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근현대사(19)] '절벽아파트' , 어린이 추락사고 나던 근현대 공간

전정희 기자 2026. 5. 7. 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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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일제강점기 낙산 채석장 아래 건축된 '현대식' 창신아파트
ㆍ토막집, 판잣집 그리고 철거...국가재건최고회의 시절 '입주'
ㆍ땅은 국가 소유, 아파트는 입주민 소유...재개발 앞둔 '집 한채'

어린이날을 앞둔 4일 서울 창신동 '종로아동회관' '구립창삼 청소년독서실'이 자리한 절개지 아래 지봉골어린이공원. 청명한 봄날임에도 공원에 뛰노는 아이들이 없다.

다만 맞은 편 절개지 산 동망봉 공원 운동장에는 노란 버스를 타고 온 유치원 어린이들이 재잘 거리며 뛰놀았다. 확실히 아이들이 있으면 활기가 느껴진다.
일제가 경성역, 조선총독부를 짓기 위해 낙산 암석을 절개(붉은 원) 부분. 낙산 자락에 3군데의 절개지가 있다.  단종 비 정순왕후의 전설이 깃든 동망봉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사진=전정희 기자

이 지봉골어린이공원 뒤편에는 '창신아파트'로 불리는 2개 동 짜리 건물이 있다. 낡고 허름하긴 하나 외관 도색 등이 잘된 붉은벽돌 아파트다. 단차 지형을 활용해 지은 3~4층짜리 '아파트'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빌라 수준이나 건축 당시(1962년) 최신 공법이 동원된 현대식 아파트였다.

1963년 2월 7일 창신아파트, 즉 창신시영(市營)아파트 입주식이 열렸다. 3개 동에 100가구가 입주했다. 낙산 채석장(절개지)이 병풍처럼 가린 곳에 있는 창신아파트는 그때부터 절벽아파트로 불렸다.

그 채석장은 일제가 서울 동쪽(현 창신동·숭인동 일원) 낙산의 암석을 절개해 경성역사, 조선은행, 조선총독부 건축을 위한 돌로 이용하면서 절벽이 됐다. 지금도 이 일대는 세 군데의 절개지 절벽이 있다.

창신아파트 입주식 날 찍은 사진은 절개지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제가 낙산을 '경성 개수'를 이유로 마구 파헤쳤기 때문이다. 창신·숭인동은 경성 개수를 위한 채석장 마을이었다.

그 1920~30년대 절개지 인근에 주택이 들어섰다. 주택이라기보다 움을 파고 집을 지은 토막민의 무허가 거처였다. 움집이라고도 불렀다. 대개 농촌에서 뿌리 뽑힌 식민지 백성이 날품팔이라도 하기 위해 정착하면서 형성됐다.

6·25전쟁 직후. 해방이 됐어도 국민의 삶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일자리가 있는 서울로, 서울로 몰렸다. 그 이농민 대개는 사대문 외곽 청계천을 중심으로 무허가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청계천이 가깝고 비 피해를 막을 수 있는 채석장 동네는 1950~60년대 이농민의 판잣집으로 채워졌다. 자고 나면 뚝딱 집이 들어섰다.

1961년 5월 16일 군사 정변이 일어났다.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사회 각 부분에 혁신적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1960~66년 서울 인구가 6.5%씩 증가했다. 무허가 주택도 급격히 늘었다.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강제 철거 정책이었다.

이때 서울의 움집, 판잣집 등이 강제 철거됐다. 도시 빈민은 사당동 염창동 서부이촌동 상계동 봉천동 등의 국가 공유지로 이주됐다.
현재 서울 창신아파트 모습. A, B, C 3개 동이었으나 A동은 철거되어 경찰 기동대 건물이 들어섰다. 사진=전정희 기자
1963년 2월 창신아파트 입주 당시 사진.   출처=서울역사아카이브

지금의 창신아파트 일대도 무허가 건물 593가구도 강제 철거됐다. 그리고 현대식 주택의 상징과도 같은 3개 동 짜리 창신아파트가 들어선 것이다. 옥상에 물탱크를 둔 적조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입주민들에게 '멋진 신세계'였다.

2026년 봄. 창신아파트 일대는 서울시의 신속통합기획 개발 정책에 따라 토지 소유주 주민들은 기대에 차 있다. 조합 구성 등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것. 하지만 근대화의 상징 창신아파트 주민은 불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1960년대 건축 당시 주택 공급 문제와 개발의 상징성을 보여주고자 했던 주택 정책으로 인해 땅은 국가 공유지, 건물은 사유지라는 기형적 구조로 남아서이다. 당시 입주민들은 대출자금 2040만원, 입주자 부담금 680만 원으로 입주할 수 있었다.

현재 창신아파트는 입주 당시 A, B, C동 중 B, C동만 남았다. A동은 철거되어 경찰 기동대 주둔지가 됐다. 1960~70년대 절벽 위 안전 구조물조차 설치할 여력이 없었던 우리는 당시 어린이들이 절벽 근처에서 놀다 떨어져 죽었다는 기사를 심심찮게 접해야 했다. 환경과 위생 또한 말할 나위 없이 열악했다.

이제 그곳은 '서울의 똘똘한 집 한 채'라는 욕망의 아이콘이 되어 간다.

 

전정희 기자 oklaka@oknews.ne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