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한 걸음 다가섰음에도 민중의 한 외면한 자의 절망[심광도의 영화 속 클래식]

심광도 음악평론가 2026. 5. 6. 16:50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혈의 누>(2005)
조선시대 외딴섬 연쇄 살인
진실 쫓는 수사 마주한 비극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영화 스산한 분위기 배가 해
영화포스터.

야심한 밤, 한 여인이 절벽 아래 바다로 떨어져 천천히 가라앉는다. 이미 치명상을 입은 채이다. 무슨 사연일까?

조선 말기의 외딴섬 동화도, 닥나무가 좋아 제지업으로 제법 살림이 나은 섬이다. 그러던 어느 날, 조정으로 진상하는 종이를 실은 배에 불이 인다. 나라님께 보낼 물건이 상했으니 제법 중대한 사안이라 사고 경위를 조사하기 위해 차사와 그의 부하 관리(이원규)가 파견된다.

그런데 어쩐 인인가? 그날 이후 살인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방법 또한 몹시도 잔인하여 몸이 꿰뚫리고, 끓는 물에 담겨 죽임을 당한다.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는 이원규, 명민한 그는 사건을 조사하던 가운데 이러한 살해 방법이 강 객사의 죽음과 관계가 있음을 알게 된다. 강 객사는 과거 제지 공장을 소유했던 이로, 천주쟁이라는 누명을 쓴 채 다섯 가족 모두 죽임을 당했고, 가족들이 받았던 형벌의 모습 그대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있으며 피해자는 모두 이러한 억울한 죽음을 몰고 온 밀고자인 것이다. 하니 세 번의 살인이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 막아보려 애쓰지만, 결국 네 번째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마지막 희생자가 남았다.
영화 한 장면. /갈무리

참사를 피하자면 마지막 밀고자가 누구인지 알아내야 하지만 웬일이지 마을 사람 모두가 입을 조심한 채 이 모든 게 강 객주의 저주라며 두려움에 떨 뿐이다. 정황으로 보아 원한에 의한 살인이 분명하지만, 도대체 누가, 왜, 그리고 어떻게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일까? 사건이 일어나기 3일 전 사라진 선원, 그가 사라지고 사건이 시작되었으니 그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정말 강 객주의 원혼이 복수라도 시작한 것일까? 하지,만 왜 7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야심하여 시리도록 푸른 밤, 한 여인이 무언가를 소중히 안은 채 남정네들에게 쫓기고 있다. 보아하니 영화의 첫 장면, 바다로 던져졌던 그 여인이다. 그런 그들의 뒤를 한 남자가 비켜 따른다. 어떻게 해서든 저 여인을 구해야 한다는 절박한 발걸음이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을 지배하며 따라 쫓는 음산하고도 서러운 선율이 있다. 바로 러시아의 작곡가 라흐마니노프(Rachmaninov, 1873~1943)의 피아노 협주곡 2번, 그중 1악장이다.

모스크바 음악원을 졸업하고 5년, 착실히 경력을 쌓던 라흐마니노프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해 줄 작품이 필요했다. 하여 25세의 젊은 음악가는 자신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교향곡 1번을 완성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하였으니, 1897년 3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의 초연이 혹평 가운데 재앙 수준의 실패를 맞은 것이다. 회심의 역작이 되어 작곡가로서의 길을 활짝 열어줄 것을 기대했지만 흑역사로 남자 절망한 젊은 작곡가는 실망을 넘어 신경쇠약의 지경에 이르렀고, 칩거에 들어갔다. 모든 음악 활동을 접은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작곡에는 그랬으며, 내 안에서 무언가 부러져 버렸다며, 뿌리 깊은 무력감이 자신을 지배한다고 한탄했다. 여기에 더해 또 하나의 잔인한 시련이 찾아왔다. 사촌이자 음악적 동료였던 나탈리아 사티나와의 사랑이 그녀 부모의 반대로 무산된 것이었다. 라흐마니노프는 이 시기, 사랑과 경력 모두에서 실패자가 되었다.
영화 한 장면. /갈무리

