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렌드 리포트] 로마행 비행기에 오른 한국 팬들… 태국 BL은 어떻게 산업이 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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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올해 여름, 서울에서 로마까지 12시간의 비행을 감수하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한국인들이 있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시사회도, 유럽 명품 브랜드 행사도 아니다. 태국 드라마 배우 두 명을 만나기 위해서다. 태국 BL(Boys Love) 드라마에 출연하는 배우들의 해외 팬미팅은 이제 아시아를 넘어 유럽 곳곳에서 열리고 있으며, 한국 팬들은 그 최전선에 서 있다.

BL 드라마란 남성 간의 로맨스를 소재로 한 장르물이다. 2020년 태국 드라마 <2gether: The Series>(한국명 보이프렌즈)가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유튜브를 통해 글로벌 시청자들에게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면서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렸다.
그로부터 6년, 태국 BL은 이제 단순한 장르 콘텐츠가 아니라 드라마·음악·팬미팅·굿즈·명품 브랜드 협업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팬덤 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에서도 태국 BL팬이 크게 늘어나고 있다. 대중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 한국에서도 팬덤이 크게 늘었고 이를 증명하듯 최근 태국 BL, GL(여성 간 로맨스) 가수와 배우가 줄줄이 내한했다.
관용과 검열 사이에서 자란 태국 BL 콘텐츠
태국 사회는 전통적으로 성 정체성에 대한 수용도가 높은 편이다. 트랜스젠더의 사회적 가시성이 크고, 동성 간 연애가 일상에서 비교적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문화적 토양이 있다. 2025년 1월에는 동남아시아 최초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고, 결혼평등법 발효 첫날 전국에서 1,832쌍이 혼인 신고를 했다. 정부는 BL 드라마를 공식적인 소프트파워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레딧'의 한 태국 거주 팬에 따르면 BL 드라마(현지에서는 'Y시리즈'로 불린다) 제작을 장려하기 위해 제작사에 보조금까지 지급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사회적 관용만으로 산업적 성공이 설명되지는 않는다. 태국 정치인 왕정 특유의 미디어 검열로 인해 강한 사회적 메시지나 거대한 서사를 담기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효율적으로 글로벌 시장에 접근할 수 있는 방식이 바로 'BL식 관계 중심 콘텐츠'였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정치·역사·이념은 국경을 넘기 어렵지만, 감정과 관계는 번역이 쉽기 때문이다.
"사랑이 되기 직전의 상태를 오래 붙잡아 둔다"
팬들은 태국 BL의 무엇에 이토록 빠져드는 걸까. 관용과 검열이 산업을 키웠다면, 팬덤을 만든 건 콘텐츠 자체의 힘이라는 평가다. <러블리 라이터>를 세 번이나 정주행한 한 블로거는 "처음엔 그냥 재미로 봤는데, 어쩌다 보니 연달아 2회차 보고, 또 보고… 비하인드 감독 코멘터리 유튜브까지 다 찾아보고 난리도 아니었다"고 고백했다. 또 다른 블로거도 <천개의 별 이야기>를 두고 "단순히 BL 장르로만 보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작품성이 높다. 어느새 빠져들어 시청하고 있었다"고 했다.

태국 BL은 감정이 절정에 이르기 전의 순간에 공을 들인다. 고백도, 키스도 아닌 그 직전 시선이 엇갈리고, 손끝이 닿을 듯 말 듯한 장면들이다. 팬덤 내부에서는 "태국 벨드(BL 드라마)는 가까이서 마주 보는 장면을 특히 길게 찍는다. 배우들도 키스씬보다 이 장면을 더 힘들어한다"는 분석이 공유된다.
이런 연출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품이 태국 웹드라마 아이 톨드 선셋 어바웃 유 다. 푸껫을 배경으로 소년 시절의 우정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은 이 드라마는, 대사보다 표정과 침묵으로 감정을 전달한다는 평을 받는다. 앞서 언급한 <러블리 라이터>와 <천개의 별 이야기> 역시 같은 계보다. 스킨십보다 두 사람이 서로를 인식해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K-드라마가 갈등과 반전으로 시청자를 끌어당긴다면, 태국 BL은 관계가 조금씩 깊어지는 과정 자체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팬들은 감정의 결에 집중한다. 해피엔딩이 보장된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비극이 많은 기존 퀴어 영화들과 달리, 태국 BL은 '순수한 사랑은 모든 장애물을 극복한다'는 로맨스의 정석을 따른다.
순한맛부터 매운맛까지, 취향껏 골라본다
하지만 태국 BL이 서정성만을 무기로 삼는 건 아니다. 억눌린 감정이 충분히 쌓인 뒤 키스신이나 베드신으로 터져 나올 때, 전혀 다른 차원의 파급력이 돼 여성 관객들을 열광케 한다.

