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에 붙잡혀 ‘파리 4만 마리’ 잡은 美 장군… 그가 최고 훈장을 받은 사연 [명장-외전]
①1950년 7월 딘: 죽도록 고생한 '다이하드' 장군
편집자주
명장과 졸장의 경계에 선 논란의 장군들. 호평과 비판이 엇갈린 한국전쟁 참전 장성들을 '명장 외전'으로 소개합니다.

“사단장님, 의상이 정말 멋집니다.”
토요일 밤이었다. 일본 규슈 고쿠라(기타큐슈) 주둔 미육군 24사단 사령부는 환호·웃음·박수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사단은 지휘관과 참모장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장 의상(코스튬) 파티를 열었는데, 사단장인 윌리엄 딘 소장이 한국식 큰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채로 파티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딘의 부인 밀드레드도 양반집 마님 의상을 입었다. 사단장 부부의 양반 복장은 이날 파티에서 가장 큰 주목을 받았다. 특히 183㎝에 95㎏의 거구 딘이 머리에도 맞지 않는 갓을 억지로 묶어 쓴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국 전통의상을 입은 건 짧은 한국 생활에 대한 노스탤지어 때문은 아니었다. 한국 시절은 흥미롭고 때론 힘들었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내가 다시 한국에 갈 것이라고 생각할 만한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코스튬 파티를 떠올린 윌리엄 딘)

①규슈 1950년 6월 24일
딘이 이 행사를 위해 한국 전통 복식을 선택한 건 과거 한국에 근무한 경험이 있어서다. 딘은 미 군정기인 1947년 군정장관(군정 2인자)으로 부임해 한국 정부 수립 시점인 1948년 8월까지 군정사령관 존 리드 하지 중장을 보좌했다. 딘은 미군정 임기 동안 한국으로의 민정 이양 업무를 맡았지만, 한국에 각별한 애정을 갖지는 않았고 친하게 지낸 한국 인사들도 거의 없었다. 이날 의상 파티에서 한국 옷을 꺼내 입은 것도 한국을 그리워하거나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사람들 이목을 끌 수 있는 특이한 복장이기에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딘 스스로도 나중에 회고록에서 “그날 밤 나는 양반 옷을 입긴 했지만, 정작 한국에 관한 생각은 거의 하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이 파티 바로 다음 날 한국에서 전쟁이 터지고 열흘 후 자신이 대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게 될 거라고, 딘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파티가 열린 날은 1950년 6월 24일이었다.
다음 날 6월 25일. 파티의 떠들썩함과 간밤의 숙취가 아직 가시지 않은 일요일 아침이었다. 딘은 교회를 다녀온 뒤 미국에 두고 온 아들·딸의 편지를 확인하러 사단 우체국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휴일 오전의 느긋한 속도에 걸맞지 않게 멀리서 당직장교가 딘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사단장님, 방금 북한이 북위 38도선을 넘어 남한으로 침공했다고 합니다.” 더 이상 자세한 정보는 없었다.
딘의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바로 직전 해인 1949년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한 후, 딘의 24사단(규슈)은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미군 전투부대였다. 어젯밤 장난스럽게 전통 복장을 입었던 바로 그 나라를 향해, 갑자기 전쟁을 치르러 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엄습했다. 딘은 그때를 돌이켜 “아시아로 들불처럼 번질 전쟁의 한복판에 24사단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닷새 후인 6월 30일 밤 12시쯤. 월튼 워커 8군사령관은 24사단에 한반도 출동 명령을 하달했다. 지금 당장 2개 보병중대와 1개 포대(포병중대)로 구성된 특수임무부대(태스크포스)를 한국에 파병하고, 사단장은 나머지 병력을 모아 본대를 구성한 뒤 최대한 빨리 한국으로 뒤따르라는 명령이었다.

“윌리엄 딘은 차를 타고 다니기보다는 걷는 것을 좋아해, 부하들은 그에게 ‘walking general’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구두도 (당번병을 시키지 않고) 직접 닦았다.”
(클레이 블레어 ‘The Forgotten War’)
극동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와 미8군사령관 워커가 딘을 선봉장으로 찍은 것은 당시로선 매우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한국이 사흘 만에 수도를 잃고 수원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북한군 공세 속도를 늦추려면 미 지상군이 최대한 빨리 투입돼야 했다. 규슈 주둔 24사단은 서두르면 하루 만에 일부 병력을 한반도로 이동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일본 점령군인 미8군 예하 4개 사단(7·24·25·1기병)의 사단장 중 한국 경험이 있었던 장군은 딘이 유일했다. 그리고 51세 딘이 사단장들 중에서는 가장 젊었다. 여러 조건을 고려했을 때 딘이 가는 게 맞았다.
