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을 묶고 사람을 이어 함께 당기다 [경남 무형유산을 찾아서]

류민기 기자 2026. 5. 6.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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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의령큰줄땡기기
공동체가 함께하는 전통 의례·놀이
기네스북 등재 천하제일 규모 자랑
인근 지역 합류하는 등 대동의 장
내년 연행…전승·전수관 건립 과제
경상남도 무형유산 '의령큰줄땡기기' 연행 모습. /의령군

교과서와 여행안내서, 미디어를 통해 자주 보게 되는 국가유산은 이미 상식처럼 익숙하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지역으로 시선을 돌리면 상황은 달라진다. 경상남도에만 모두 41건의 무형유산이 지정돼 있다. 하지만 이름과 내용, 그것을 지켜온 사람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는 이는 많지 않다. 지역 유산을 조명하려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고, 그때마다 '기록의 필요성'과 '계승의 위기'가 이야기됐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관심은 쉽게 흩어진다. 이 기획은 단순히 지역 유산을 나열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지역의 시간과 감각 그리고 그것을 오늘까지 이어온 사람들의 현재를 차분히 따라가며 응원과 격려를 보내는 일이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난달 한 초등학교 담벼락 사진이 누리소통망(SNS)에 올라왔다. 운동회를 앞두고 담벼락을 따라 이어 붙인 학생들의 '소음 양해문'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로 적힌 안내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4월 29일부터 30일까지 체육대회를 합니다. 소음이 날 수 있습니다. 불편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그러면 저희가 더 빛납니다."

운동회는 1980~90년대를 거치며 당시 국민학교의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펄럭이는 만국기, 떠들썩한 마이크 소리,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줄다리기를 비롯해 계주와 박 터트리기를 하던 풍경은 이제 '초품아'(초등학교 인접 아파트)가 늘고 '운동회 소리가 시끄럽다'는 민원이 이어지면서 사라지고 있다.

이에 대해 최교진 교육부 장관은 SNS를 통해 "전교생이 모여 함성을 지르는 운동회 속에서 아이들은 '함께'라는 가치와 '성장'의 의미를 배운다"며 "아이들의 활기찬 함성이 멈춘 사회에는 미래가 없다"고 밝혔다.

운동회는 단순한 행사를 넘어 '함께'의 가치를 배우는 장이다. 이 가치는 비단 초등학생들만의 배움이 아니다. 오랜 기간 우리 공동체가 줄을 당기며 나눠온 것이기도 하다.
경상남도 무형유산 '의령큰줄땡기기' 연행 모습. /의령군

함께하는 줄다리기

우리 선조들은 줄다리기로 결속을 다졌다. 경상남도 무형유산 '의령큰줄땡기기'도 공동체가 함께하는 전통 의례와 놀이로, 그 규모에서 천하제일을 자랑한다.

2005년 4월 의령천 둔치 특별 행사장. 길이 251m, 무게 54.5t에 이르는 의령큰줄을 두고 백호군과 청룡군이 맞섰다. 의령군민 등 1만 5000명이 참여했다. 군민들은 직경 12㎝, 길이 100m의 줄 700개를 엮어 말아 큰 줄을 만들었다. 13개 읍면 232개 마을에서 1400동의 볏짚이 동원됐다. 약 2만 명의 관람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령의 구호에 맞춰 백호군과 청룡군이 줄을 당겼다.

"영차! 영차! 영차!"

이날 연행된 의령큰줄땡기기에 사용된 줄은 그해 9월 기네스북에 등재됐다. 그전까지 세계 최고 기록은 일본 오키나와현 나하시에서 당겼던 길이 186m, 무게 40t의 줄이었다. 이 기록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함께' 세운 기록으로서 군의 자랑거리이자 군민의 자부심이다.
의령 한 마을에서 삼가배줄을 만들고 있다. /의령군
2023년 4월 12일 의령문화원 앞에서 의령큰줄땡기기보존회 회원과 공무원 등 약 200명이 참여해 줄고 만들기를 하고 있다. /의령군

진주·합천·산청, 함안·창녕·창원 등 인근 지역까지 합류

의령큰줄 제작은 볏짚을 모으는 일에서 시작된다. 현재는 짚을 구입하지만 과거에는 마을별로 몫을 나누고 농가마다 형편에 맞춰 내놓았다. 농사 규모가 클수록 많이 냈으며, 영세하면 몇 단이라도 내 성의를 보였다. 부족한 몫은 줄을 만드는 일손으로 메웠다.

마을마다 짚이 모이면 한 움큼 잡아 새끼줄로 묶어서 작수발에 건다. 이때 최소 6명이 필요하다. 3명은 짚을 나눠 잡고 꼬아나가고, 2명은 짚을 공급하며, 1명은 꼬아진 줄을 잡아당긴다. 이렇게 만든 줄이 삼가배줄(가닥줄)이다. 삼가배줄 3개를 다시 꼬면 구가배줄(벗줄)이 된다.

