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사구시’ 네 글자로 영조를 감동시킨 덕촌 양득중


- 전라도 관찰사, 명성을 듣고 찾다
‘실사구시’ 네 글자로 영조를 감동시켰던 양득중(梁得中, 1665-1742)은 1665년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옛 영암군 영계리)에서 양우주와 죽산 안씨 사이에 태어난다. 본관은 제주, 자는 택부(擇夫), 호는 덕촌(德村)이다. 조광조의 시신을 거둔 기묘명현 양팽손의 6대손이며, 병자호란 의병장이었던 우산 안방준의 외증손이다.

어린 시절 양득중은 보통 아이가 아니었다.

당시 영광에 유배와 있던 이세필이 양득중의 집안 어른 양세남의 집을 왕래하면서, 어린 양득중이 쓴 성(性)과 음양(陰陽)에 대한 책문(策文)을 보고 감탄하고 편지를 써 학문을 권장한다. 이듬해에는 영계리에 있는 집까지 찾아와 가르침을 준다.

양득중은 후일 ‘소심재기’를 지어 가학(家學)의 중심 공간이 된 소심재의 의미를 남기고 있다.
“옛날에 나의 큰 아버지께서는 일찍이 당의 남쪽에 한 작은 집을 지어 거기에서 한가로이 거처하며 자제들을 가르쳤다. 말미암아 편액하기를 소심재라고 했으니, 관씨제자직(管氏弟子職)의 이른바 ‘소심익익’(小心翼翼)의 말에서 취했다. 나는 삼가 생각하기를 ‘소심’이라고 이른 것은 그 마음을 거둬들여 늠름히 스스로를 지켜 감히 방종치 않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양득중이 쓴 ‘소심재기’는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 있는 소심재 안에 판각돼 걸려 있다.
17살 무렵, 그는 영암 구림 마을에 살던 박태초를 스승으로 삼고 학문을 익힌다. 박태초는 6촌 형 박세채의 문인으로, 조정에서 공조좌랑 등의 벼슬을 내렸지만 나아가지 않았던 재야의 올곧은 학자였다. 양득중이 18살이던 1682년(숙종 8), 전라도 관찰사 신익상이 명성을 듣고 각 고을을 방문하는 길에 양득중을 찾았고, 관찰사직을 떠나면서 “명재 윤증과 현석 박세채를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고 권하는 편지를 보낸다. 후일 박세채는 양득중을 조정에 천거했고, 윤증은 1704년(숙종 30)부터 그의 스승이 된다.
양득중의 호 ‘덕촌’은 두 번째 스승 윤증과 관련이 있다. 양득중에게 38세가 되는 1702년(숙종 28)은 매우 중요한 삶의 전환기였다. 스승 박태초가 죽었고, 부인 반남 박씨와 사별했기 때문이다. 양득중은 이듬해인 1703년(숙종 29), 공주 덕촌에 사는 연안 이씨와 재혼한다. 그리고 1704년(숙종 30) 명재 윤증을 찾아뵙고 제자가 된다. 1705년(숙종 31)에는 아예 윤증이 강학을 펼친 노성서봉(魯城西峯)과 5리 정도 떨어져 있는 공주 덕촌(德村, 공주시 탄천면 덕지리)으로 이사까지 온다. ‘덕촌’은 윤증으로부터 말미암았다고 볼 수 있다.
- 영조의 최측근이 되다
양득중은 과거가 아닌 천거로 관직에 나아간다. 1694년(숙종 20) 좌의정 박세채와 영의정 남구만, 전라도 관찰사 시절 양득중을 만나 격려한 적이 있는 좌참찬 신익상 등이 천거한다.
이에 숙종은 그에게 효릉 참봉에 이어 사재감 주부, 공조 좌랑을 제수한다.
1723년(경종 3) 양득중은 정5품 사헌부 지평에 임명된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사헌부 지평은 장령과 함께 관리들의 감찰과 탄핵을 담당하는 사헌부의 핵심 요직으로, 문과 급제자 중 청렴 강직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옳다고 믿는 바를 직언할 수 있는 인물이어야 임명되는 직책이었다. 따라서 승문원, 성균관, 홍문관 등을 거친 젊고 기개가 있는 인재들이 임명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과거 급제자도 아닌, 추천으로 관직에 나온, 젊지도 않은 59세의 양득중이 사헌부에 입성하고 있다. 그의 학문과 인품 때문이었을 것이다.
양득중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날개를 단다. 그는 1722년(경종 2) 영조가 세자일 때 스승이었던 인연이 있었다. 왕이 된 이후에도 영조는 양득중을 늘 스승으로 존경하며 의지했다. 영조는 그를 1728년(영조 4) 사헌부의 핵심인 정4품 장령(掌令)에, 69세인 1733년(영조 9)에는 종3품 집의에 임명한다.
양득중이 추천으로 관직에 나와 사헌부 지평에 이어 장령, 집의에 오르자 많은 사람들이 일이 서툴다며 공격한다.
그가 장령 시절인 1929년(영조 5), 사헌부 지평 남위로는 “장령 양득중은 대간의 규례(規例, 일정한 규칙과 정해진 관례)에 익숙치 아니하고, 아룀에 임해 실수를 저질렀으니 다른 사람으로 바꿔야 한다”며 탄핵한다. 남위로는 당시 30대로, 양득중보다 30살 이상 차이가 나는 후배였다.
