자랑할 만하다. 한국도, 나아가 전 세계도 그렇다.

※이 칼럼의 시각은 필자 개인의 시각입니다.

코리아타임스 영문 칼럼 주소: Yi Sun-sin and Yulgok, great men of Korea - The Korea Times

마크 피터슨 미국 브리검영 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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