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좁아도 삶은 품격있게”…2040의 기막힌 ‘공간 분리’ 전략

이정하 기자 2026. 5. 7. 05: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1인가구·주거비용 급증에 ‘AI 무인창고’ 열풍
경기도 광교새도시 내 한 오피스텔 지하 3층 주차장에 있는 24시 무인시스템 인공지능(AI) 무인창고.

(☞한겨레 뉴스레터 H:730 구독하기. 검색창에 ‘한겨레 h730’을 쳐보세요.)

서울 동대문구에서 금천구 가산디지털단지로 출근하는 직장인 한용주(39)씨는 벌써 4년째 송파구 문정동의 무인창고(셀프 스토리지)를 쓰는 장기 이용자다. 4년간의 자취 생활을 접고 본가로 들어가면서 넘쳐나는 짐을 처리하려고 찾은 창고가 이제는 필수 공간이 됐다. 한씨는 가장 큰 사이즈의 보관함을 월 13만2천원에 이용한다. 그는 “서울에서 짐을 다 들일 수 있는 넓은 자취방을 구하려면 월세와 관리비를 합쳐 100만원은 깨진다”며 “집은 잠만 자는 단출한 공간으로 유지하고, 계절 옷이나 여행용 가방처럼 부피 큰 짐은 창고에 맡기는 게 훨씬 경제적”이라고 말했다.

과거의 창고가 ‘버리지 못한 잡동사니’를 쌓아두는 곳이었다면, 지금의 무인창고는 ‘나의 소중한 취미’를 안전하게 위탁하는 ‘전시 공간’에 더 가깝다. 경기 수원 광교새도시 오피스텔에 사는 김희주(32)씨는 “한정판 스니커즈 등은 좁은 원룸에 두면 ‘짐’이 되지만, 쾌적한 창고에 보관하면 언제든 꺼내 즐길 수 있는 ‘자산’이 된다”고 했다.

최근 2040세대에서 집은 가벼워지고 삶은 풍요로워지는 ‘공간 분리 전략’이 유행하면서 무인창고 이용자가 급증하는 추세다. 열풍은 수치로도 나타난다. 크고 작은 무인창고는 전국에 600여곳으로 추산되며, 70~80%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서울 주요 역세권은 물론 광교새도시, 경기 성남 판교새도시, 경기 하남 미사새도시 등 젊은층 유입이 많은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세가 뚜렷하다. 오피스텔이나 지식산업센터 등 젊은층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 내 지하주차장에 주로 들어서 있다. 24시간 무인시스템으로 아무 때나 이용할 수 있고, 지하주차장과 연결돼 차를 대고 짐을 실을 수 있어 편리하기 때문이다.

무인창고를 운영하는 유지영 우리창고 정글짐 대표는 이 같은 현상의 원인으로 ‘코로나19 이후 변화된 주거관’과 ‘취미 활동의 다양화’를 꼽았다.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인테리어에 대한 로망이 커졌고, 짐을 밖으로 빼 공간을 넓게 쓰려는 분들이 늘었어요. 특히 캠핑과 골프 등 취미 장비, 육아용품처럼 부피가 크지만 매일 쓰지 않는 물건들이 주된 보관 대상이죠. 천정부지로 치솟은 집값이나 전월세 부담도 무시할 수 없어요.”

1인 가구 비중이 35%를 넘어서면서 주거지도 소형화됐고, 협소해진 생활공간을 외부로 확장하려는 수요가 맞물리며 새로운 형태의 공간 분리 현상이 나타난 셈이다. 비대면을 선호하고 스마트폰 앱 조작에 능숙한 2040세대가 주 고객층을 형성한 것도 무인창고 활성화에 한몫했다. 무인창고는 실내외 폐회로티브이(CCTV)를 설치하고 이상행동이 감지되면 즉시 관리자에게 통보해 보안을 책임진다. 창고 온도와 습도까지 자동 제어해 보관품 손상을 막는다. 이런 관리는 인공지능(AI)을 적용한 시스템으로 이뤄진다. 이용자는 스마트앱을 통해 출입문과 개인 창고 문까지 여닫을 수 있다.

최근 ‘슬세권’(슬리퍼 생활권) 연구보고서를 발간한 김희재 경기연구원 연구위원은 “좁은 방을 대신해줄 동네 카페나 편의점은 단순한 상점을 넘어 일상을 유지하는 ‘공유 거실’과 같은 개념으로 변모했는데, 무인창고 열풍도 궤를 같이한다. 이는 공간에 대한 인식과 생활 방식의 변화를 보여준다”며 “민간과 공공 영역에서 변화된 생활상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슬세권은 슬리퍼와 같은 편안한 차림으로 카페·편의점·병원 등을 걸어서 10분(약 500m) 안에 누릴 수 있는 동네를 뜻하는 신조어다.

글·사진 이정하 기자 jungha98@hani.co.kr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