그리고 상관들이 보기에 딘은 무모한 희생도 감수해야 할 이 지연 작전에 가장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한국전쟁 관련 저서를 여러 권 남긴 미국 언론인 겸 작가 클레이 블레어는 당시 미군 기록을 근거로 딘을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장교’ 혹은 ‘할 수 있다 정신을 갖춘 장군’(can do general)으로 묘사했다. 여느 장군들처럼 부하들에게 일을 떠넘기고 본부에 앉아 있었던 게 아니라, 항상 현장으로 달려가 부하들에게 모범을 보여준 솔선수범형 지휘관이었다. 딘의 이 현장형 리더십은 불행하게도 나중에 대전 전투(1950년 7월 16~20일)에서 24사단이 비극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만다.
늦은 밤 출동 명령을 받은 딘은 곧바로 수송기를 타고 대한해협을 건너갈 소수의 긴급 대응 부대를 꾸렸다. 딘이 선택한 특수임무부대 대장은 당시 34세 찰스 스미스 중령(21연대 1대대장)이었다. 딘은 연대장을 통해 취침 중이던 스미스를 깨워 “아침까지 병력과 함께 이타즈케 비행장(현 후쿠오카 공항)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규슈 중부 구마모토에 있던 스미스와 부하들은 7월 1일 오전 3시 주둔지를 출발해 오전 8시 이타즈케 비행장에 도착했다. 스미스가 이끄는 이 406명(포병 134명 나중에 합류)의 경보병 병력이 한국에 파병된 미군의 선발대였다. 540명의 소수 병력이 노도처럼 무섭게 경부가도를 따라 밀려오는 북한 1군단의 남진을 저지해야 했다. 이타즈케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부산에 도착하면 바로 대전으로 향하게. 대전으로 가면 자네가 올라갈 수 있을 만큼 북상하게. 부산에서 가능하면 먼 곳에서 적군을 멈춰야 하네. 더 많은 정보를 주지 못해 미안하네. 이게 내가 가진 모든 정보일세.”
(7월 1일 딘이 스미스에게 내린 구두명령 )

갑자기 닥친 전쟁에 대규모 병력을 보내는 일은 아무리 세계 최강 미군이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스미스 특임대는 7월 1일 오전 C-54 수송기를 타고 부산으로 향했으나 한국 남부지방에 낀 짙은 안개 때문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가 그날 오후에야 부산비행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부산 시민들의 박수를 받으며 부산역에 도착한 스미스 특임대는 오후 8시 기차를 타고 북상했고, 다음 날 오전 대전역에 도착해 육로를 통해 평택 쪽으로 올라갔다.
사단장 딘의 한국행은 이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그는 7월 2일 대형 수송기 C-54를 타고 부산으로 이동했지만, 비행장 노면 상태(진흙) 때문에 착륙할 수 없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딘은 소형 기체인 C-45를 타고 부산으로 넘어가 다시 대전으로 이동을 시도했다. 그러나 대전에 내리려던 때 이미 해가 지고 있어 착륙이 불가능했고, 야간 착륙이 가능한 일본 비행장으로 돌아와야 했다. 다음 날은 안개 때문에 대전에 바로 착륙하지 못하고, 서해안으로 이동한 다음 지형지물(금강)을 참조하며 저공비행으로 대전까지 이동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딘이 대전에 도착한 7월 3일, 북한군은 수원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육군본부를 평택으로 옮겼고, 이미 한국 대통령 이승만은 대전을 떠나 부산에 도착한 뒤였다.
가능하면 북쪽에서 적을 막아야 한다는 사단장 명령을 받고 스미스가 선택한 지점은 오산이었다. 경부선 도로와 철도를 한꺼번에 통제할 수 있는 죽미령(현재 세마역 인근)이 바로 운명의 장소였다. 스미스 특임대가 맞서야 할 상대는 북한군 4사단. 개전 직후 의정부 축선으로 치고 들어와 서울을 사흘 만에 함락한 북한군의 정예였다. 전투 시작 시간은 1950년 7월 5일 오전이었다.
“보병장교는 인정사정 없어야 할 때가 있다. 그의 임무 중 하나는 생환하기 어려운 곳으로 부하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있는데, 그건 바로 부하의 목숨을 바치고 잠깐의 시간을 벌어야 할 때이다.”