그렇게 3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이대론 안 되겠다 싶었는지 수소문 끝, 정신과 의사인 니콜라이 달 박사를 찾아갔고 그렇게 처방이 내려져 최면요법 치료를 시작했다. 당신은 새로운 협주곡을 쓸 것이며 큰 성공을 거둘 것이라는 자기 암시. 이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 싶음에도 3개월의 꾸준한 암시에 라흐마니노프는 자신감을 찾았고 새로운 작품에 몰입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01년 11월, 드디어 세상에 걸작을 내어 보이니 바로 영화에 등장한 피아노협주곡 2번(Piano Concertos No. 2c minor)인 것으로, 초연은 이전과는 달리 성공적이었다. 그리고 러시아를 대표하는 음악가에게 주는 '글린카 상'까지 수상, 작곡가로서의 재기에 성공하였을 뿐 아니라, 그의 대표작이 되었다. 음악 분석가들은 "음악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치유하고 재탄생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는다. 이 작품은 당연하게도 이를 도운 달 박사에게 헌정되었다.

1악장이 시작되면 피아노의 낮은음들이 화음이 되어 무겁게 울려온다. 일명 '크렘린의 종소리'다. 점차 그 울림이 커오는 것은 마치 어두운 심정적 고뇌가 서서히 자아 깊숙이 침잠해 오는 것만 같아 불길하다. 그러다 이윽고 현악기들이 슬픔의 파도를 탄다. 이 역시 저음군의 활약이다. 사뭇 느껴지는 러시아적 스산함이 작곡가의 본령이 어디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이러한 불안한 일렁임의 선율이 바로 영화의 장면에 쓰인 악상으로, 영화의 스산한 분위기를 배가하는 역할을 하니 절묘한 선곡이다.
영화 한 장면. /갈무리
이원규를 보며 셜록이 떠올랐고, 범인은 보며 그의 맞수인 모리아티가 그려졌다. 사건을 조사해 진실로 다가가는 모습이 실로 천재적이지만 범인 역시 만만치 않은 것이다. 영화의 초반 이미 그들은 같은 상을 두고 마주 앉았었다. 그러다 나온 이원규의 아버지 이야기에 범인은 어떤 분이었느냐 물었고 이에 원규는 이렇게 답한다. 엄하신 분이셨고 가끔 문제를 내어 답을 찾아도 타박, 못 맞추면 면박을 주곤 하셨기에 도망 다니기 일쑤였다고 말이다. 그러자 범인은 자신에게도 그 문제를 내어보라 말한다. 지주가 소작농에게 평년 몇 섬이 나면 몇 할을 가져가니 흉년이 들어 생산량이 30%로 줄면 몇 섬을 가져가게 되냐는 문제. 복잡한 수학 문제임에도 범인이 거침없이, 그것도 암산으로 풀어버리자, 그 수는 맞지만 아버지가 원하는 답은 그게 아니었다고 한다. 답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가 원하는 답은 한 섬도 받지 않는 것이었다. 흉년이 들었으니 자비를 베풀라는 것이다. '민심은 위험한 것이니 과불급이 없어야 한다. 만일 때를 놓친다면 칼로도 다스리지 못할 것이야.' 하지만 충격적이게도 이원규의 아버지는 자식에게 이러한 가르침을 주면서도 섬에서 벌어진 추악한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실을 안 이원규는 얼마나 아연하였을까? 마지막 살인의 장소에 도착한 이원규는 범인을 향해 이렇게 약속했다. 내 모든 것을 알았으니, 뭍으로 나가 진상을 규명하고 억울하게 죽은 이의 누명을 벗기겠노라고. 그러나, 돌아오는 뱃길, 이를 증명해 줄 증거를 바다에 놓친, 아니 놓아 버린다. 아버지 탓에 앞으로 놓일 자신의 험난한 길을 감당할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자신들을 거두어 준 은인이 누명을 쓴 채 죽어 감에도 눈을 감았던 섬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 슬픔과 절망으로 가슴이 에이는 이 순간, 다시 한번 라흐마니노프의 선율이 들려온다. '절망가'라는 제목을 달았다.

/심광도 음악평론가

☞필자 소개 (영화와 음악을 사랑하는 이들의 편안한 쉼터, 뮤직파라디소를 지키는 뮤파지기입니다. 문화가 물질을 이기는 세상을 꿈꿉니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 보조금을 지원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