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현실]강한 군대의 조건
1584년 음력 3월20일, 선조는 친히 군의 준비 태세를 점검하고, 무관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행사를 진행했다. 길주목(현재 서울 구로구 일대) 후원인 반송(盤松)에서 군사들 진법 훈련을 주관하고, 친히 포를 쏘는 모습도 연출했다. 나아가 신임 무관 선발을 위한 무과시험까지 시행함으로써, 국방에 대한 왕의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선조가 이렇게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해 2월 북쪽 국경에서는 번호(藩胡)들이 난을 일으켜 경원부를 함락하는 일이 있었다. 번호는 조공을 바치고 조선과 무역을 하는 국경 지역 이민족들로, 조선과의 관계를 터전 삼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다. 당연히 조선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평소 이들은 조선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국경지대에 위치한 그들의 지리적 이점을 살려, 외적 침입을 미리 알려주는 등 국가 방위의 중요한 정보 자산으로 활동했다.
그런 번호들이 난을 일으켜 국경 지역을 함락했으니 선조로서도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늘 대비해야 했던 단순한 이적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선 조정 입장에서 이는 시쳇말로 배신이자 배반이었다. 당연히 군을 동원해 난을 진압함으로써 본때를 보여줘야 했고, 이로 인해 국경에서는 번호들과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다. 비록 국경 지역에서 이루어진 국지전이었지만, 그 지역 백성들 입장에서는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었고, 피해도 컸다.
선조가 직접 습진 훈련과 무과를 시행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다. 왕이 직접 사열하는 자리였던 만큼, 군사들의 움직임에는 조금의 허점도 허락하지 않았을 터였다. 빽빽하게 도열한 군사들과 함께 수많은 군기들이 휘날렸고, 그 사이로 군마들의 말발굽 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젊은 선조의 심장이 말발굽 소리만큼 빠르게 뛰었고, 이를 통해 자기 권력에 대한 확신을 가졌을 것이다. 또한 무과에서 장원으로 선발된 황정(黃珽)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며, 기분이 한껏 고무된 선조는 그 자리에 함께한 종친과 재상들에게 술을 내리고 음악까지 연주하게 했다.
그러나 선조의 이 같은 처사에 대해 사헌부와 사간원 언관들이 문제를 제기했다. 변방 백성들 때문이었다. 비록 국지전이었지만 지속된 전투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곤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무리 이를 막기 위해 시행되는 군사훈련이라 해도, 변방에서 희생된 백성들을 생각하면 최소한 음악 연주만이라도 멈출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언관들이 두 번이나 간곡하게 간언했지만, 모처럼 가슴 뛰는 군사훈련으로 한껏 치밀어 오른 젊은 왕의 치기를 말릴 수는 없었다(금난수의 <성재일기>).
왕이나 대통령과 같은 최고 권력이 함께하는 군사훈련은 예나 지금이나 상징성이 큰 정치 행위이다. 조선시대 왕이 친히 진행했던 습진 훈련이나, 근현대 최고 권력자가 참석하는 군의 열병식은 정치적으로 동일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이다. 특히 무력을 통해 자기 권력을 확인하고 이를 대내외에 천명하고 싶은 권력자일수록 이러한 행사를 중시하기 마련이다. 북한이 그렇고, 얼마 전 대한민국도 그랬으며, 심지어 미국도 그랬다.
그러나 모두 알고 있는 것처럼, 열병식과 같은 무력시위가 군의 강함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특히 군의 힘이 국민들의 신뢰를 통해 확보되는 민주주의 국가일수록 더더욱 그렇다. 군의 행사가 국민들의 뜻과 같아야 하는 이유이며, 동시에 백성들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고 이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이다. 언관들의 간언이 말하고 싶었던 대목이다. 그러나 이를 고려치 않았던 선조의 국방 의지는 이 기록이 있은 지 불과 8년 뒤 발발한 임진왜란을 통해 그 허약성을 증명했고, 열병식을 통해 고무된 군통수권자의 치기가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낳는지는 얼마 전 있었던 한국의 불법계엄, 그리고 오늘날 미국과 이란 전쟁이 보여주고 있다.

이상호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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