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리하라의 사이언스 인사이드]할 수 있는 것과 지켜야 하는 것 사이에서

이은희 과학저술가 2026. 5. 6.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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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성 질환의 원인은 세균, 미생물, 곰팡이, 원충, 기생충 등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 모두는 외부에서 체내로 유입되어 질병을 일으킨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그래서 사람들은 감염성 질환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감염원과 접촉하는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거나(방역), 미리 면역력을 갖춰 감염원이 체내에 들어와도 발병하지 못하게 하거나(백신 접종), 이미 침투한 감염원을 효과적으로 퇴치할 수 있는 치료제(항생제 등)를 갖추는 방법으로 이러한 질병에 대항해왔다.

그런데 최근 과학자들은 여기에 새로운 방법을 하나 더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바로 선천적으로 특정 질병에 걸리지 않음과 동시에, 그 특성이 자자손손 유지되도록 유전자를 편집하는 질병 저항성 유전자 편집 기술이 그것이다.

질병 저항성 유전자 편집의 가시적 결과는 이미 사람에게서 등장한 바 있다. 2018년 중국의 허젠쿠이 박사는 정교한 유전자 가위인 크리스퍼/캐스9(CRISPR/Cas9)을 이용해 HIV(에이즈의 원인 바이러스)에 저항성을 지니는 유전자 편집 아기가 태어났음을 보고했다. 보편적 생명윤리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이 시도는 당시에도 지금도 논란의 대상으로 남았지만, 질병 저항성 유전자 편집 기술 자체는 이후 인간이 아닌 가축을 대상으로 여전히 시도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돼지에게 치명적인 바이러스성 질환인 돼지생식기호흡기증후군(Porcine Reproductive and Respiratory Syndrome. 이하 PRRS)에 걸리지 않도록 유전자를 편집한 돼지가 등장한 일이다. PRRS는 이름처럼 돼지의 호흡기와 생식기에 감염되어 호흡곤란, 폐렴, 유산, 사산 등을 일으키는 바이러스성 질환이다.

바이러스는 숙주세포에 침투하기 위해 반드시 숙주세포의 수용체에 특이적으로 결합하는 스파이크 단백질을 가지기 마련이다. 숙주세포의 수용체가 잠긴 문에 달린 자물쇠라면, 바이러스의 스파이크 단백질은 이 자물쇠를 결합해 잠긴 문을 여는 열쇠와 같다. PRRS 바이러스는 돼지 세포에 존재하는 CD163 수용체에 결합한다.

흥미로운 건 CD163은 사람 세포에도 존재하지만, PRRS 바이러스는 사람 세포 속으로는 들어오지 못한다. 이 수용체를 구성하는 유전자의 염기서열이 사람과 돼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동일한 크기의 자물쇠지만, 열쇠 구멍 내부의 구조가 살짝 달라 바이러스가 지닌 열쇠로는 열지 못하는 것이다.

이에 착안한 연구진은 크리스퍼/캐스9 기술을 활용, 돼지의 CD163 유전자를 이루는 염기서열 중 일부를 제거하거나 다른 것으로 대치해 그 기능은 유지하되 PRRS 바이러스가 결합하지 못하는 유전자 편집 돼지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유전자 편집 돼지는 PRRS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성을 가질 뿐, 건강상 문제가 없고 인간에게도 해를 끼칠 가능성도 거의 없어 미국 식품의약국(FDA)에서는 지난해부터 PRRS 유전자 저항성 돼지의 상업적 이용을 공식적으로 허가한 바 있다.

PRRS 저항성 유전자 편집 돼지가 만들어지자, 조류 인플루엔자를 연구하던 과학자들도 이에 가세했다. 이들은 닭의 세포 속에서 바이러스가 유전물질 복제에 끌어다 쓰는 단백질을 찾아,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250여개 아미노산 중 딱 두 개만을 다른 것으로 치환, 단백질 자체의 기능은 유지하되 바이러스가 이용할 수 없는 상태로 변형시킨 것이다.

조류 인플루엔자 저항성 유전자 변형 닭의 개발은 아직 초기 단계이지만, 이 닭들은 조류 인플루엔자에 대해 90% 이상의 저항성을 보였고 건강상 별다른 이상이 없음이 알려져 향후가 기대되고 있다.

태초 이래 생명체는 수없이 많은 질병에 시달려왔고, 이는 인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인류는 질병을 숙명처럼 달고 사는 것을 거부하고, 이를 떨쳐내기 위해 할 수 있는 온갖 시도를 해왔다. 이제 그 노력은 방역과 백신, 치료제를 넘어 타고난 유전자를 편집해서 감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이를 후손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앞으로 인류가 질병에 대항하는 방식이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지, 그사이에서 우리는 해야 하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마땅히 지켜야 할 것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잡을 것인지 더 많은 고민과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은희 과학저술가

이은희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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