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브리저튼? 왕자의 거실에서 즐기는 프랑스 미식

아르떼 2026. 5. 6.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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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김인애의 Art de Vivre
왕자의 거실로의 초대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르 클라랑스
공간과 환대, 음식과 와인이 어우러지는
하나의 작품이 된 프랑스 미식의 정수

넷플릭스 드라마 ‘브리저튼’의 귀족 저택이 파리 한복판에 실재한다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것이다. 샹젤리제 일대에는 파리 럭셔리 쇼핑의 중심축인 ‘골든 트라이앵글’ 구역이 있다. 이 황금 상권 한복판에 위치한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 르 클라랑스(Le Clarence). 마차가 드나들던 높다란 입구를 지나 계단을 오르면, 2026년의 파리는 잠시 사라지고 19세기의 저택이 눈앞에 펼쳐진다. 이곳이 여느 파리 고급 레스토랑과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 룩셈부르크 왕자 가문이 지금도 주인으로서 관여하고 있는, 살아 있는 파리 저택이라는 것이다.

르 클라랑스는 19세기에 지어진 오텔 파르티퀼리에(hôtel particulier) 안에 있다. 프랑스어로 '개인 저택'을 뜻하는 이 건축 형식은, 파리의 귀족 가문이 도시 한복판에 지어 통째로 거주하던 단독 저택을 말한다. 시골의 샤토가 가문의 영지였다면, 오텔 파르티퀼리에는 가문의 파리 거처였다. 오늘날 파리에 남아 있는 오텔 파르티퀼리에들은 대부분 박물관이 되거나 럭셔리 브랜드의 쇼룸, 대사관으로 쓰인다. 한 가문이 여전히 주인으로서 관여하며 손님을 맞이하는 경우는 드물다. 르 클라랑스는 그 드문 경우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살롱과 다이닝룸이 이어진다. 서재처럼 책장이 둘러싼 방과 장작 벽난로가 실제로 타오르는 방. 파리의 일반 아파트에서는 벽난로가 있어도 사용 허가를 받기 어렵다. 장작불의 따스한 온기와 잿더미에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매캐한 냄새가 사람이 사는 집처럼 공간에 생기를 더한다. 이 저택에서는 벽지의 무늬부터 꽃의 색, 식탁 위 접시 한 점까지가 한 사람의 손을 거친다.

저택의 주인은 로버트 룩셈부르크 왕자(Robert of Luxembourg)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도멘 클라랑스 딜롱(Domaine Clarence Dillon)은 보르도 5대 샤토 중 하나인 샤토 오브리옹(Château Haut-Brion)을 보유한 가족 기업이다. LVMH나 케링 같은 럭셔리 그룹과 달리 외부 주주 없이 4대째 가문이 운영해왔다.

시작은 1935년, 미국인 금융가 클라랑스 딜롱이 보르도의 샤토 오브리옹을 매입하면서였다. 프랑스를 사랑한 미식가였던 클라랑스는 르 꼬르동 블루에서 직접 요리를 배웠다. 그의 아들 더글라스 딜런은 주프랑스 미국 대사를 지내고 1970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이사장으로 선출돼 아시안 아트 컬렉션 확장을 주도했다. 미국에서 조각을 공부하고 시나리오 작가로도 일했던 로버트 왕자는 할리우드의 꿈을 접고 가문으로 돌아와 회장직을 승계했다. 미국과 프랑스, 와인과 예술의 연결고리는 그렇게 4대를 이어왔다.

이 가문이 4대에 걸쳐 이어온 한 가지 표어가 있다. 프랑스의 Art de Vivre. 직역하면 '삶의 기술'이지만, 실제로는 식사와 대화, 옷차림 같은 일상의 행위를 예술의 수준으로 가꾸는 태도에 가깝다. 즐기되 품위를 잃지 않고, 절제하되 쾌락을 포기하지 않는 것.

이 공간의 미감을 만든 사람은 바로 로버트 왕자다. 그는 3년에 걸친 저택 리노베이션 동안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두지 않았다. 그림과 태피스트리, 가구와 조각, 샹들리에까지 모든 디테일을 직접 골랐다. 가스트로노미와 와인 역사에 관한 5천여 점의 북 컬렉션을 모아온 수집가의 안목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6세기의 이집트 사본. 프랑스 오뜨 퀴진의 원형을 만든 19세기 셰프 앙토냉 카렘이 직접 서명한 두 권의 책도 그 옆에 놓여 있다. 모든 방의 미술품과 벽지, 커튼을 한 사람이 고르기에 공간 전체에 같은 감각이 흐른다.

