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만리) 채미정(採嶶亭)에서 / 이토록

최미화 기자 2026. 5. 7.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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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미정(採嶶亭)에서는 감각적이면서 성찰이 깊은 내밀한 시조다.

고려 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에 세운 정자다.

더구나 그 고요를 시렁 위에 얹어둔 날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렁이라는 시어가 퍽 친숙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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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환(시조 시인)

귀를 잃고 얻은 고요/ 시렁 위에 얹어둔 날// 마음에도 뼈가 있어/ 살 비집고 나온 근심/ 그 옛날 함께 걸었던 기척들이 돌아올까/ 움푹 파인/ 쿡쿡 찍힌/ 흙투성이 소식들아/ 살던 것 다 떠나서 허물어진 삽짝 밖/ 두고 간/ 발자국은 이미/ 발소리를 잊었다
『오늘의시조』(2026년, 상반기호)

「채미정(採嶶亭)에서」는 감각적이면서 성찰이 깊은 내밀한 시조다. 채미정은 구미 금오산에 있다. 고려 말의 충신이요, 성리학자인 길재(吉再)의 충절과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1768년(영조 44)에 세운 정자다.

귀를 잃고 얻은 고요, 라는 첫 구절부터 눈길을 사로잡는다. 더구나 그 고요를 시렁 위에 얹어둔 날이다.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렁이라는 시어가 퍽 친숙하게 다가온다. 요즘 사람들은 시렁을 잘 모른다. 시렁이 주는 그 고유한 느낌과 향기를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느끼기가 어려울 것이다. 마음에도 뼈가 있어 살 비집고 나온 근심, 이라는 대목도 주목된다. 마음에도 뼈가 있다니 놀라운 발견이다. 그래서 그 옛날 함께 걸었던 기척들이 돌아올까, 라고 나직이 묻고 있다.

둘째 수 초장에서 움푹 파인 쿡쿡 찍힌 흙투성이 소식들아, 라고 간절히 부른다. 살던 것 다 떠나서 허물어진 삽짝 밖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고 간 발자국은 이미 발소리를 잊었다, 라는 종장을 통해 멀리 고려말 충신 야은 길재의 충절과 유덕까지 상기시킴으로써 시의 진폭과 깊이를 더하고 있다. 텍스트 자체로만 감상이나 해석에 그치지 아니하고, 텍스트 상황까지 확대하여 읽는 방법이다.

독특한 시조 「키스」를 한 편 더 살핀다.
고라니는/ 올가미 저 너머서 왔습니다// 그 숲, 가시밭길/ 피 흘리며 왔습니다// 나직한 신음 소리가 허밍처럼 흐르던 밤// 살아서, 꼭 살아서/ 고백은 했을까요// 꼬리만 움찔하는, 이따금 버둥대는// 찔레꽃 하얀 꽃잎에/ 혀를 댔던 그 순간.
보다시피 이채로운 시편이다. 사슴과의 동물로 노루의 일종인 고라니가 등장한다. 몸길이 약 90cm이고, 등은 적갈색이며 배와 턱 밑은 흰 야생동물로 비교적 사람들과 친숙한 편이다. 산기슭이나 강가의 갈대밭에 살지만, 가끔 인가로 내려올 때가 있다. 마록(馬鹿)이라고도 부른다. 「키스」의 주인공 고라니의 생태를 길게 거론한 것은 고라니가 퍽 사랑스럽고 때로 애처로워 보여서다. 특히 맑은 눈빛이 마음을 강하게 끌어당긴다. 시 속의 화자도 상상력을 발동하여 살아서 고백했는지 말하다가 고라니가 움찔 버둥대다 찔레꽃 하얀 꽃잎에 혀를 댔던 그 순간을 떠올린다.
이렇듯 「키스」는 기발하면서도 섬세하고 섬뜩하니 아름답다.
이정환(시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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