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연구실의 ‘보이지 않는 손’ [지금, 대학을 묻다]

2026. 5. 7. 0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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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벚꽃 피는 시기로 망한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한국의 대학은 위기다. 상아탑의 권위를 지키면서도 변화한 사회에 맞는 인재 배출에도 충실한 새로운 대학의 좌표를 전문가 칼럼 형식으로 제시한다.
한국도 대학 연구실에서 묵묵히 일하는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의 수준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한다. 사진은 중앙대학교 나노-광융합 바이오 의료 연구센터 연구실.

대한민국의 연구 경쟁력은 이제 세계적 수준에 도달했다. 2025 네이처 인덱스 국가 순위 7위, 국가 연구개발(R&D) 예산 35조 원 시대에 서울대를 비롯한 14개 대학이 세계 500대 연구기관에 이름을 올렸고, 주요 대학들은 아시아를 넘어 글로벌 연구 허브로 자리매김했다. 양적 성장뿐 아니라 질적 도약도 눈부시다. 그러나 이 화려한 성과의 이면에는 '유령'이라 불려도 무방할 만큼 불안정한 삶을 이어가는 이들이 있다. 박사후연구원(포닥), 계약직 연구교수, 석사급 전임 연구원들이다.

대학 연구실이라고 하면 흔히 지도교수와 학위 과정 대학원생만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 고난도 실험을 주도하고, 축적된 기술 노하우를 전수하며, 연구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핵심 동력은 이들 비전속 연구 인력이다. 대학원생은 졸업과 동시에 연구실을 떠나고, 탁월한 역량을 갖춘 포닥은 교수직이나 기업 연구소를 찾아 끊임없이 이동한다. 교수들에게는 연구실의 역사와 기술적 맥락을 깊이 이해하고 성실하게 자리를 지켜줄 '지속 가능한 동료'가 절실하다. 연구 능력이 특출나지 않더라도, 연구실의 긴 호흡을 함께 이어갈 숙련된 연구자는 연구 현장의 필수 인프라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다. 이들의 인건비는 전적으로 교수나 자신이 수주한 외부 연구비에 의존한다. 과제가 끊기면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구조이며, 지난 정부의 R&D 예산 삭감 당시 가장 직접적 타격을 받은 이들도 바로 이 집단이었다. 4대 보험이라는 최소한의 사회안전망 외에 주거 지원, 자녀 교육, 장기 근속에 따른 호봉 상승 같은 사회보장형 지원은 전무하다. 소속은 대학이지만 정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채, 교수의 연구비 상황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연구 유목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해외 연구 강국들의 사례는 우리에게 묵직한 시사점을 던진다. 일본의 주요 국립대학들은 계약직 연구원들의 정주 여건을 위해 공공주택과 협약을 맺어 시세보다 20~30% 저렴한 임대료와 보증금 면제 혜택을 대학 차원에서 보장한다. 독일은 '학술기간제계약법(WissZeitVG)'을 통해 교수의 외부 과제비로 고용된 기간제 연구원에게도 국가 공공서비스 단체협약(TV-L)을 적용한다. 경력에 따른 호봉 승급과 급여 인상이 교수의 재량이 아닌 법적 의무가 되는 것이다. 미국은 NIH(미국 국립보건원)가이드라인을 통해 포닥의 연차별 최저 임금을 엄격히 규정하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시니어 연구원으로의 직급 승진과 급여 인상을 의무화한다. 연구자를 단순한 프로젝트 소모품이 아닌 국가가 키워야 할 핵심 자산으로 예우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 정부와 대학도 시각을 바꿔야 한다. 늘어난 R&D 예산에 걸맞게, 일본·독일처럼 비정규직 연구자도 국가 시스템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법적·제도적 보호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한국형 연구원 복지 가이드라인을 수립하고, 연구비 직접비와는 별도로 국가 연구비에 이들의 정주 여건과 복지를 보장하는 독립된 지원 트랙을 마련해야 한다. 아울러 대학 내 통합 지원 기구를 설치해 과제 공백기에도 급여가 보전될 수 있는 '브리지 펀드' 운영이 필요하다.

대학의 미래는 신축 연구동의 개수가 아니라, 그 안에서 밤을 지새우는 연구자들이 얼마나 안정적으로 미래를 꿈꿀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연구실의 '보이지 않는 손'들이 더 이상 불안에 떨지 않고 실험에 매진할 때, 비로소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은 튼튼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 대학은 그들에게 단순한 일터가 아닌, 삶의 버팀목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대학에 던져야 할 가장 시급한 숙제다.

민정준 전남대 의과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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