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번들링, 공정위의 골든타임은 지금이다 [이창훈의 경쟁법인사이트]

생성형 AI도 마찬가지다. 기존 생산성 도구와 결합될 때 학습 비용이 줄고, 데이터 흐름이 매끄러워지며, 가격도 낮아지는 효과가 있다. 사용자는 문서편집기, 메신저, 일정관리, 화상회의를 매번 따로 결제하고 따로 로그인할 수고를 덜고, 사업자는 규모의 경제를 누린다. 경쟁법이 백 년 가까이 끼워팔기를 다뤄오면서도 그 자체를 위법으로 보지는 않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번들링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어떤 번들링이 경쟁을 저해하고, 어떤 번들링이 시장을 키우는가”를 식별해내는 분별의 문제다. 의사가 환자에게 “약을 먹지 말라”가 아니라 “이 약은 이 증상에만 쓰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글로벌 경쟁당국들이 지금 AI 번들링을 주목하는 이유도 결합판매를 일률적으로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분별의 기준을 새 산업에 맞게 다시 짜기 위해서다.
한국 공정위가 이 흐름에 완전히 무관심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AI 산업과 경쟁법의 교차점을 정면으로 다룬 법 집행이나 가이드라인 제정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AI는 산업 자체가 새롭고, 가치사슬이 복잡하며, 무엇이 효율성이고 무엇이 봉쇄인지의 경계가 흐릿해, 어느 당국에게나 손쉬운 영역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 어제까지 전통적인 경쟁법 사건들을 들여다보던 사무실에서 갑자기 AI 산업 내 경쟁구조를 분석하라는 요구는 누구에게도 친숙하지 않다. 한국 공정위는 아직은 이 어려운 영역에 점진적으로 접근해 가는 단계로 보인다.
다만 글로벌 동향의 속도를 감안하면, 점진적 접근만으로는 충분치 않은 시점이 다가오고 있다. 사실 이 문제는 단순한 보폭 차이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나라 당국이 적극적으로 집행에 나서면 글로벌 사업자들은 그 국가별로 결합구조를 조정한다. 어떤 시장에서는 핵심 결합상품을 분리해 더 싸게 팔고, 어떤 시장에서는 소비자에게 선택지를 더 명확히 안내한다. 그러나 한국 공정위가 침묵하면 한국 시장에서는 굳이 그렇게 할 이유가 없다. 결국 같은 결합상품을 두고 다른 나라 소비자는 선택권과 가격 인하를 누리고, 한국 소비자는 그 혜택의 바깥에 서있게 된다. 규제의 공백을 가장 무겁게 부담하는 것은 글로벌 사업자의 결합상품을 매일 결제하고 있는 한국의 소비자다.
![[제미나이]](https://img1.daumcdn.net/thumb/R658x0.q70/?fname=https://t1.daumcdn.net/news/202605/06/mk/20260506070303191njvu.png)
첫째, AI 산업의 경쟁 촉진을 전담할 조직의 신설이다. ‘AI 산업 경쟁 TF’이든 ‘AI·디지털 시장감시과’든 명칭이나 형식은 뭐든 좋다. 전담조직의 실질이 중요하다. AI 번들링은 클라우드 인프라, 파운데이션 모델, 응용서비스가 수직적으로 결합된 구조 속에서 일어난다. 효율성과 봉쇄의 경계를 가르는 일은, 비유하자면 김치찌개에서 김치 맛과 돼지고기 맛을 분리해 평가하는 작업에 가깝다. 둘 다 맛있어서 합쳤는데, 누가 누구의 맛을 먹고 있는지 따져야 하는 상황이다. 이런 분석은 전통적인 끼워팔기 법리만으로, 또는 기존 부서의 사이드 잡(side job) 수준으로는 풀리지 않는다.
전담조직은 경쟁법 전문가만으로 채워서는 안 된다. AI 산업의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산업·기술 전문가,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그리고 경제학자가 한 팀에 섞여 있어야 한다. 또한 이 조직은 미국 FTC·DOJ, EU 집행위, 일본 JFTC 등과 정기적으로 정보를 교환하는 한국 측 카운터파트의 역할도 함께 맡아야 한다. 국제회의에서 “그건 저희 담당이 아니라서요”가 반복되면, 다음 회의의 단톡방 초대장이 어디로 갈지는 자명하다.
둘째, AI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경쟁집행이다. 조직만 만들어 놓고 정책보고서만 쓰게 한다면 그것은 박물관 큐레이터를 뽑아 놓고 전시는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전담조직은 만들어진 첫날부터 AI 산업을 정면으로 들여다보고 집행에 나서야 한다. 다만 적극적 집행이 곧 적대적 집행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시장조사 단계에서 봉쇄 효과뿐 아니라 효율성 효과도 함께 살펴보아야 한다. 한쪽 눈만 뜨고 보면 풍경은 늘 기울어 보이는 법이다. 적극적이되 균형 잡힌 집행 — 어렵지만 그것이 바로 전담조직이 존재해야 하는 이유다.
셋째, AI 번들링을 다루는 가이드라인의 제정 논의를 본격화해야 한다. 사업자에게 가장 부담스러운 것은 규제 자체가 아니라 규제의 불확실성이다. “신호등이 빨간불인 게 무서운 게 아니라, 신호등이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게 무섭다”는 어느 기업 법무팀장의 말이 정곡을 찌른다. 어떤 결합이 안전지대에 들어오고 어떤 결합이 면밀한 검토를 요하는지, 시장지배력은 어떻게 측정하고 봉쇄 효과는 어떻게 판단할지에 관한 분석 틀이 가이드라인 형태로 제시되어야 한다. 가이드라인 제정 과정 자체에 학계, 산업계, 법조계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한다면, 결과물의 정당성과 수용성도 자연스럽게 확보된다. 규제당국과 산업계가 같은 테이블에서 같은 언어로 대화하기 위한 인프라를 마련하는 일이라 봐도 좋다.
세 가지 제언은 결국 하나의 그림이다. 전담조직이 만들어지지 않으면 적극적 경쟁집행도, 가이드라인 제정도 진공 속에서 표류할 수 있다. 조직이 먼저고, 활동이 그 다음이며, 활동의 결과물이 가이드라인이라는 형태로 시장에 환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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