(윌리엄 딘이 나중에 한국 임무를 떠올리며 한 말)

②오산 1950년 7월 5일
세계 최강 미국과 신생국 북한 간의 첫 전투. 운명의 아침이 밝았다. 오산 죽미령에 진을 친 미 보병 406명(장교 17명)과 포병 134명(장교 9명)은 C-레이션으로 아침을 먹은 뒤, 수원 쪽에서 내려오는 북한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전차가 없는 경보병 위주 스미스 부대 540명 앞으로 전차 36대를 앞세운 5,000명의 중무장 북한 4사단 병력이 남하하고 있었다. 스미스 특임대의 후방 포병대엔 105㎜ 곡사포가 있었지만, 전방 보병부대는 2.36인치 바주카포와 75㎜ 무반동총 등 부실한 대전차 장비를 보유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미군이 불리해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미군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당시 미군은 북한군을 얕보고 있었다. 북한군이 오합지졸 군기에 장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삼류 군대임이 분명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전쟁 초반 미8군 전방지휘소(ADCOM)를 책임졌던 존 처치 준장은 “뉴욕 경찰관 100명이 한국 군대보다 더 잘 싸울 것”(조지프 굴든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이라고 한국군 능력을 비하하면서 “우리가 할 일은 전차를 무서워하지 않는 병사를 전방에 보내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미군은 북한군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미군 장군들은 세계 최강 미군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하면, 북한군은 오금을 저리고 후퇴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10대 1의 무모한 전투, 계란으로 바위 치기를 서슴지 않았다. 북한군 T-34 전차들은 미군의 야포 공격(전방 1,800m 지점), 무반동총 사격(630m 지점), 로켓포 공격(45m 지점)을 차례로 뚫고 진격하며 미군 진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전차를 저지하지 못해 당황한 미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고, 여기저기서 후퇴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이날 오전 7시 17분 미 포병대의 사격으로 시작된 오산전투는 오후 2시 30분 무렵 스미스 특임대의 퇴각으로 끝을 맺었다. 미군은 북한과의 첫 싸움에서 불과 7시간밖에 버티지 못하고 참패를 당했다. 보병부대 406명 중 집결지인 천안까지 살아 돌아온 병력은 250명에 불과했다. 당시 미군은 후퇴 군기도 엉망이어서, 대부분은 걸어서 천안-대전 방면으로 물러났지만 동해안이나 서해안까지 무작정 도망 친 인원도 있었다. 뗏목을 타고 부산까지 도주한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스미스 부대 뒤에서 평택을 방어하던) 34연대 1대대장 해럴드 에어스 중령은 7월 6일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퇴각 명령이 중대로 내려가자 무질서가 시작되고 군기가 무너졌다. 병사들은 중화기, 소총, 판초우의, 헬멧, 탄약띠, 신발을 다 버리고 떠났다. 천안 도착 무렵 대대는 거지꼴을 하고 있었고, 이들을 조직이라고 보기엔 어려웠다.”
(미국 작가 클레이 블레어가 묘사한 평택 전투)
미국의 졸전은 뒤로도 계속 이어졌다. 스미스 특임대 후방을 떠받치는 역할은 24사단 예하 34연대가 맡았다. 딘은 연대 전체 병력을 한 군데에 집중해서 운용하지 않고 연대본부는 성환(천안), 1대대를 평택, 3대대를 안성에 분산 배치하고 있었다. 병력을 이렇게 흩어 놓았으면 상하급 부대 간 통신이라도 원활했어야 했지만, 당시 미군은 무선통신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해 전령을 통해 인편으로 작전 명령을 주고받았다.
34연대는 7월 6일 평택에서 사단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철수했고, 격분한 딘은 34연대장 제이 러블리스 대령을 즉시 경질했다. 딘은 연대장까지 바꿔가며 어떻게든 금강 북쪽에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려 했으나, 34연대는 7월 6일 안성에서 전투도 없이 철수했고 7월 8일 천안에서 패배했다. 신임 34연대장 로버트 마틴 대령은 천안 시내에서 직접 로켓포를 들고 항전하다가 전사했다. 후방에서 갑자기 불려온 마틴은 철모와 군화도 없이 단화를 신고 전투 현장에 부임했지만, 연대장을 맡은 지 하루 만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그때까지 미군 전사자 중에 가장 높은 계급이었다.
앞선 스미스의 오산전투는 병력이 적어서 졌다고 핑계라도 댈 수 있었지만, 주력이었던 34연대의 연이은 패배는 ‘실력’ 문제임에 틀림없었다. 북한군을 얕보고 한국에 들어왔던 딘은 세 번의 패배를 경험하고서야 북한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직속상관 워커에게 보낸 서신에서 “북한군이 분명히 과소평가 되어 있다”고 걱정했다.
“미군이 자기 힘을 과신했던 이유는 주로 인종적인 발상 때문이었다. 전장에선 백인이 아시아인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볼품없는 한국인이 어떻게 미국인을 이긴다는 말인가. 2차대전의 일본군 정도만은 예외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일본의 광신도적 기질 때문이라고 믿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중에서)

제대로 각 잡고 싸워 미군의 체면을 되찾아야 했다. 그래서 딘은 한강 이남에서 최고 자연 장애물인 금강을 활용한 방어선을 형성했다. 조치원에 21연대, 공주에 34연대, 대평리(지금의 세종)에 19연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애초 병력이 부족했고 세 번의 패배 탓에 남은 인원이 많지 않았던 24사단이 하천 방어의 이점을 제대로 살리기는 쉽지 않았다. 3개 방면 모두에서 인원과 장비가 우수했던 북한군의 우회 공격에 또 당하고 말았다.
