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통조림 속 찰랑거리는 설탕물 같은 것” [새로 나온 책]

러브 온 더 락
고선경 지음, 창비 펴냄
“부끄럽지 않은 욕망이란 뭘까? 복숭아 통조림 속 찰랑거리는 설탕물 같은 것.”
고선경의 시에선 희망과 절망, 욕망도 생생한 향기를 가진다. 제대로 주고도 돌려받지 못한 사랑은 ‘달고 끈적한 캐러멜’ 맛으로, 아찔하고 짜릿하게 빠져드는 사랑은 ‘칵테일 빛깔’로 표현된다. 소리 내어 읽다 보면 침이 고인다. 때로는 그때 그 사람의 향수 냄새를 떠올린다. 그러나 향기롭고 아름답다는 점만으로는 좋은 사랑 시라고 단언할 수 없다. 시인은 자신을 훼손하는 파괴적인 사랑과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좌절까지 담긴 시집을 한 잔의 독주처럼 맛보자고 제안한다. 천사와의 섹스 중에도 천장에 따른 평수와 보증금을 재고 이별을 겪고도 출근이 가능할 만큼만 슬퍼해야 하는 인간의 비애를 담고 있어서, 그의 시를 계속 읽게 된다.

선주민이 쓴 미국사
네드 블랙호크 지음, 최재인 옮김, 책과함께 펴냄
“미국의 이야기는 언제, 어디서 시작되었으며, 누가 그 주인공일까?”
흔히 미국사는 정부를 세운 청교도나 서부를 개척한 백인 정착민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 아메리카의 원주인이었던 선주민은 미국사 서술에서 소외되어왔다. ‘선주민 출신’ 역사학자인 지은이는 흑백 이분법과 정착민 영웅 서사에 치중한 기존 관점을 비판하며 선주민의 시각에서 미국사를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유럽의 신세계 ‘발견’이 아니라 여러 선주민 부족과 유럽·아프리카·아시아 이주민들 사이의 ‘만남’이라는 키워드로 미국사를 그려냈다. 제국주의의 폭력과 강제 이주라는 어려움 속에서 주권과 존엄을 지켜낸 선주민의 생존기를 되살려냈다. 입체적이고 균형 잡힌 시각으로 미국사를 바라보게 하는 이 책은 2023년 전미 도서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다.

1929
앤드루 로스 소킨 지음, 조용빈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많은 이들이 1929년을 주식시장 대폭락의 해로 기억한다.”
1920년대 말 미국은 현대 소비경제의 거대한 용광로였다. 자동차와 세탁기, 그리고 인류의 소통 방식을 혁명적으로 재편할 라디오라는 신기술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기술이 가져올 무한 성장을 의심치 않은 대중은 주식시장으로 몰려들었다. 1929년 10월, 대폭락 직전 월스트리트의 모습이다. 〈뉴욕타임스〉 저널리스트인 지은이는 세계를 뒤흔든 최악의 시장 붕괴 상황을 복원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다. “100년 전 라디오가 약속했던 풍요는 왜 파산의 기록이 되었으며, 오늘날 AI가 약속하는 유토피아는 그 비극을 피해 갈 수 있는가?” 지은이는 비밀 회의록, 그동안 공개되지 않았던 사료, 1929년의 기사를 바탕으로 대폭락의 타임라인을 시간 단위로 그려냈다.

너의 한국 엄마에게
크리스틴 몰비크 보튼마르크 지음, 손화수 옮김, 푸른숲 펴냄
“아이에게 겹겹이 옷을 입혔구나.”
1998년과 2002년 한국인 아이를 입양하게 된 건 여러 우연이 운명으로 간섭한 덕분이었다. 저자는 엄마이자 사회학자로서 ‘내 아이의 나라’인 한국을 치열하게 공부했다. 아이를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낯선 역사를, 정치와 문화를 익혔다. 그러나 진짜 공부는 아이가 성인이 되고 시작되었다. 아이가 자신의 뿌리를 탐구하는 프로젝트를 할 때, 저자도 더 이상 ‘본질적인’ 질문을 피할 수 없었다. 나 역시 이 초국가적인 입양 산업의 ‘공모자’ 혹은 ‘가해자’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않기 위해 미뤄온 문제를 직시해야 했다. 왜 어떤 여성은 아이를 내어주어야만 했을까? 아이를 입양시키는 대신, 제도는 부모가 아이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도울 수는 없었을까? 여전히 아이를 해외에 입양 보내는 ‘선진국’인 한국은 이 질문에 무어라 답해야 할까.

나와 당신은 왜 분노하는가
커트 그레이 지음, 제효영 옮김, 김영사 펴냄
“요즘은 정말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왜 분노할까? 분노의 정체와 작동 원리를 알면 화가 좀 누그러질까. 도덕심리학 분야의 석학인 저자는 우리가 싸우는 이유에 대해 서로 다른 ‘위험’을 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도덕적 판단이 정의로움보다는 본능적인 위험 인식에서 기인한다는 것. 인류는 해를 당할 가능성을 염려하도록 진화했는데 오늘날 가장 중요한 위험이 무엇인지 제각기 다르게 판단하고 그 차이가 도덕적 갈등과 정치적 불화를 유발한다는 해석이다. 인간의 분노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확대되는지, 어떻게 하면 그 갈등을 완화할 수 있을지 살펴본다. 내가 왜 분노하는지 아는 것만으로도 화가 조금 누그러지는 것 같다.

경계를 허무는 기업들
아눅 그레뱅 지음, 연숙진 옮김, 이유출판 펴냄
“저희 회사의 주된 특징은 사랑입니다.”
저자는 프랑스 낭트 대학 경영학과 교수이자 산하 연구소 ‘직장 내 나눔문화 연구’의 석좌교수다. 그가 세계 여러 지역을 방문해 ‘주는 문화’를 실천하는 기업을 탐구했다. 이윤을 극대화하는 기업이 나눔을 실천한다는 게 얼핏 의아하지만 실제 어떤 기업에서는 신뢰와 연대가 조직 운영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필리핀 농촌 은행 방코 카바얀, 파라과이 청소회사 토도 브리요, 아르헨티나 건축자재 회사 디마코가 대표적이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건 대전의 빵집 성심당이다. ‘모든 이가 다 좋게 여기는 일’을 한다는 신념으로 성장해온 이 빵집의 한 직원은 여기선 일을 잘 못한다고 해고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런 사람들이 있으면 자기 자리를 찾도록 힘써줍니다. 동료들이 도와주고 부족한 점을 채워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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