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250년, 이상과 현실의 투쟁] 정적들을 국무·재무·법무장관에 기용한 링컨… ‘관용·통합’ 정신 되찾아야

송동훈 문명 탐험가 2026. 5. 6. 2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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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남북전쟁과 링컨의 리더십
대선후보 경선 때 붙은 라이벌들
요직에 기용해 북부 ‘원팀’ 구성
노예제 폐지·남북전쟁 승리 이끌어
통합 리더십, 지금의 미국에 절실

미국은 올해 탄생 250주년을 맞았다. 1776년 독립 이후 미국의 영토는 약 11배 확대됐고 인구는 135배 폭증했다. 세계 제1 경제력을 갖춘 건 100년 전이다. 영국인들이 세운 식민지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런 기적을 이뤘을까? 미국과 세계가 중대한 변곡점에 선 지금이야말로 그 역사를 통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대비해야 할 시점이다. -편집자 주

미국 화가 프랜시스 비크넬 카펜터가 1864년 완성한 이 그림은 1862년 7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내각 각료들에게 ‘노예 해방 선언서’의 초안을 낭독한 역사적인 순간을 담고 있다. 왼쪽에서 두 번째가 새먼 체이스 재무장관, 세 번째가 링컨 대통령이다. 맨 오른쪽은 에드워드 베이츠 법무장관이며, 베이츠 앞에 앉아 왼쪽을 주시하는 이는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이다. /미국 상원 소장

미국이 분열되고 있다. 이토록 분열된 미국의 모습은 남북전쟁(Civil War) 이후 거의 보지 못했다. 2021년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한 불복으로 벌어진 국회의사당 점거 사건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도 미국에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공화당과 민주당 지지자들의 의견이 갈수록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지난 2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갤럽 여론조사가 대표적이다. 공화당 지지자들은 70%가 이스라엘에 동정적이라고 답했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동정은 13%에 불과했다. 민주당 지지자들의 여론은 정반대였다. 팔레스타인 동정(65%)이 이스라엘 동정(17%)을 압도했다. 국제 문제에서도 국론이 심각하게 갈라져 ‘심리적 내전 상태’에 들어선 셈이다. 앞으로 미국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해답은 19세기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끈 에이브러햄 링컨(1809~1865)의 리더십과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노예제도로 나라가 쪼개진 미국

미국은 주(州)들이 모여 만들어진 연방국가다. 독립 이전의 공통점은 영국의 식민지라는 처지뿐이었다. 각 주는 세워진 시기와 자연환경부터 역사, 전통, 문화, 인적 구성, 경제적 토대까지 매우 다양했다. 크게 봤을 때 남부와 북부는 확연히 달랐다. 남부는 식민지 건설 초기부터 대농장 중심의 농업을 경제의 주력으로 삼았다. 그 결과 많은 노예가 필요했고, 부유한 농장주들을 중심으로 귀족적인 문화가 형성됐다. 북부에서는 자영농 중심의 농업·어업·상업 등 다양한 산업이 번성했다. 노예가 거의 필요하지 않은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였다.

노예제 문제는 그런 이유로 독립 시기부터 ‘뜨거운 감자’였지만, 남과 북은 국가 결속을 위해 노예제 해결을 뒤로 미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문제는 심각해졌다. 특히 1794년 휘트니가 조면기를 발명한 것이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목화씨를 사람의 손이 아닌 기계로 걸러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노동력 대비 목화의 수익성이 다른 모든 작물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목화 생산이 급증했고, 노예 노동에 대한 의존도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이제 남부의 경제 구조는 노예제에 영구히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전락했다. 건국 초기에 마지못해 노예 제도를 묵인한 양식 있는 정치인과 지식인은 자취를 감추고, 다수가 노예 제도를 옹호하며 부를 추구했다. 황금과 양심을 맞바꾼 것이다. 이런 남부를 북부는 경멸했고, 그런 북부를 남부는 경계했다. “남부는 너무도 오랫동안 북부의 모욕을 받아왔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 정치가 캘훈의 발언에 남부인들은 열렬히 호응했다.

남북전쟁과 링컨의 전시 내각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링컨 기념관. 내부에 세워진 링컨 동상의 뒷편에는 ‘링컨에 대한 기억은 그가 구한 연방 사람들의 가슴 속에서처럼 이 성전에 영원히 모셔질 것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링컨 기념관

미국 영토가 서쪽으로 확장되고 새로운 주가 생겨날 때마다, 노예주로 할지 자유주로 할지를 둘러싼 남북 갈등이 더 불거졌다. 국가의 비전과 이를 실현할 리더십이 절실한 시점에, 무능한 대통령들의 연이은 집권으로 사태는 악화됐다. 1854년 북부에서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다양한 정파가 모여 공화당을 창당했다. 1857년 연방대법원이 “헌법은 백인만을 위한 것이고, 노예는 일종의 자산이다”라고 판결하자 북부의 여론은 폭발했다.

