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헌법에 ‘김정은 핵사용권’ 명시
통일 관련 조항과 문구는 삭제

북한이 지난 3월 최고인민회의에서 개정한 새 헌법에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핵 사용 권한을 처음으로 명시하고, 김정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것으로 6일 확인됐다. 북한은 또 남북 간의 휴전선을 사실상 ‘국경선’으로 설정하는 영토 조항을 신설하면서, ‘통일’ 관련 조항과 표현은 삭제했다. 김정은이 2023년 말부터 제시한 남북 ‘두 국가 관계론’을 헌법에 반영한 것이다. 다만 김정은이 당시 사용한 “교전국 관계” “남조선 전 영토 평정” 등의 적대적 표현은 헌법에 담기지 않았다.
이날 통일부 기자단 언론간담회에서 공개된 북한의 새 헌법 2조는 북한의 영역을 “북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러시아연방,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영토와 그에 기초해 설정된 영해와 영공”으로 규정했다. 기존 헌법에 없던 영토 규정을 최초로 신설하며 북한은 “영역에 대한 그 어떤 침해도 절대로 허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기존 북한 헌법 9조에는 “북반부에서 인민정권을 강화”하고 “조국 통일을 실현하기 위해 투쟁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삭제됐다.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의 이른바 ‘조국 통일 3대 원칙’도 함께 삭제됐다. 김정은은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헌법에 있는 ‘자주·평화통일·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돼야 한다”고 했는데,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북한의 새 헌법 89조에는 “핵무력에 대한 지휘권은 국무위원장에게 있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국무위원장이 ‘국가핵무력지휘기구’에 핵 사용권을 위임할 수 있다는 조항도 신설돼, 김정은의 해외 방문 등에 대비했다는 해석이 나온다. 90조에는 국무위원장이 최고인민회의가 채택한 법령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남으로 대한민국과 접해” 휴전선을 국경선으로 못박아
6일 공개된 북한의 새 헌법 1조는 “우리나라의 국호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란 국호 규정이다. 기존 북한 헌법에 없던 국호 규정을 만든 것이다. 북한은 2조에 영토 규정을 처음 신설했고, 3조에는 공민 자격에 대한 조항을 배치했다. ‘사회주의 헌법’이었던 헌법의 명칭도 ‘헌법’으로 바꿨다.
통일부 자문위원으로 이날 통일부 기자단 언론간담회를 진행한 이정철 서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이에 대해 “전반적으로 북한을 정상국가화하는 차원”에서 “다른 나라들 헌법과 유사한 형태를 띠는 쪽으로 변화를 꾀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2024년 1월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헌법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는 것을 조문에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도 했다.
이번에 공개된 북한의 개정 헌법에 이처럼 적대 관계를 명시하는 조항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남북이 “전쟁 중인 교전국 관계”라는 김정은의 입장이 달라졌다는 뜻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 이정철 교수는 “북한도 자국의 최고 문서에 험한 표현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 변화 등을 염두에 두고 수위를 조절했을 가능성도 있다.
북한은 자국 영토가 ‘북쪽으로 중·러,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다’고 했지만, 영해와 영공의 경계선은 헌법에 명시하지 않았다. 북한은 1953년 유엔군사령관이 설정한 남북 간 해상 경계선인 북방한계선(NLL)을 부정하며, 연평도와 백령도 등 서해 5도 일대가 모두 북측 수역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김정은은 2024년 2월 NLL이 “국제법적 근거나 합법적 명분도 없는 유령선(幽靈線)”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북한이 헌법에 영해 조항을 신설해 서해 NLL 무력화에 나설 것이란 우려가 있었으나, 이번 개정에 포함되지 않았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 석좌교수는 “현재 남북 간 육상·해상 경계선은 정전협정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 국제법적 논란을 일으키지 않으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해된다”고 말했다.
북한의 새 헌법 특징 중 하나는 김정은의 권한이 전반적으로 대폭 강화됐다는 점이다. 기존 헌법은 명목상의 최고 주권 기관인 최고인민회의 관련 내용을 국가기구 1절에, 김정은이 맡고 있는 국무위원장 관련 조항은 2절에 뒀다. 새 헌법에서는 그 순서를 바꿔 처음으로 국무위원장을 국가기구 1절에 배치했다.
기존 헌법에서 ‘최고영도자’로 규정했던 국무위원장을 새 헌법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는 ‘국가수반’으로 정의했다. 최고인민회의가 채택한 법령 등에 대해 국무위원장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조항이 신설된 반면, 최고인민회의가 갖고 있던 국무위원장 소환권은 삭제됐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행사하던 외국 대사의 신임장 접수도 국무위원장의 권한으로 변경됐다. 국무위원장이 임명 또는 해임할 수 있는 ‘중요간부’에 최고인민회의 의장과 내각총리도 포함된다는 점도 명시됐다. 한기범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선임연구위원은 “김정은의 실제 권력과 헌법 조문을 일치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러시아 파병 이후 개정된 이번 헌법에서는 “국가와 사회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군의 범위가 “해외 군사 작전 참전 열사 유가족” 등으로 확대됐다. 또 “국가는 국방 과학 기술을 발전”시키고 “온 사회에 군사 중시 기풍을 세우고 전민 항전(全民 抗戰) 준비를 빈틈 없이 갖추도록 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반면 사회주의 무상 복지 조항은 모두 삭제됐다. “세금이 없어진 우리나라” “실업을 모르는 우리 근로자” “무상치료제” 등의 표현이 삭제됐다. 국가가 근로자의 생활 조건을 “마련해 준다”는 조항은 “마련해 주기 위해 투쟁한다”는 표현으로 대체됐다. 다만 기존에 없던 다자녀 여성에 대한 우대 조치를 명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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