한때 육군만 800만 명을 굴리며 독일·일본을 동시에 때려잡던 미군이 이렇게까지 망가진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진행된 급격한 군비축소 때문이었다. 한국전쟁 발발 당시 전 세계에 배치된 미 육군 병력은 59만 명에 불과했고, 사단은 89개에서 10개로 줄어 있었다. 육군은 3개 부대가 모여 하나의 상급부대를 이루는 삼각편제가 기본이지만, 미군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1개 연대를 2개 대대로 감축했다. 그래서 보통 미군 1개 보병사단의 병력은 1만8,000명을 유지해야 했으나, 전쟁이 터질 당시 24사단 병력은 1만1,242명에 불과했다.

북한군에 연파당한 34연대도 군축 여파를 톡톡히 받았는데, 당시 이 연대에는 3.5인치 대전차 바주카포가 없었고 2차대전때 쓰던 2.36인치 바주카포를 여전히 쓰고 있었다. 2.36인치 바주카포는 북한의 T-34 전차 장갑을 뚫을 수도 없어서, 당시 실전을 치른 한 장교는 “쓸모없는 물건”이라고 평가했다. 81㎜ 박격포와 4.3인치 박격포 수량도 매우 부족했고, 특히 연대가 보유한 박격포탄의 80%가 불발탄이었다. 기본 중의 기본인 군화마저 부족해서 34연대 병사 상당수는 전쟁 발발 시 테니스화를 신고 있었다고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고, 나를 알고 적을 모르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진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
(손자병법 중에서)

③대전 1950년 7월 20일
미군은 어느 면에서 보나 북한군에 완패했다. 최초 투입부터 11일 동안 미군은 기습을 해놓고도 졌고(7월 5일 오산), 병목 구간 방어도 성공하지 못했으며(7월 6~8일 평택-천안), 하천을 이용한 방어전도 실패(7월 14~16일 금강)했다. 이제 적은 대전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대전은 경부선과 호남선 철도 분기점인 교통의 요지였고, 여기를 내주면 지형상 호남 쪽에서 방어선을 펼칠 곳이 더는 없었다.
다만 딘은 대전에서 오랫동안 격렬한 시가전을 펼칠 생각이 없었다. 하루이틀 버티다가 옥천-영동-추풍령-김천 방면으로 순차적으로 퇴각하면서 북한군 진격 속도를 늦추려는 생각이었다. 7월 19일쯤 대전에서 물러나자는 게 딘의 원래 계획이었다. 그러나 딘의 이 철수 그림은 7월 18일 워커가 대전에 도착하면서 싹 바뀌게 됐다. 워커 입장에선 24사단 후속으로 한국에 도착한 제1기병사단이 영동-김천 방어선을 구축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딘에게 “1기병사단이 준비할 동안 이틀만(7월 20일까지) 버텨 달라”고 당부했다. 연이은 패배로 이미 너덜너덜해진 24사단이었지만, 딘은 인명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대전에서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하지만 딘은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바로 적 정찰을 소홀히 한 것이다. 공주 방면에서 금강을 건넌 북한군이 대전 시내를 우회해 논산(남서쪽)이나 금산(남쪽) 쪽에서 덮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이걸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당시 24사단 수색중대는 남쪽 방면을 정찰하며 적의 이동을 감시하고 있었는데, 딘은 수색중대를 빼내 34연대에 배속시키며 대전 시내 정규 방어전에 투입했다. 그 결과 남쪽에서 사단의 눈과 귀가 사라졌고, 북한군 주력이 논산·금산 쪽에서 접근하는 동안 24사단은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했다. 딘은 유성에서 내려오던 북한군 소수 병력이 적의 주력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결국 딘은 7월 20일 새벽이 되어서야 대전이 북한군 4사단에 포위당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다.
딘은 적의 동태뿐 아니라 일선부대 상황도 파악하지 못하는 치명적 실책을 저질렀다. 그는 공주 방면에서 유성 쪽으로 남동진하는 북한군을 막기 위해 34연대 1대대를 갑천 방어선에 투입한 뒤, 자신도 대전 시내 34연대 지휘소에 머물며 방어전을 직접 지휘했다. 그러나 1대대는 7월 20일 새벽 북한군 기습을 받자 연대장에게 후퇴 보고도 하지 못한 채로 갑천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대대와 연대 사이 연락이 완전히 끊기는 바람에, 연대장과 사단장은 20일 오후까지도 1대대의 갑천 포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딘은 1대대가 갑천에서 버티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이미 대전 시내로 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나를 모르고 적도 모르면 싸움마다 반드시 위태롭다’(不知彼不知己 每戰必殆)고 했던 손자병법 구절처럼, 적의 존재와 예하부대의 상태를 파악하지 못한 사단장이 전투를 승리로 이끌 리 만무했다.