과거에 급제한 30대 중반 정통 관리의 눈에는 어쩌다 공무원이 된 60대 중반인 양득중의 일 처리가 규례에 어긋나고 굼뜨게 보였을 수 있다.
이에 영조는 “시골에서 올라왔으니, 소홀한 것이 무엇이 이상한가? 말세의 글만 그럴듯하게 꾸미는 문식(文飾)만이 판치는 날에 귀중하게 여길 것은 질박하고 성실한 일인 것이다. 그리고 유학에 깊은 신하를 대우하는데 어찌 격례(格例, 격에 맞는 방식의 관례)를 쓰겠는가?”라며 양득중을 두둔하며 지켜낸다. 60대 중반이지만, 시골에서 천거되어 올라와 격식은 다소 떨어지고 규례에 익숙하지 않지만, 산림인 양득중이 지닌 꾸미지 않은 수수함과 깊은 학식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그는 종부시 정과 사복시 정, 동부승지에 연이어 임명되면서 영조의 최측근이 된다.
- 영조를 감동시키다
천거로 관직에 나아간 양득중은 영조의 총애를 받는다. 과거 급제자 중 성적이 뛰어난 자들만이 가는 사헌부 장령과 집의에 연이어 임명됐고, 동부승지마저 제수받고 있다.
동부승지는 승정원의 6승지 중 공방(工坊, 공조) 업무를 담당하는 왕의 비서였다.
영조가 양득중을 총애한 것은 그의 뛰어난 학문과 꾸밈이 없고 소박한 성품 때문이었다. 1731년(영조 7) ‘실록’에, 한양에 올라 온 양득중이 영조를 만나 ‘서원의 폐단’을 이야기하자, 영조는 “그 말이 또한 ‘질박’하다”고 칭찬한다.
1937년(영조 13)의 ‘실록’에도 양득중의 ‘질박’(質樸)을 언급한 기록이 또 있다.
우의정 송인명이 “세자가 유학을 돈독히 숭상하도록 권면해야 한다”고 아뢰자, 영조는 “유학이 치도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만, 근래에는 한갓 천박하고 경솔한 문장만 숭상하고 있다. 양득중은 순박하고 진실하니 바로 유자(儒子)이니…”라며, 순박하고 진실한 양득중이 진짜 유학자라는 것이다.
영조는 양득중의 질박함을 좋아했다. 그러나 양득중이 영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던 이유는 또 있다.
‘실사구시’ 네 글자 때문이었다.
65살이던 1729년(영조 5), 종부시 정 시절 양득중은 영조를 만나 “근래에는 허위가 풍속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간왕 덕(德)은 한나라 때의 어진 공족(公族)이었는데, 그의 말에 ‘실사구시’(實事求是)라 했으므로 참으로 격언(格言)입니다” 하니, 임금이 승지에게 ‘실사구시’란 네 글자를 써서 들이라고 명한다.
‘허위’ 대신 ‘실사구시’로 학문 풍토를 개선해야 한다는 양득중의 주장에 영조는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실사구시’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벽에 걸었을 뿐만 아니라 부신(符信)으로 삼는다.
‘사실에 근거하여 옳음을 추구한다’는 의미를 품은 실사구시는 ‘후한서’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 나오는 “학문을 닦아 옛것을 좋아하며, 사실에 의거해 진리를 탐구한다(修學好古 實事求是)”에서 유래된 말이다. 즉 꾸며낸 거짓인 ‘허위’가 아닌 사실에 입각해 ‘진리’를 추구하겠다는 영조의 다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걸 깨우쳐 준 분이 양득중이었고, 양득중이 영조의 총애를 받았던 또 다른 연유였다.
양득중은 ‘실사구시’ 네 글자를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실사구시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마저 읽고 실천하라고 들이댄다.
양득중은 사망 1년 전인 1741년(영조 17), 영조에게 글을 올린다.

영조에 대한 마지막 조언은 호남 출신 유형원이 쓴 실학서 ‘반계수록’을 널리 읽히고, 실천하라는 당부였다.
그는 ‘반계수록’을 읽고 실천하라는 조언만 한 게 아니었다. 실제 그는 “백성이 흩어지면 나라도 흩어지고, 백성을 편히 하면 나라가 편하다”면서 ‘세제 개혁안’을 올렸고, 임금을 대면해서는 서원의 폐단을 지적하고 학교의 건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이런 양득중을 실학 연구의 대가인 박석무는 ‘18세기의 조선 실학의 큰 선구자’, ‘실사구시의 실천가’로 평가했다.

오늘 양득중은 고향인 해남군 옥천면 영신리에서 만날 수 있다. 영신리에는 그의 영정을 모신 사당 ‘덕촌영당’이 있다. 그리고 그의 시가와 산문 등을 엮어 1806년 간행된 ‘덕촌집’(德村集)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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