1860년 대선을 앞둔 공화당은 필승 후보로 뉴욕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수어드, 오하이오 주지사와 상원의원을 지낸 체이스, 미주리 주의 정치 거물 베이츠가 나섰다. 그들에 비하면 에이브러햄 링컨의 경력은 미비했다. 그가 비록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거물 더글러스를 상대로 명승부를 펼쳤지만, 일리노이 주 연방하원의원을 한 번 역임한 게 최고의 경력이었다. 처음부터 ‘승산 없는 게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반대했지만 링컨은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다. 그에겐 자신감이 있었다. 수어드와 체이스는 너무 과격했고, 베이츠는 너무 유약했다. 링컨은 신중하고 일관되게 중도 노선을 견지하며 외연을 확장했다. 역사적인 후보 경선 투표는 1860년 5월 16일 시카고에서 열렸다. 3차까지 가는 치열한 경쟁 끝에 중도층의 지지를 확보한 링컨이 매직넘버(233표)를 획득했다. 공화당의 단결과 대선 승리를 위해 나머지 후보들의 지지자들이 모든 표를 링컨에게 돌림으로써 만장일치로 대선후보로 뽑혔다. 반면에 민주당은 북부와 남부로 분열되면서 각각의 후보를 공천했다. 링컨은 무난히 승리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으로서 링컨은 전쟁 대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고 연방을 지켜나가자고 호소했지만 남부는 거부했다. 링컨이 취임하기도 전에 사우스캐롤라이나를 필두로 남부의 11개 주가 연방을 탈퇴해 남부연합을 결성했다. 독립을 선언한 지 85년 만의 일이었다. 전쟁이 불가피해 보였다. 링컨은 먼저 경선에서 경쟁한 정적(政敵) 모두를 전시 내각의 요직에 등용했다. 수어드에게는 국무장관직이, 체이스에게는 재무장관직이, 베이츠에게는 법무장관직이 주어졌다. 남부와 싸워 이기려면, 북부가 먼저 정치적으로 ‘원팀’이 돼야 한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미국 워싱턴DC에 있는 링컨기념관 /링컨기념관

미국이 회복해야 할 링컨의 정신

남부의 선공으로 시작된 내전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장기화됐다. 피해가 막대했다. 남북전쟁 기간의 사망자 수는 61만8000명에 달했다. 이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미군보다 많은 숫자다. 전쟁 내내 위기가 지속됐지만 링컨은 관대함과 결단력, 포용력과 냉정함이라는 자질을 적절하게 활용해 결국 노예제도를 폐지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링컨은 승리 직전에 열린 두 번째 취임식에서 역사상 길이 남을 따뜻하고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밝혔다. “누구에게도 악의를 품지 말고, 모두에게 관용을 베풉시다. (중략) 우리 사이에서, 그리고 국제사회에서 올바르고 항구적인 평화가 성취되고 존중되는 데 이로운 일이라면 무엇이든 합시다.”

링컨은 ‘정의보다 관용이 언제나 더 풍요로운 결과를 낳는다’고 믿었다. 그의 통합 전략은 지금의 미국이 회복해야 할 금과옥조다. 링컨이 남북전쟁 중에 보여준 리더십이 되살아날 때, 그가 남긴 관용과 평화의 정신이 정책 속에 반영될 때, 미국은 분열을 극복하고 국제 질서를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끄는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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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엘리자베스 1세

프랑스 앙리 4세를 보라

관용을 실천한 리더들

앙리 4세가 1594년 시민들의 감사와 환호 속에 왕으로 파리에 입성하는 순간을 담은 그림. /베르사유궁 소장

관용(寬容)은 리더에게 필수적인 자질이다. 그러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권력 투쟁 혹은 전쟁에서 승리한 이들이 관용을 베푸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관용을 실천한 극소수 리더가 존재한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1533~1603)는 왕위에 올랐을 때 많은 귀족이 숨죽였다. 다수의 귀족이 그녀의 어머니 앤 불린의 죽음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돼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왕은 45년 동안 공식 석상에서 어머니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 당연히 정치보복도 없었다. 영국 역사는 그녀의 치세를 ‘황금기’로 기록했다.

프랑스의 앙리4세(1553~1610)는 더 대단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프랑스는 신·구교도 간의 종교전쟁이 한창이었다. 피해가 커지자 양측은 평화를 모색하기 위해 신교도 수장인 앙리와 가톨릭교도인 공주 마고의 결혼을 약속했다. 그러나 가톨릭측은 1572년 8월,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 새벽에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파리로 온 신교도들을 학살했다. 2000~3000명이 희생됐다. 그 참혹한 현장에서 생존한 앙리4세는 강제 개종, 탈출, 전쟁 등의 우여곡절 끝에 결국 왕위에 올랐다. 그는 끔직한 학살을 자행했던 파리를 용서했다. 정의 대신 관용, 복수 대신 화합을 선택한 것이다.

이처럼 영국이 엘리자베스1세 때부터, 프랑스가 앙리4세 때부터 강대국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관용의 리더십’은 오늘날에도 깊은 교훈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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