“그날(1950년 7월 20일) 나는 시간 감각이 없었다. 아침부터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의식할 수가 없었다.”
(대전전투 마지막 날을 회고한 윌리엄 딘)

딘이 맞이한 운명의 날 7월 20일. 그는 대전 시내 연대지휘소를 지키고 있었지만 예하부대에서 아무런 보고가 올라오지 않았고, 일선에서 어떻게 전투가 치러지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었다. 통신이 두절돼 사단장으로서 할 일이 없어지자, 딘은 장군이 아닌 ‘보병장교’로서 현장 임무를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직접 거리로 출동해 대전 시내를 휘젓고 있는 북한군 T-34 전차를 사냥하기로 한 것이다.
딘은 오전에는 2.36인치 바주카포 사수를 이끌고 북한군 전차를 추격했고, 다시 정오 무렵에는 3.5인치 바주카포조를 데리고 나가 T-34를 요격했다. 딘이 이끄는 바주카팀, 수색중대 바주카팀, 포병의 대전차포 등이 이날 총 10개의 북한군 전차를 잡는 전공을 올렸다.
이때 지프를 타고 다니며 직접 전차를 파괴한 딘의 행동을 두고는 평가가 엇갈린다. 전투장교가 부족한 상황에서 사단장이 솔선수범해 북한군의 시내 진입을 조금이라도 늦췄다는 긍정적 시각도 있지만, 대체적으로는 초급장교나 부사관이 했어야 할 임무에 사단장이 직접 나서는 바람에 전체 전투를 망치고 말았다는 부정적 평가가 우세하다. 딘 역시도 나중에 이런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전쟁 이후 쓴 회고록에서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엔 나무에 너무 가까이 다가가 숲을 보지 못한 것 같다”며 “21연대로 하여금 퇴로(옥천 방면)를 확보하도록 하는 작전을 펼쳤어야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후회했다.
“그렇게 숫자가 부족하고 장비도 모자란 아군 병력을 거기 투입한 것은 거의 범죄에 가까운 일이었다.”
(대전 방어에 나섰던 34연대장 찰스 보샴프 대령)

④완주 1950년 8월 25일
사단장까지 나서 탱크 사냥을 했지만 그 정도로 전체 전황을 뒤집기는 무리였다. 7월 20일 늦은 오후가 되자 패색이 짙어졌다. 북한군 보병 병력이 대전 시내까지 밀고 들어왔고, 금산 방면 남쪽 후퇴로마저 북한군에게 차단당하기에 이르렀다. 즉시 옥천 방향(남동쪽)으로 후퇴하지 않으면 사단장마저 포로로 붙잡힐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딘은 초저녁 무렵 대전 잔류 미군 중 가장 마지막으로 철수를 시작했다. 남동쪽 옥천을 거쳐 사단 지휘소가 있는 영동으로 가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여기서 딘의 지프를 몰던 운전병이 방향을 착각해서 옥천이 아닌 금산 쪽으로 길을 들고 말았다. 방향을 잘못 잡은 것을 확인했지만, 다시 돌아가기 어려워서 일단 남쪽으로 이동을 계속했다.
딘 일행은 그렇게 5㎞를 남하하다가 금산 방향 도로가 북한군 병력에 차단된 사실을 확인했다. 지프와 트럭 몇 대 정도로는 기관총이 설치된 북한군 진지를 뚫어낼 수 없었다. 결국 딘은 차에서 내린 뒤 산으로 올라가서 밤이 올 때까지 은신하기로 했다. 여기서 또다시 운명의 장난. 딘은 늦은 밤 계곡으로 물을 뜨러 가다가 발을 헛디뎌 절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사단장이 장시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자 부하들은 수색을 포기하고 산길을 통해 영동 방향으로 후퇴를 이어갔다. 정신을 차린 딘은 단신으로 전북 일대의 산하를 방랑하는 신세를 맞이했다.
이렇게 대전전투에서 미군은 씻을 수 없는 치욕을 당했다. 방어에 투입된 3,933명 중 1,150명이 죽거나 다쳤고, 전체 사단 병력은 8,000명 선으로 줄어들었다. 딘의 행방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지자 미8군은 7월 22일 딘을 실종으로 처리하고 처치 준장을 후임 24사단장으로 임명했다. 미국 역사상 사단장이 작전 중 실종(MIA)된 최초 사례였다.