아이돌 팬픽, 이른바 '알페스(RPS·Real Person Slash)'는 오래전부터 여성 팬덤 안에서 은밀하게 소비되어 온 장르다. 실존 인물을 소재로 남성 간의 로맨스를 상상하는 텍스트들이 '포스타입' 같은 플랫폼에 수없이 쌓여 있지만, 어디까지나 글자로만 존재했다. 태국 BL은 그 상상을 화면 위에서 직접 보게 만든다. 잘생긴 배우 두 명이 실제로 서로를 바라보고, 손을 잡고, 키스하고, 때로는 베드신까지 감각적으로 연출한다. 팬픽으로만 가능했던 장면이 드라마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 셈이다.
한국·일본·중국의 BL 드라마가 여전히 풋풋한 감정선에 머무르거나 검열에 묶여 있는 사이, 태국은 성인 시청자의 욕망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태국 BL을 처음 접하는 시청자라면 콘텐츠의 수위에 놀랄 수도 있다. 초창기 작품들이 손잡기나 가벼운 입맞춤에 머물렀다면, 2022년 전환점이 된 <킨포르쉐>(KinnPorsche)가 흥행에 성공한 이후 달라졌다.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언컷' 버전에는 남성 배우 간의 진한 키스신은 물론 베드신까지 포함된 경우가 적지 않다. 태국 BL 팬들은 단순한 자극을 위한 노출이 아닌, 두 인물의 감정선이 충분히 쌓인 뒤에 터지는 방식이라 팬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서사가 있는 스킨십'으로 받아들여진다. 물론 지상파 방영분은 심의 기준에 따라 수위가 조정되기 때문에, 플랫폼과 작품에 따라 체감 차이가 크다.

이처럼 서정성에서 시작한 태국 BL의 스펙트럼은 넓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더쿠'의 태국 드라마 전용 게시판 '태방'에서는 수십 편의 작품을 '달달↔멜로', '순한맛↔매운맛' 축 위에 배치하는 타입 조사가 진행된 바 있다. 60여 편의 작품이 좌표 위에 빼곡하게 찍힌 결과물을 통해 장르의 폭을 한눈에 볼수 있다.
풋풋한 짝사랑과 손잡기에 집중하는 청춘물(<마이스쿨프레지던트>·<투게더>)부터, 베드신이 서사의 전환점이 되는 성인·누아르물(<킨포르쉐>·<러브인디에어>), 평소엔 순수하다가 연인이 된 후 과감해지는 혼합형까지 취향에 따라 선택지가 명확히 갈린다. '작품성·화제성 다 잡은 걸작'으로 꼽히는 와 <문라이트 치킨>은 장르 입문자에게도 가장 먼저 권해지는 작품들이다. '범위가 너무 넓어 선택하기 어렵다'는 하소연이 나올 만하다.
열 개가 넘는 제작사, 그리고 그들이 키운 스타들
태국 BL 시장의 장르와 작품 그리고 배우 풀이 넓은 이유는 복수의 제작사가 각자의 색깔로 경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커뮤니티 반응을 종합하면 각 제작사의 개성은 꽤 뚜렷하다.

최대 규모의 GMMTV('찌엠')는 The One Enterprise의 자회사로 1995년에 설립됐다. 이 회사가 키운 대표 커플이 Bright & Win이다. 2020년 <2gether>로 태국 BL 글로벌 붐을 일으킨 원조로, Bright는 버버리 글로벌 앰배서더이자 2024년 태국인 최초로 뉴욕 멧 갈라에 초청됐고, 캘빈클라인은 그의 이름을 딴 글로벌 캠페인까지 론칭했다. Win은 프라다와 협업 중이다. 한국 팬들이 '브윈'이라 부르며 태벨드 입문작으로 가장 많이 추천하는 팀이기도 하다. 역시 GMMTV 소속인 2004년생 동갑내기 Gemini & Fourth는 <My School President> 최종회 방영일 트위터 글로벌 트렌딩 1위를 기록하며, 아시아 투어 'Run the World'를 전석 매진시켰다.
Domundi(도문디)는 2016년 여행 유튜버로 출발해 BL 제작으로 전환한 독특한 이력의 회사다. 이 회사의 대표 커플 Zee & NuNew는 <Cutie Pie>로 이름을 알렸다. 특히 NuNew는 가수로서도 독보적이다. 2024년 임팩트 아레나 2만 석 콘서트를 매진시켰고, 소니뮤직 재팬에 소속돼 일본 싱글을 발매했으며, 지난해에는 한국어 데뷔 싱글까지 발매해 서울 예스24 라이브홀에서 한국 팬미팅을 열었다.