어린 시절 로버트 왕자는 여름마다 샤토 오브리옹에서 지냈다. 어머니 조앤 딜런이 보르도의 샤토를 따뜻한 거처로 꾸미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그때 어깨 너머로 익힌 감각이 수십 년 뒤, 이 파리 저택의 결을 만들었다. 저택의 안주인인 왕자비가 다이닝룸의 꽃 색깔을 공간의 밸런스를 고려해 좀 더 차분한 색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다는 이야기를 한 직원이 웃으며 알려주었다. 우아함에는 절제가 수반된다는 것을, 꽃 색깔 하나로 보여준다.

응접실인 그랑 살롱의 창 너머로는 그랑 팔레가 보인다. 도멘 클라랑스 딜롱은 그랑 팔레의 복원을 후원해왔고, 그 공로로 지금 창 너머로 보이는 그랑 팔레의 한 부분에는 이 가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메세나란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일회성 후원이 아니라, 길 건너에 자리 잡고 대를 이어 같은 풍경을 함께 가꾸는 일 말이다.

그랑 살롱의 소파에 앉자, 웰컴 샴페인이 먼저 왔다. 동-그레예(Dhondt-Grellet)의 'Les Terres Fines' 프리미에 크뤼 블랑 드 블랑. 오크에서 숙성된 샤르도네의 깊이가 우아한 기포를 따라 올라온다. 아뮤즈 부쉬와 함께 클라랑스 딜롱 가문과 이 저택을 만들어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시간이 잠시 비켜선 것 같았다. 이대로 언제까지고 앉아 있어도 좋겠다 싶었다.

다이닝룸으로 자리를 옮긴 뒤 페어링으로 나온 화이트 와인은 라 클라르테 드 오브리옹(La Clarté de Haut-Brion) 2020. 같은 가문의 와인이 같은 저택의 식탁에 오른다. 새 소믈리에 시릴 보사르(Cyril Bossard)가 짠 와인 리스트는 보르도와 부르고뉴, 샴페인의 고전적 골격 위에 의외의 내추럴 와인까지 나란히 놓는다. 오브리옹의 모든 빈티지를 보유한 셀러답게 1989, 1961 같은 전설의 해에 닿지만, 자크 셀로스 로제 샴페인을 잔으로 내고 도멘 라베와 갸느바 같은 내추럴 와인도 리스트에 올린다. 전통에 깊이 닿아 있되 거기에만 얽매이지 않는다.

▶▶▶[관련 인터뷰] "오브리옹의 모든 빈티지가 살아 있는 식탁"...르 클라랑스가 특별한 이유


주방을 맡은 새 셰프 안드레아 카파소(Andrea Capasso)는 이탈리아 출신이다. 이 주방에서 6년을 보낸 뒤 올해 이그제큐티브 셰프 자리에 올랐다. 카리스마로 르 클라랑스의 색을 만들어온 전임 셰프 크리스토프 펠레(Christophe Pelé)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다. 그의 사임이 공식화되기도 전에 미슐랭 2스타 셰프들의 지원서까지 도착했지만, 그룹은 내부 승진을 택했다. 카파소의 취임 1년이 채 되지 않아 발표된 2026 미슐랭 가이드에서 르 클라랑스는 2스타를 지켜냈다. 르 클라랑스라는 공간이 클래식하되 올드하지 않은 것처럼, 카파소의 요리 역시 클래식하되 무게중심을 지키면서 무겁지 않다. 지금의 요리는 아직 펠레의 스타일이 연장된 단계에 있다. 카파소가 앞으로 어떻게 자기 색깔을 찾아갈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다이닝룸을 안내한 홀 디렉터 샤를 웨일랑(Charles Weyland)은 이 경험을 "격식이 아니라 손님 한 명 한 명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셰프 카파소, 소믈리에 보사르, 디렉터 웨일랑. 르 클라랑스의 새 장(章)을 쓰는 세 사람은 모두 젊다. 응대는 격식을 유지하되 다정하고 유쾌했다. 손님이 저택의 아우라에 눌려 식사를 즐기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전통의 무게를 짊어지되 그 무게에 눌리지 않는 것. 이 저택에서의 경험이 경쾌한 이유다.

오페라가 종합 예술이라면 다이닝 역시 종합 예술이다. 음악과 무대와 조명과 의상이 한 호흡으로 이어질 때 오페라가 완성되듯, 다이닝에서는 공간과 환대, 음식과 와인이 어우러진다. 이 종합을 한 가문의 미감 아래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해낸 다이닝이 파리에 있다면, 르 클라랑스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전통의 테두리 안에서 기본기를 충실히 다지고 그 위에서 자유롭게 펼쳐내는 감각적인 변주. 프랑스의 온고지신은 이런 모습이었다. 프랑스 미식 문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다음 장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경험. 완성도 높은 아름다움을 접하며 미감을 익히는 과정은 안목을 넓히는 밑거름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르 클라랑스는 안목의 교과서 같은 공간이자,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프랑스 미식의 정수를 경험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곳이다.

파리=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