딘은 그 이후로도 한 달 동안 북한군 점령 지역에서 도피 생활을 계속했다. 중간에 미군 장교를 우연히 만나 함께 도망치다가 북한군에게 쫓기며 목숨을 잃을 뻔하기도 했고, 한국인의 도움을 받아 농가에서 피신 생활을 하기도 했다. 키 큰 백인 남성인 딘은 민가로 내려가거나 한국인들 사이에 몸을 숨기기도 어려웠다. 낮에는 산속에서 자고 밤에 부지런히 걸어서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가 자신을 대구까지 데려다 주기로 약속했던 어느 한국인의 밀고로 인해 북한군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1950년 8월 25일 전북 완주에서였다. 한 달이 넘도록 식사로 제대로 하지 못해 딘의 체중은 95㎏에서 55㎏로 줄어 있었다. 이날은 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포로로 잡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이 묶인 채 도망쳤다. 그들이 도망가는 나를 총으로 쏘아 죽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내 몸은 너무 허약했다. 겨우 1야드(90㎝) 정도나 도망갔을까? 누군가 나를 거칠게 밀치는 바람에 앞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윌리엄 딘이 기억하는 8월 25일 체포 순간)
⑤1953년 9월 4일 판문점
체포된 딘은 전주, 수원, 서울을 거쳐 평양으로 압송됐다. 처음에 딘은 사단장이란 사실을 숨기려고 했지만, 자신을 알아본 한 북한군 때문에 장군 신분이 드러나고 말았다. 북한 입장에서 딘은 넝쿨째 굴러 들어온 호박이었다. 미군 투스타라면 여러 방면으로 써먹을 곳이 많았다. 딘을 협박하거나 회유할 수 있다면 이 전쟁 시작의 책임을 미국과 남한에 떠넘길 수 있고, 딘이 방송에 나와 북한군의 우월성을 인정하면 국군과 유엔군의 사기를 확 떨어뜨릴 수도 있고, 이와 별도로 딘을 통해 미군의 핵심 군사 정보들을 얻어 낼 수도 있었다.
북한이 포로 심문 과정에서 딘에게 특히 강요했던 것은 ‘북침’ 인정이었다. 더글러스 맥아더와 이승만이 사전 모의를 통해 북한을 공격한 전쟁이라는 점을, 미군 장성의 입으로 폭로하기를 바랐다. 또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능력을 알고 싶어 했고, 이 전쟁에서 북한을 상대로 실제 원자탄을 쓸 것인지 여부를 무척이나 궁금해했다. 심문 도중 북한군의 학대나 고문은 없었지만, ‘미국 책임이라는 것만 인정하면 가족에게 당신 소식을 전해주고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잘 대접해 주겠다’는 집요한 회유가 이어졌다.
딘은 포로로 잡힌 다른 미군 장병들과 함께 정규 수용소에서 생활하기를 원했으나, 북한은 어렵게 사로잡은 ‘미군 소장’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해 별도 시설에서 구금했다. 아마 딘에게 장시간 미국인을 만나지 못하게 해 그의 정신력을 무너뜨리려는 의도도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딘은 북한의 위협과 회유를 끝내 버티며 왜곡 주장이 적힌 문서에 서명하지 않았고, 중공군과 북한군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선전하는 라디오 방송에 등장하지도 않았다.
딘은 포로로 잡힌 3년(1950년 8월~1953년 9월) 동안 북한이 중공군도 모르게 은밀하게 관리하는 안가에 붙잡혀 있었다. 1950년 10월 국군과 유엔군이 압록강 근처까지 치고 올라갔을 때, 북한은 딘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를 만포진의 한만국경 건너편인 지린성 지안(集安)으로 빼돌렸는데, 전쟁포로를 제3국으로 보내는 것은 제네바 협약 위반이었다. 딘은 항상 경비병이 지켜보는 방에서 경비병들과 함께 생활해야 했다. 산책을 위한 외출도 전혀 허용되지 않아 하루 10분 작은 방 안을 빙빙 돌면서 걷는 것이 운동의 전부였다. 그사이 회유와 협박은 계속됐고, 딘의 탈출과 자살 시도가 이어졌으나 무위에 그쳤다.
“내가 몇 달간 머물렀던 집에는 가로 3.6m, 세로 2.4m 크기 방에 부엌이 딸려 있었다. (중략) 어느 날 나는 경비병으로부터 하루 10분 동안 방 안에서 걸을 수 있다는 허락을 받았다. 대각선 한 방향으로 네 발을 걷고, 또 반대 방향으로 네 발을 걷는 식이었다.”
(윌리엄 딘 회고록 중에서)

방에서 수년 동안 갇힌 딘의 건강이 성할 리 없었다. 딘은 구금 기간 각종 질환으로 고생했고 1951년 여름에는 말라리아에 두 번이나 감염돼 목숨을 잃을 뻔했다. 밖으로 나갈 수도 없고 말할 사람도 없이 방 안에서만 갇힌 3년의 구금 생활 동안, 딘은 정신력을 유지하고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나름의 타개책을 마련했다. 그 하나는 단어 철자 순서를 바꿔가며 또 다른 단어를 만들어 내는 일종의 언어유희인 애너그램(anagram)이었고, 또 다른 취미는 파리를 잡는 일이었다. 딘이 감금된 안가는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파리와 모기가 들끓는 환경이었다. 딘은 경비병이 만들어준 간이 파리채를 이용해 파리를 잡으면서 그 숫자를 일일이 종이에 기록했다. 그는 회고록에서 “1951년엔 하루 492마리, 1953년엔 하루 522마리를 잡은 적도 있었다”며 “3년 동안 총 4만671마리의 파리를 잡았다”고 기술했다.