Be On Cloud(비오씨)는 '장르물 맛집'으로 통한다. 마피아 누아르물 <KinnPorsche> 한 작품으로 Mile & Apo를 디올 태국 앰배서더로 만들어냈다. 2023년 글로벌 패션 산업 매체 보그 비즈니스는 '태국 스타들이 어떻게 패션쇼 앞줄을 점령했나'라는 주제로 Mile과 Apo의 지표를 심도 있게 다루기도 했다.
'커플' 단위로 돌아가는 비즈니스
여기서 짚어야 할 구조적 특이점이 있다. 태국 BL을 이해하려면 개별 배우보다 'CP(커플)'라는 단위를 먼저 알아야 한다. 드라마에서 연인을 연기한 두 배우가 작품이 끝난 뒤에도 현실에서 함께 광고를 찍고, 합동 콘서트를 하며, 새 드라마에서 재결합한다. 한 태국 BL 팬은 "태국은 CP로 출연해서 인기가 많으면 계속 CP로 작품을 한다. 팬들은 하나의 드라마가 아니라 '커플의 여정 전체'를 소비한다. 이 구조 덕분에 팬덤의 수명이 개별 작품보다 훨씬 길다"고 표현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작품이 끝나면 배우들이 각자의 길을 간다. 태국 BL에서는 드라마에서 커플을 연기한 배우들이 현실에서도 계속 함께 움직인다. 드라마 자체의 시청률 수입은 전체 수익의 일부에 불과하고, CP 팬덤이 구매하는 굿즈·OST·포토북, 아시아와 유럽을 도는 팬미팅 투어, 그리고 명품 브랜드 앰배서더 계약이 수익의 핵심축이다. 드라마가 끝나도 관계가 계속되는 이 구조가 팬덤의 수명을 개별 작품보다 훨씬 길게 만든다. 팬덤 내부에서는 이를 두고 '드라마는 광고판이고, 진짜 비즈니스는 CP'라는 냉정한 분석도 나온다.
예를 들어 라이징 스타 'Daou & Offroad'는 아이돌 그룹 LAZ iCON 출신으로, 2023년 작품 <러브 인 이머전스>(Love in Emergence)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후 2024년 태국 지상파 One 31 프라임타임에 편성된 <세기의 사랑>(Century of Love)으로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다. 세기의 사랑은 1920년대 태국을 배경으로 100년을 기다리는 환생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다. 이렇게 CP 한 팀으로 드라마를 계속 찍는다.
이 두 사람은 올여름 글로벌 팬들을 로마행 비행기를 예약하게 한 장본인들이다. 8월 말 로마에서 열리는 대형 팬미팅 'JIB DREAM FANMEET 7'의 메인 게스트로 초청됐기 때문이다. 아이돌 출신답게 무대 퍼포먼스가 압도적이라는 평이 많고, 체격 차이에서 오는 두 사람의 케미스트리는 팬덤이 열광하는 또 다른 포인트라는 평이다.
K-POP을 배운 나라가 K-POP의 팬을 가져가고 있다.
이처럼 인기가 점점 수면 위로 올라고 있는 태국 BL 배우들과 제작사는 K-POP의 방식을 적극적으로 벤치마킹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팬미팅·음원 발매·굿즈·브랜드 협업으로 이어지는 수익 구조, 배우 두 명을 하나의 유닛처럼 묶어 마케팅하는 CP 비즈니스, 그리고 SNS를 통해 팬과 일상을 공유하는 소통 방식까지 K-POP 팬덤이 익히 아는 문법이다.

여기에 태국만의 변수를 더했다. 드라마 속 커플이 현실에서도 함께 무대에 서고, 팬미팅에서 극 중 케미스트리를 재현한다. 픽션과 현실의 경계를 전략적으로 흐리는 이 방식은, 팬덤의 몰입도를 드라마가 끝난 뒤에도 유지시킨다. 드라마 한 편에서 출발해 글로벌 투어와 명품 협업까지 이어지는 확장 구조는, 한국 드라마 산업이 아직 본격적으로 시도하지 않은 영역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로마까지 12시간을 날아가는 한국 팬들의 발걸음이 이미 답을 말해준다. 태국 BL은 이제 변방의 장르물이 아니다. 2025년 10월 태국 국민 아들로 통하는 '누뉴 차와린(nunew chawarin)'이 한국 팬미팅 겸 데뷔 쇼케이스를 진행한 것처럼 태국 BL 배우들의 한국 내한과 공연이 늘고 있다. K-POP이 닦아놓은 팬덤 문법 위에서 자란 콘텐츠가, 이제 그 문법을 만든 나라의 팬들을 끌어당기고 있는 셈이다. 대중이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김태현 기자 toyo@ily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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