의령큰줄을 만드는 날이면 읍면 창고마다 보관돼 있던 줄을 읍내로 옮긴다. 줄이 모이면 큰 줄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는데, 줄을 펴는 날기를 시작으로 엮기-말기-곱치기-줄고 만들기-벗줄 달기-꼬리줄 만들기 순으로 진행된다. 암줄과 수줄을 결합할 비녀목까지 장만하면 준비가 끝나며, 줄다리기 연행까지 포함해 한 달 정도가 소요된다.

눈길을 끄는 점은 의령군민만의 축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의령큰줄땡기기는 의령군청에서 남산으로 향하는 충익로를 기준으로 백호군(서군)과 청룡군(동군)으로 나뉜다. 의령천을 두고 보면 백호군은 물 위편, 청룡군은 물 아래편이 되는데, 과거에는 이 같은 가름이 진주·합천·산청과 함안·창녕·창원 등 인근 지역 참여로 확대됐다. 현재는 의령홍의장군축제 부대 행사로 연행될 때 관람객들이 어우러지면서 전 지역이 하나로 엮이는 축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달 16일부터 19일까지 의령군민공원에서 '제51회 의령홍의장군축제'가 열린 가운데 의령큰줄땡기기보존회 회원 등이 줄다리기를 시연하고 있다. /류민기 기자
지난달 16일부터 19일까지 의령군민공원에서 '제51회 의령홍의장군축제'가 열린 가운데 의령큰줄땡기기보존회 회원 등이 줄다리기를 시연하고 있다. /류민기 기자

차별적 질서 잊게 하는 등 대동의 장 구현

전통적으로 줄다리기는 한반도 중남부에서 전승되는 놀이다. 언제부터 시작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농경 문화, 특히 벼농사와 밀접한 점으로 미뤄볼 때 고대부터 이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령큰줄땡기기도 기록이 부재한 탓에 유래를 파악하기 어렵다.

의령큰줄땡기기를 비롯한 줄다리기는 음력 정월 대보름의 세시풍속으로, 새해맞이 축제의 성격을 지니면서 기풍(음력 정월에서 2월에 걸쳐 그해의 농작이 풍년이 들기를 바라며 하던 행사)과 점풍(점을 치는 일과 풍수 보는 일을 아울러 이르는 말)의 성격이 강하다.

의령큰줄땡기기는 쌍줄다리기로서 암줄과 수줄의 결합을 통해 음양의 조화를 이루고 공동체의 소망을 담아낸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참여자들이 줄을 끊어 특정한 장소에 걸어놓거나 삶은 물을 마신다. 득남을 비롯해 질병 치료, 가정 평안 등 효험이 있다고 믿어서이다. 비녀목을 감싼 광목으로 속옷을 만들어 입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해 뜯어가기도 한다.

이 같은 줄다리기는 현실의 차별적 질서를 잠시 내려놓게 하며 대동의 장을 구현했다. 의령에서도 대장에 해당하는 모가비(현 두령)를 뽑아 그의 지도에 따라 일을 처리했다. "영차! 영차! 영차!" 줄을 당길 때만큼은 남녀노소, 빈부 격차, 지위의 고하가 작용하지 않았다. 줄을 당기는 사람으로서 동질감, '함께'라는 연대 의식만이 존재했다.
쌍줄다리기 줄. /류민기 기자
의령큰줄땡기기 줄. /의령군

내년 의령홍의장군축제서 한마당

의령큰줄땡기기는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중단되기도 했지만 1957년 재개돼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1975년부터는 의병제전(현 의령홍의장군축제) 부대 행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달 16일부터 19일까지 의령군민공원에서 개최된 '제51회 의령홍의장군축제'에서 의령큰줄땡기기를 약식으로 선보였다. 지금은 3년마다 행사가 열리는데, 원래는 올해 연행할 예정이었지만 지난해 겪은 수해 복구 여건을 고려해 내년으로 연기됐다. 의령군은 모든 마을이 참여해야 하고 비용 부담이 큰 행사 특성상 추진이 쉽지 않다고 판단했다.

보존회 회원들은 기네스북 등재와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공동 등재, 줄다리기라는 표준어를 쓰지 않고 방언을 고수하는 이유 등을 이야기하며 자부심을 드러내면서도 지역사회 초고령화, 보존회원들의 고령화와 전승 문제 등을 언급하며 복잡한 속내를 내비쳤다.

정형규 의령큰줄땡기기보존회 회장은 전수관 건립 필요성을 강조했다. 정 보존회장은 "전수관이 만들어지면 보존회원들이 의령큰줄땡기기를 시연하고, 관람객들도 직접 체험하며 '함께'의 힘을 느껴볼 수 있다"며 "이를 후세대에 전승하고 관광 자원화해 지역경제 활성화로도 이어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류민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