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는 말과 이야기를 ‘본다’ [이길보라의 경계에서 자란다]

한겨레 2026. 5. 6. 19:3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수어를 사용하는 필자의 농인 부모가 손주를 안고 얼굴 표정으로 대화하는 모습. 사진 다나카 겐

이길보라 | 영화감독·작가

아이를 둘러싼 언어는 모두 네가지다. 나의 모어인 한국수어와 한국어, 일본 국적 파트너가 사용하는 일본어, 그와 내가 소통할 때 사용하는 영어. 나는 아이가 우리의 언어를 모두 이해하고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일본어의 경우 일본에서 어린이집을 다닌다면 자연스럽게 습득할 수 있을 터였다. 영어는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노출하기로 했다. 한국어는 나와 아이에게는 삼촌이 되는 내 동생, 지인이나 미디어를 통해 습득할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한국수어였다. 아이에게 최대한 수어를 가르치고 나의 농인 부모를 만날 기회를 만들 테지만 함께 사는 것이 아니니 자연스럽게 농 문화에 노출되며 언어를 습득할 기회는 비교적 적을 것이었다. 아이가 자신의 조부모와 소통하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았다. 상상만 해도 괴로웠다.

나의 농인 부모는 뒤늦게 수어를 배웠다. 청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수어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채 자랐기 때문이다. 아빠는 농인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서야 선배들을 통해 수어를 배울 수 있었다. 엄마는 3년이나 늦게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른바 ‘귀머거리’와 ‘벙어리’는 학교에 다닐 수 없다고 모두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청인 가족들이 웃으며 텔레비전을 시청할 때 엄마는 멍하니 바라보아야만 했다. 뒤늦게 농학교에 입학한 엄마는 그제야 표정과 손을 움직여 말하는 법을 배웠다. 그러나 둘은 평생 부모나 형제자매들과는 소통할 수 없었다. 모두 수어를 배우지 않았거나 못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통역을 곧잘 하는 나이가 되고부터 부모를 대신해 물었다.

“엄마가 그러는데요. 자기가 청력을 어떻게 잃게 되었는지 설명해 달래요.”

“아빠가 묻는데요. 어렸을 때 집에 종종 오셨던 그분이 누군지 궁금하대요.”

수어와 음성언어의 세계를 오가며 몇십년간 단절되었던 부모와 그들의 원가족을 연결했다. 어린것이 정말 장하고 대견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몇마디에 그치고 마는 대화를 보며 생각했다. 가족들과 소통하지 못하며 살아가는 답답함과 아쉬움, 괴로움에 대하여. 다행히도 내게는 농인의 청인 자녀라는 정체성을 공유하는 동생이 있었다.

나는 동생과 그 누구보다 각별하다. 내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와 문화를 그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때문이다. 동생과 나는 부모에게서 한국수어를 배우고 청 사회로부터 한국어를 습득했다. 나는 여행과 유학을 통해 영어를 배웠고 동생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일하며 영어로 듣고 말하는 훈련을 했다. 그렇기에 동생은 나와 파트너와 어려움 없이 대화할 수 있고, 파트너가 나의 부모와 소통하거나 한국인들과 대화할 때 통역을 도맡는다. 한국수어-한국어-영어를 오가며 자유자재로 통역하고, 나처럼 어렸을 때부터 통역을 해왔기에 언어와 문화를 중재하는 능력과 기술을 가지고 있다.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 자란다는 것이, 언어와 언어 사이를 횡단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이며 어떤 감정을 수반하는지 알고 있다. 나의 아이가 그런 존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파트너에게 말했다.

그러던 중 엄마가 일본 집에 방문했다. 엄마는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어떤 언어로 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엄마는 의성어를 표현하는 그림책을 펼쳐 들고는 어깨를 들썩였다.

“손잡이를 이렇게 좌우로 돌릴 수 있는 꼭지에서 물이라고 하는 것이 콸콸콸, 위에서부터 아래로 힘차게 콸콸콸. 손으로 손잡이를 돌려 물이 나오는 세기를 사알짝 줄이면 졸졸졸. 물이 수도꼭지에서 졸졸졸. 혓바닥을 내밀며 더운 표정으로 귀를 쫑긋 앞뒤로 움직이는 강아지가 입을 벌리고 멍멍멍! 낯선 사람을 보면 놀란 표정으로 왈왈! 왈왈왈!”

아이는 눈을 떼지 않는다. 수어로 소통할 때는 손과 팔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화자의 두 눈을 보고 시야를 넓게 가져가면서 모든 움직임을 한번에 파악해야 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것처럼. 아기는 방긋방긋 웃으며 이야기를 ‘본다’.

얼굴 표정과 손으로 얼룩송아지 노래를 부르며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기를 위해 입으로도 목청 높여 발음하는 엄마를 보며 생각한다. 그가 내게 평생 간직하고 싶은 다채로운 자산을 물려주었다고. 그리고 그것은 나를 거쳐 이제 막 걸음마를 뗀 나의 작은 존재에게 향하고 있다고.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