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아리] 교사가 입을 열 수 있는 교실
이념 갈등, 법적 굴레 탓에 교사는 방관
수업 중 정치·사회 쟁점 다룰 원칙 필요
편집자주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 선보이는 칼럼 '메아리'는 <한국일보> 논설위원과 뉴스룸국 데스크들의 울림 큰 생각을 담았습니다.2024년

“학교에서 극단적 혐오 정서를 숨기지 않는 학생들이 늘고 있습니다. 다른 의견을 가진 친구들을 적대시하고 공격한 뒤 교사가 이를 지도하려 하면 아동학대로 고발합니다.”
얼마 전 만난 서울의 한 중학교 교장 선생님이 전한 학교 현실이다. 온라인 알고리즘에 의해 극단적 정치 신념을 갖게 된 학생들이 교실에서 큰 목소리를 내고, 교사들은 이에 속수무책이라는 얘기다. 교사들은 자연히 논쟁적인 정치·사회 주제를 피할 수밖에 없는데 그는 “단순히 교실 문제를 넘어 민주주의의 위기를 가져올 것”이라고 우울하게 전망했다. 더불어민주당 정책위원회에서 일하는 정민철(25)씨도 최근 펴낸 책 ’1020 극우가 온다’에서 비슷한 주장을 폈다. 그는 책에서 “아이들이 갖고 다니는 스마트폰에서 진짜 정치가 이뤄지고 있다. 아이들의 영혼은 혐오의 알고리즘에 잠식당하고 있다”고 했다. 저자가 특정 정당 정당원이라는 점에서 여과 없이 받아들일 주장은 아니나, 청소년들의 정치ㆍ사회적 신념 형성에 자극적이고 재미있는 게임 유튜브, 인스타그램 릴스, 틱톡 등이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들이 보수성향이건 진보성향이건, 입장 자체를 시비할 수는 없다. 그러나 마음 한편은 무겁다. 설령 민주주의 공격, 폭력 선동 등 헌법 가치에 어긋나는 극단적인 정치적 주장이 교실에서 판을 쳐도 학교가 손 놓을 수밖에 없는 현실 때문이다. 과연 언제까지 ‘교육의 정치적 중립성’ 원칙 뒤에 숨어 교실을 정치적 진공상태로 유지되도록 내버려둬야 할까.
이미 고등학생(16세)이 되면 정당 가입이 가능하고, 고등학교 3학년생(18세)에게는 투표권이 주어진다. 심지어 국민의힘 장동혁 대표는 지방선거 연령을 16세로 낮추자는 제안까지 했다. 다음 달 치러지는 지방선거에 투표할 수 있는 고등학생은 20만 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런 환경이라면 교사가 중심을 잡고 수업에서 정치ㆍ사회적 이슈를 정면으로 다루는 정치교육의 틀을 제대로 만드는 게 순리일 것이다. 교사들은 정답을 알면서도 부담스러워한다. 초중고 교원 53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정설미ㆍ모영민, 2024)에 따르면 전체 64%가 사회ㆍ정치적 이슈 통합 수업이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실제 수업에서 정치ㆍ사회적 이슈에 대해 학생 간 토론을 진행하고 자신의 견해까지 표현한다는 교원은 3%에 불과했다. 여전한 한국 사회의 이념적 갈등과 그에 수반될 민원, 교사의 정치 참여에 대한 여러 법적 제약 등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해법으로 좌우 대립의 골이 깊었던 독일의 교육계가 정치교육 원칙에 뜻을 모은 ‘보이텔스바흐 합의’(1976년)가 자주 거론된다. 교사의 학생에 대한 강압 금지 원칙, 쟁점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관점을 모두 제시하는 원칙, 학생 스스로의 판단을 도와준다는 원칙 세 가지다. 이 3원칙은 독일뿐 아니라 유럽 전역에서 수업 중 정치ㆍ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방식에 대한 대(大)원칙으로 존중받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불씨는 지펴졌다. 교육부는 교사들이 자유롭게 토론수업을 할 수 있는 기본원칙을 만든 뒤 사회적 논의를 거쳐 법제화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을 연초에 내놓은 바 있다. 물론 그 과정은 시끄러울 것이다. 하지만 교실에서 정치ㆍ사회적 쟁점에 대해 학생들의 활발한 토론을 유도하면서도 교사가 민주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한국판 보이텔스바흐 합의’를 도출하려는 시도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해야 한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상의 편향된 정치 인플루언서들에게 10대들의 정치 교육을 전담시킬 요량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왕구 논설위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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