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잉여일 때는 몰랐던 것들
2000년대 후반, 네이트온 메신저로 친구들에게 “너 지금 뭐해?” 물으면 이런 답이 곧잘 돌아오고는 했다. “나? 지금 잉여야!” 청년 실업자 문제가 화두였고, 온라인상의 이른바 잉여 문화가 시대의 청춘을 향한 걱정을 일으키기 시작하던 때였다.
하지만 그런 진지한 비평과는 무관하게, 당시의 대학생들은 잉여라는 단어를 그저 지금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간이 비어 있다는 뜻으로 흔히 사용했다. 직접 돈을 버는 노동이나 학교 과제, 시험 공부 등을 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영화 보기나 덕질, 인터넷 같은 대부분의 취미 활동까지 잉여의 범주에 포함됐다.
대충 20년이 지나 다시 생각해보니, 그때 우리의 시간과 존재를 잉여라고 자칭한 게 여러 면에서 틀렸던 일임을 깨닫는다. 조금 재미는 있었을지 모르지만, 사실은 맞지 않는 비유일뿐더러 윤리적으로 고민해볼 지점도 있다.
첫째, 비생산적인 것처럼 보이는 시간이 장기적으로 생산성을 높여주는 것이 창의적인 지식 노동의 특성이다. 논문을 직접 타이핑하기 위해 문서 창을 띄우기 전까지, 한세월을 멍만 때리는 것처럼 보이는 연구자에게 그것이 준비 시간이자 루틴일 수 있듯 말이다.
사회학자 부르디외의 문화 자본 개념은 특별히 의식적으로 훈련하지 않더라도, 부모가 가진 문화 자본을 자녀가 자연스럽게 환경적으로 상속받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그때 대학생들이 잉여랍시고 했던 쓰잘데없어 보이는 일들이 그들이 지금 직업인으로서 일하는 데 필요한 근육이 됐다. 문화상품의 최종적인 한 끗 차이를 만드는 이들의 취향과 감각에도, 업무를 파악하고 구조화해 효율적으로 처리하는 역량에도 학교 교육이나 직업 교육 바깥의 ‘잉여짓’의 효과가 포함돼 있다.
둘째,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통의 경우 배제이지만, 대학생에게는 오히려 특권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오늘날 많은 대학생이 취업준비에 몰두하는 삶을 살고 그래서 그런지 잉여라는 단어도 잘 사용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대학생이라는 신분은 입시를 위해 무언가를 참아야 하거나 노동자로서 근면해야 하는 것과는 다른 예외적인 시간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대학생이 되자마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불평등의 표지일 수 있다. 신입생 때 아르바이트를 하러 다니고, 도서관에 출몰하는 나에게 누군가 이런 말을 건넨 적이 있다. “넌 참 열심히 산다. 나도 잉여짓 그만하고 너처럼 살아야 하는데.” 나는 생활비가 절실하기보다는 추가 소득을 원했던 입장이지만, 부모가 등록금과 생활비를 제공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잉여조차 될 수 없는 학생들이 그때도, 지금도 많이 존재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보면, 잉여는 ‘갓생러’를 부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지만 잉여 문화가 주류적으로 재현됨으로써 가난한 대학생의 이야기는 공론장에서 사라지고, 미래의 불투명함을 걱정하는 평범한 젊은이들이 청년 문제의 핵심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기도 했다.
셋째, 잉여 담론은 잉여 인간을 양산하는 사회 구조의 모순을 타격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나, 현재로서는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스스로 잉여를 자처하던 개인들은 대부분 적당한 직장의 30대 후반, 40대 초반 중간 관리자가 됨으로써 주류 사회에 잘 편입하고 있다.
잉여는 정치 운동은 되지 못했으나, 한 시대를 풍미한 문화 코드가 됐다. 이른바 루저 감성의 음악과 영화, 드라마가 즐비했고 동세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었다. 이런 취향의 대표적인 생산자들과 소비자 다수가 세대 내의 엘리트 계층이라는 점은 의아하면서도, 수긍이 가는 일이다. 이는 앞서 말했듯, 잉여라는 단어와 감성 자체가 애초에 엘리트적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김선기 국립부경대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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