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골목에 걸린 건 그림이 아니었다”… 《이웃집 드로잉》, 서로의 체온이 한 공간에 머문 이틀
9~10일 제주시 ‘무장’… 설명보다 먼저 움직인 손과 감각

그림 앞에 멈춘 사람들, 전 부치는 냄새 곁에 남은 대화들. 예술은 다시 생활 안으로 걸어 들어옵니다.
전시장인데, 분명 ‘예술’이라 들었는데 안에서는 자꾸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그림을 보러 들어갔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들 사이를 보게 됩니다.
벽 앞에 가만히 서 있는 누군가의 등, 종이 위 선을 따라가다 갑자기 터지는 웃음소리.
전 부치는 냄새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관객의 발걸음 같은 것들이 오감을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작품은 분명 벽에 걸려 있는데, 기억은 자꾸 다른 곳에 남습니다.
누가 어떤 얼굴로 말을 걸었는지. 왜 처음 보는 사람 옆에 이상하게 오래 서 있게 됐는지.
왜 그 공간에서는 아무도 자기 감각을 급하게 증명하려 들지 않았는지.
되돌아보면 끝내 남는 건 그림보다 그 주변을 떠돌던 사람들의 기척입니다.
9일부터 10일까지 제주시 무근성길 공간 ‘무장’에서 열리는 《이웃집 드로잉》은 바로 그런 촘촘한 밀도 위에서 시작됩니다.
공모도, 심사도, 제도권 큐레이팅도 거치지 않았습니다.
작가들이 서로를 추천했고, 작업실을 오가며 이미 오래 봐온 시간이 고스란히 전시의 뼈대가 됐습니다.
그곳에는 흔한 단체전의 긴장감이 거의 없습니다.
대신 아주 희미하지만 분명한 신뢰가 먼저 흐릅니다.
“나는 저 사람 작업이 어떻게 흔들리는지 안다”는 감각입니다.
■ 가장 먼저 걸려 있는 건 그림이 아니라 ‘머문 시간’
《이웃집 드로잉》 안의 작업들은 대체로 다 끝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떤 선은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남겨져 있고, 어떤 사진은 하루의 균열 같은 장면을 붙든 채 멈춰 있습니다.
누군가는 메모처럼 짧은 흔적을, 또 다른 누군가는 퍼포먼스가 지나간 자리의 공기까지 함께 남겨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드로잉은 기술이 아닙니다.
오히려 감각이 아직 설명되기 전 상태에 더 가까운 움직임입니다.
몸이 먼저 반응하고, 손이 먼저 움직이고, 이유는 한참 뒤에 따라오는 순간들입니다.
전시장 안을 걷다 보면 자꾸 완성된 결과보다 그 직전의 떨림을 마주하게 됩니다.
벽에 걸린 작업들은 서로를 밀어내지 않습니다.
자기 목소리를 크게 키우기보다, 옆 작업의 공기를 조금 받아들인 채 놓여 있습니다.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져 있지도 않은 상태. 서로의 숨이 희미하게 섞이는 정도의 거리 안에서 작품들은 천천히 자기 리듬을 만듭니다.
전시가 붙들고 있는 것도 그런 ‘불가근불가원’의 거리감입니다.
혼자 완결되기보다, 서로의 근처에서 조금씩 흔들리고 바뀌는 감각입니다.
■ 누군가는 그림을 사고, 누군가는 전을 뒤집는다
전시를 기획한 ‘윗집 아랫집’의 김승민·박주애·장예린 작가는 “이웃집을 드나들 듯 작업실을 왕래하던 인연이 하나의 전시가 됐다”고 설명합니다.
실제로 그곳에서는 예술과 생활의 경계가 자꾸 흐려집니다.
모든 드로잉은 현장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습니다.
분위기는 흔한 아트페어와 다릅니다. 가격에 앞서 대화가 오가고, 거래보다 먼저 식탁이 펼쳐집니다.
관객과 작가들은 함께 봄나물전을 나눠 먹습니다.
누군가와 그림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동네 골목 이야기를 꺼내고, 누군가 전 한 장 앞에 두고 처음 보는 사람과 한참 웃습니다.
그 순간 전시는 더 이상 벽 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감각은 사람들 사이를 천천히 옮겨 다닙니다.
최근 동시대 미술은 더 빠른 이미지와 더 강한 개념을 끊임없이 요구받아 왔습니다.
그런 속도 안에서 오히려 희미해진 것도 있습니다.
오래 머무는 감각입니다.
《이웃집 드로잉》은 정확히 그 반대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빠르게 지나가는 이미지 대신, 사람들 안에 천천히 스며드는 시간을 붙잡아 둡니다.
■ 젊은 작가들, 서로의 생존 감각을 이어 붙이다
전시에 참여하는 고은혜, 김성은, 김소라, 김승민, 김승환, 김준석, 박주애, 박상보, 박현준, 이유진, 이현태, 이태민, 장예린, 장숙경, 정재훈, 조은비, 찬 팅, 현은주는 사용하는 언어도, 작업 방식도 모두 다릅니다.
거의 지워질 듯한 선으로 버티는가 하면, 이미지의 밀도로 밀고 들어옵니다.
어떤 작업은 침묵으로 놓이고 또 다른 작업은 공간의 호흡 자체를 흔듭니다.
전시 안에서는 그 차이들이 충돌보다 리듬으로 어우러집니다.
서로의 시간을 이미 오래 통과해본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웃집 드로잉》은 결과물을 내보이는 자리가 아니라, 제주라는 생활권 안에서 겨우 버텨온 감각들이 서로의 존재를 다시 확인하는 시간으로 맞물립니다.
전시 기간은 이틀. 이후 벽에 걸린 그림들도 다시 각자의 작업실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어떤 공기들은 쉽게 빠져나가지 않습니다. 아니, 그러지 못합니다.
그림보다 체온이 먼저 기억되는 순간, 작품 설명보다 망설이는 손끝이 오래 남는 장면들입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공간인데도 이상하게 오래 머물렀던 사람들의 기척입니다.
《이웃집 드로잉》은 결국 그림을 전시한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사이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가까움의 감각을, 제주 원도심 한복판에 잠시 현실로 꺼내 놓은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전시는 9일부터 10일까지 이틀간 제주시 무근성길 7길 3 ‘무장’에서 무료로 진행됩니다. 관람 시간은 오전 11시부터 오후 5시까지입니다.
기획은 지역 기반 프로젝트 그룹 ‘윗집 아랫집’의 김승민·박주애·장예린 작가가 맡았습니다
이들은 작업실과 생활 공간을 오가며 형성된 지역 작가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제도 중심 전시 문법보다 생활 안의 감각과 관계를 더 오래 들여다보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습니다.
회화와 드로잉을 비롯해 사진, 퍼포먼스, 아카이빙 등 서로 다른 매체를 다뤄온 20명의 작가가 전시에 함께 이름을 올렸습니다.
마음에 오래 남은 드로잉은 그 자리에서 곧바로 자신의 일상으로 가져갈 수 있습니다.
전시 기간 작가와 관객이 함께 봄나물전을 나누는 시간도 이어집니다. 그림 앞에서 시작된 대화는 식탁 근처까지 자연스럽게 번져갑니다.
그래서 《이웃집 드로잉》은 작품을 감상하고 돌아서는 전시라기보다, 서로의 감각 곁에 잠시 머물다 나오게 되는 시간으로 오래 남습니다.
JIBS 제주방송 김지훈(jhkim@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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