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야식당의 마스터와 세리프 [크리틱]

한겨레 2026. 5. 6.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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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에 젖어 비에 젖은 줄도 모르는 손님이 식당에 들어선다.

한번은 독서 모임의 책에서 멤버 선우님이 활자체의 세리프에 관한 내용을 보고 말했다.

세리프는 획 끝에 돌출되어 나온 글자 구조다.

그런데 세리프와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나 미감, 격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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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명조와 세리프체, 오른쪽은 고딕과 산세리프체. 유지원 제공

유지원 | 타이포그래피 연구자·글문화연구소 소장

슬픔에 젖어 비에 젖은 줄도 모르는 손님이 식당에 들어선다. 그의 곁에는 단정하게 접힌 하얀 수건이 말없이 놓인다. 매실, 명란, 연어맛 오차즈케만을 각각 고집하던 세 여성 단골이 있었다. 그들의 우정이 잠시 깨졌을 때 이 식당의 마스터는 권한다. “다른 맛도 먹어봐요.” 그리고는 이런 ‘참견’에서 빼놓으면 안 될 한마디가 이어진다. “서비스로 줄게요.”

좋은 오지랖의 정석이다. 일본 드라마 ‘심야식당’에서는 마스터의 이런 마음과 손길이 이 식당의 공기와 요리를 만든다. 허름해도 이 마음이 스며들며, 손님들의 고단함도 어느덧 달래어진다. 신주쿠의 유흥가 뒷골목 밤 깊은 시각. 이곳에 찾아온 사연 많은 손님은 누구에게도 못했던 말을 마스터에게 슬며시 흘리고 만다. 이 말은 끈이 되어, 닿지 못하고 끊어져 있던 인연들이 이곳에서 다시 기막히게 연결되곤 한다.

오지랖은 나쁜 것이라고만 여긴다면, 우리가 적절하고 좋은 오지랖을 별로 경험해보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한번은 독서 모임의 책에서 멤버 선우님이 활자체의 세리프에 관한 내용을 보고 말했다. “세리프만큼의 오지랖을 실천하는 용기를 내겠어요.”

세리프는 획 끝에 돌출되어 나온 글자 구조다. 로마자에서는 세리프가 있으면 세리프체, 없으면 산세리프체라고 부른다. ‘상’(sans)은 프랑스어로 ‘없다’(without)는 뜻으로, 세리프가 있는 글자체가 역사의 오랜 기간 기본이었다. 한글에서는 세리프에 해당하는 부위의 명칭을 ‘부리’라고 한다. 명조체에는 부리가 있고, 고딕체에는 없다.

자주 사용하는 매체가 종이책인지 디지털 매체인지에 따라, 익숙한 텍스트의 성격에 따라, 세리프체가 적당할 때도 있고, 산세리프체가 맞을 때도 있다. 스타일은 세리프체 쪽이 대체로 고전적, 산세리프체 쪽이 모던하다. 그런데 세리프와 부리는 단순한 장식이나 미감, 격식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손의 움직임과 필기도구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일종의 말단 골격에 가깝다.

대개 세리프가 없으면 글자 하나하나가 또렷해 보여서, 아주 작은 글자나 저해상 환경, 정보 중심 표제에 유리하다. 세리프가 있으면 글자들 사이에 쫀득한 응집력이 생겨, 단어가 한덩어리로 잘 묶인다. 긴 글을 읽을 때 피로가 줄어들어서, 많은 글자를 오래 읽어야 하는 본문에 걸맞다. 글자들은 모여서 텍스트라는 ‘사회’를 이룬다. 개인들이 가정과 동네와 직장을 이루듯, 글자들은 단어와 문장, 문단을 이루며 텍스트 안에서 서로 결속된다.

세리프가 너무 짧으면 제 구실을 못 하고, 너무 길면 글자들이 서로 엉킨다. 좋은 오지랖은 딱 세리프만큼의 길이가 적당한 것 같다. 참견은 무조건 접어두라는 핀잔은, 서로 다가가야만 하는 사람들조차 때로 움츠리게 한다. 당신을 그냥 둘 수 없어서, 나와 무관하지 않다고, 용기를 내어 손을 내미는 것이 참견이다.

오지랖도 잘하려면 갈고닦아야 한다. 산세리프체보다는 세리프체가, 고딕체보다는 명조체가 만드는 데 손도 많이 가고 어렵다. 양쪽 다 필요하지만, 그래도 어려운 걸 굳이 만드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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