사단 병력을 끌고 북한군을 잡으러 갔다가 혼자 붙잡혀 파리를 잡게 된 기막힌 운명을, 딘은 회고록에서 담담하게 기술했다. 마치 조선시대 사관이 임금의 언행을 가감 없이 하나하나 기록한 것처럼, 자신의 실수·과오·굴욕을 가감 없이 회고록에 적었다. 실패를 변명할 법도 했지만, 모두 자신의 부족함 탓으로 인정했다. 딘은 3년의 한국 경험을 두고선 “영웅적인 일은 전혀 없었고 그저 모험이었을 뿐”이라고 자평했다. 그리고 자신을 그저 싸움에서 진 패장일 뿐이라고 몸을 낮췄다.
부산, 평택, 대전, 전주, 서울, 평양, 강계, 만주를 따라 3년 동안 이어졌던 윌리엄 딘의 모험은 1953년 9월 4일 끝났다. 휴전협정이 체결(7월 27일)되고 한 달 후 그는 판문점에서 송환됐다. 북한은 처음엔 딘을 포로로 잡았다는 사실을 대외적으로 알리지 않았다가 1951년 12월에야 뒤늦게 미국 측에 통보했다. 실종(사실상 사망 추정) 상태였던 1951년 1월 9일 딘은 해리 트루먼 대통령으로부터 미국 최고 영예 무공훈장인 명예 훈장(Congressional Medal of Honor)을 받았다. 명예훈장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특출난 용맹·희생·헌신·대담함을 동시에 보여준 군인에게 수여되는 훈장이다. 살아서 받기가 어렵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영웅적인 모범을 보여줘야만 받을 수 있다. 연전연패의 치욕을 당하고 미군 사단장 최초로 작전 중 실종되는 굴욕을 당한 딘은 어떻게 이 훈장을 탈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에서 영웅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거기에 속하지 않는다. 한국에서 뛰어난 군사지휘관은 많았다. 그러나 나는 길을 잘못 들어 포로가 된 장군일 뿐이다. 변명을 대고 싶진 않다. 나는 잃지 말아야 할 땅을 상실했고, 유능한 장교와 훌륭한 병사들을 잃었다.”
(윌리엄 딘 회고록 서문 중에서)
⑥총평: 최고의 군인, 최악의 사단장
미 육군 소장 윌리엄 딘이 6·25 전쟁에서 보여준 모습은 매우 복합적이다. 그는 ①대부대를 이끄는 고급 지휘관으로서 최악의 성과를 냈고, ②반면 개별 군인으로서는 특별한 용맹을 보여줬다. 그리고 ③포로로 잡힌 뒤에 조국과 동료들을 배신하지 않고 미군 장성으로서의 명예를 끝까지 지켰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
일단 ‘패장’으로서 실망스러운 모습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맥아더가 한반도에 딘을 급파하면서 기대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시간 끌기였다. 미8군 예하 다른 3개 사단 투입 때까지 24사단이 천천히 뒤로 물러나면서 최대한 지연전을 펼치라는 주문이었다. 그러나 그걸 감안한다고 해도 24사단이 여섯 차례 전투(오산·평택·천안·조치원·금강·대전)에서 보여준 수준은 너무나도 기대 이하였다. 이 패배에 딘의 책임이 적지 않다.
맥아더를 비롯한 대부분 미군 장군들과 마찬가지로 딘 역시 북한군을 얕보고 전투에 들어갔다. 미군이 나타나면 북한군은 바로 줄행랑을 칠 거라 예상했지만, 알고 보니 딘이 주로 상대했던 북한군 3·4사단은 국공내전에서 활약한 조선인들로 이뤄진 베테랑 부대였다.
적을 얕본 결과 딘은 전력을 집중시켜 시너지 효과를 높이기보다 부대를 여기저기 분산 배치하면서 여러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고자 했다. 평택과 안성에 각 1개 대대를 따로 배치했다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쫓겨났으며, 그 교훈을 새기지 못한 채 금강방어선 전투에선 공주-대평리-세종에 병력을 흩어 놓았다. 대전전투에서도 각 연대를 대전-옥천-영동에 분산 배치했다.
상급자 및 부하들과의 소통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사단장이 휘하 연대장에게 작전 목표, 철수 시점, 다음 집결지 등을 정확하게 주지했어야 했지만, 24사단 연대장들은 항상 혼란을 느꼈다. 직속상관 워커가 주문한 ‘대전 이틀 사수’ 명령이 현실적으로 달성 불가능한 것을 알았다면 워커에게 다시 건의해 조기 철수를 요청해야 했음에도, 딘은 그러지 않고 가망 없는 전투에 부하들을 꾸역꾸역 투입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딘의 가장 큰 문제는 사단장이 아니라 중대장이나 소대장처럼 행동했다는 점이다. 1만6,000명(24사단 최초 병력+다른 사단에서 받은 전출 병력) 대군을 이끄는 사단장이라면 상급부대 및 공군의 지원을 이끌어 내면서 △후속 부대 증원 △엄호 부대 배치 △측면 노출 부대 퇴각 등 거시적인 지휘를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딘은 특정 연대 관할구역(대전)에서의 작전만 챙기다가, 후퇴 시기를 놓쳐 포위됐다. 적에 대한 분노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며 몇 시간 동안 전차 몇 대를 쫓아다니느라 사단 전체의 명령 공백 상태를 초래하고 말았다.
“왜 사단장이 사령부의 혼란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나? 왜 바주카포를 직접 잡고 탱크 사냥을 다니고 있었나? 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한국전쟁 당시 25사단 연대장 존 마이켈리스)
다만 사단장으로서 딘은 최악이었지만, 장교 혹은 군인으로서 보여준 모습 중엔 높이 평가할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먼저 목숨을 아끼지 않은 용맹과 솔선수범. 대전전투 당시 24사단 지휘소는 남동쪽으로 40㎞ 떨어진 영동이었고, 대전 시가지는 사단 예하 34연대 관할이었다. 딘은 영동에 머물면서 34연대장을 통해 개별 전투를 지휘하며 다른 연대로 하여금 34연대를 지원하도록 후방 지휘를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딘은 직속상관(워커)이 당부한 ‘이틀의 시간’을 벌기 위해선 대전 시가지 전투를 정밀하게 통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 직접 연대 지휘소에 나가 전투에 임했다. 딘은 초반 몇 차례 전투에서 장교 사상자가 많아 현장 전투를 지휘할 인력이 부족했던 상황에서, 사단장이 직접 탱크를 요격하는 방법을 전수해 현장 전투부대의 사기를 올리는 데도 성공했다.
딘은 장교로서 병사들의 안위를 챙기려는 책임감도 투철했다. 7월 20일 대전에서 철수할 때는 부하들을 먼저 보낸 뒤 가장 늦게 떠났고, 남쪽으로 철수하던 중 부상병과 낙오병들을 발견하자 부하들을 사단장 지프에 태운 뒤 자신은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산에서 적 저격수가 미군 이동을 가로막자 M-1 개런드 소총을 꺼내 직접 제압사격을 주도해 활로를 뚫기도 했다. 그가 실종된 결정적 이유는 자정 무렵 산에서 직접 물을 뜨러 계곡으로 내려가다가 발을 헛디뎠기 때문이다. 물 길어오는 일을 병사에게 맡겼더라면, 딘은 다른 부하들처럼 영동 방면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해 7월 23일 24사단 점령 지역으로 무사히 후퇴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짚어 본다면 딘이 어떻게 명예훈장을 받을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미국 정부도 딘의 명예훈장 공적서에서 ‘영웅적인 리더십, 용기, 부하들에 대한 헌신’을 수훈 이유로 들었다.
최고의 군인, 최악의 사단장, 전쟁 와중에 가장 심하게 고생했던 미군 장교. 1950년 7월 딘의 모습은 그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국방력이 가장 약했고 미군은 가장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노후한 장비, 부족한 병력, 낮은 훈련도 탓에 미 육군의 전력은 전반적으로 엉망이었다. 그때 미군 상주 병력도 없는 극동의 작은 나라에서 대규모 전면전이 터졌다. 딘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명장이 왔더라도 전세를 뒤집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때 딘의 잘못은 사단장이 지나치게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는 점이었다. 위급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에 대응해야 했던 미 군사력의 한계, 모순, 가능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군이 바로 윌리엄 딘이었다.
◆기사 작성에 참고한 자료
<회고록>
-William F. Dean ‘General Dean’s Story’
<당시 전황>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 ③, ④’
-데이비드 핼버스탬 ‘콜디스트 윈터’
-박일송 ‘대전전투와 미군의 전투효율성’
<윌리엄 딘의 행적>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Roy Appleman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Joseph Goulden ‘Korea-The Untold Story of the War’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윌리엄 딘에 대한 평가>
-Max Hastings ‘Korean War’
<논문, 기사, 게시물>
-뉴욕타임스의 윌리엄 딘 부고기사
-Matt Whittaker ‘The American Defeat at Taejon That Saved South Korea’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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