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 레일 덜커덕 소리 용접하면 안 나는데, 왜 안 하나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 최초 공개

1984년 대한민국 수출액은 292억 달러였다. 1964년의 1억 달러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수직 상승이었다. 화려한 성장세에 비해 기술적 뿌리는 얕았다.
수출용 선박의 부품 절반을 일본에 의존하고 있었다. 정주영 회장이 기술 자립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이유다. 법률신문이 단독 입수해 공개하는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사장단 회의록〉 곳곳에 독자 기술 확보를 향한 정 회장의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외국은 10년 전부터 용접했다
아무것도 아닌데 이제야 생각
한국은 개발도상국이다
우물쭈물하면 세계서 경쟁 못해
유럽 일류회사 기술 책임자 초빙
돈 얼마든지 줘도 좋다
1984년 8월 27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은 선박 부품 국산화를 독려했다. "수출용 선박을 90%까지 국산화해야 합니다. 지금 현대조선이 만드는 수출용 선박의 국산화율은 65%인데, 다른 조선소는 50%도 안 될 겁니다. 배를 수출한다면서 실제로는 일본 부품을 반 이상 씁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조선 국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만들어 수출하고 자금은 수출입은행이 대는데, 배 안에 일본 부품이 절반이면 일본만 좋은 일입니다."
정 회장은 "수출용 선박에 대해 정부가 행정력으로 국산화를 장려해야 합니다"라고도 했다. 현대를 지원해 달라는 뜻이 아니었다. 덮어놓고 일본 제품을 선호하는 행태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취지에서 한 말이었다. "일부 조선소는 일본 제품은 팔아주면서 국산 기자재는 외면하는 경향이 있어요. 같은 값인데 국산은 안 사고 외국 것만 쓰면서 말로만 애국을 하는 겁니다."
1984년 10월 1일 사장단 회의에서 비슷한 문제점을 한 번 더 언급했다. "로이드 선급협회 등의 안전·품질 표준 검증을 통과했는데도 국산을 쓰지 않으려 하잖아요. 선박 대금을 8년에 걸쳐 나눠 받는 방식으로 판매하는데 일본에서 (부품) 절반을 사 오면 (수출에)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정 회장은 "수출입은행에 국산화 심사위원회를 설치해야 합니다"라고도 했다. "은행이 간사, 조선공업협회가 부간사, 4대 조선소에서 위원 한 명씩을 내서 위원회를 운영하면 됩니다. 지금 나라에서 12% 금리로 외화를 들여다가 9%로 수출 기업에 빌려줍니다. 그런데 일부 조선소는 껍데기만 만들고, 외화 손실만 나고 있어요."
그렇다고 정 회장이 국산만 고집한 건 아니다. 기술 자립에 필요하다면 외국 인재를 얼마든지 뽑아 쓰라고 했다. 1984년 10월 1일 사장단 회의. 현대중전기(현 HD현대일렉트릭)의 외국 기술자 채용 문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정 회장: 외국 사람을 채용하는 데 전력을 다하세요. 회사를 국제 경쟁이 가능한 구조로 만들어야지, 국내에서만 우물쭈물해서는 세계에서 경쟁이 되지 않습니다. 자기들끼리 우물거리는 조직을 외국에서 믿겠습니까? 시키는 대로 꼭 외국인을 채용해 주세요. 이건 벌써 3년이 걸린 일입니다. 매주 내게 채용 진행 상황을 보고하세요. 기술 제휴는 다 되어 있잖아요. 사람이 없어서 못 하는 겁니다.
발언이 이어졌다. "나는 유럽의 일류 회사에서 기술 책임자 한 명을 데려올 수 있다면 20만 달러(약 1억 6,000만 원)를 줘도 좋다고 생각해요. '이 사람이 만들었고, 이 사람이 책임자다'라고 말할 수 있도록 해서 고객이 믿고 그 발전기를 쓰게 해야죠. 현대중전기가 혼자서 만든다고 누가 믿어주겠습니까. 입찰에도 못 들어갑니다. 아직 우리나라엔 개발도상국 라벨이 붙어 있습니다." 1984년 현대그룹 대졸 신입 사원의 초임은 월 30만 원이었다. 연봉으로는 360만 원. 정 회장이 거론한 20만 달러는 대졸 신입 연봉의 40배가 넘는 거액이었다.
정 회장은 크랭크샤프트(엔진의 핵심 회전축)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일본의 한 공장이 세계 시장에서 거래되는 크랭크샤프트의 70%를 만든다고 하잖아요. 우리도 그런 걸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단기간이 아니라 3년 후쯤을 목표로 공신력을 쌓으면서 장기적인 구상을 해보세요. 그게 다른 사업보다 부가가치가 훨씬 높습니다."
기술 자립 방침은 1985년 1월 7일 사장단 회의에서도 거론됐다. 정 회장이 말했다. "바깥에서 온 인력은 절반은 실패하더라도 절반은 활용할 수 있습니다. 기존 사원이 성장하기까지 5~6년은 걸리니 지금부터 미리 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 사는 연구소 운영을 보다 철저히 해 주세요."
계열사 중에서는 현대차량(현 현대로템)을 지목했다. "일본은 이미 레일 용접 기술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거 아무것도 아닌데 우리는 안 하고 있어요. 우리도 벤치마킹해 기술력을 갖춰야 합니다. 경부선 전철 사업에 참여한다면서 기술 준비 없이 기대하는 건 곤란해요."
일주일 후 정 회장은 현대차량의 분발을 다시 촉구했다. 1월 14일 사장단 회의. "외국에서는 10년 전부터 레일 용접 기술을 쓰고 있습니다. 이제야 우리가 (레일 용접 기술을) 생각한다는 게 우습지요. 경부선 기차를 타면 덜커덕덜커덕 소리가 나죠. 레일을 용접하면 소리가 하나도 안 납니다. 덜커덕거리는 부분 때문에 기차 속력이 얼마나 줄어듭니까? 아주 초보적인데도 우리가 아직 안 하고 있어요."
정 회장은 현대의 전반적인 기술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마북리(현 경기 용인시 마북동)에 연구소를 조성하라고 했다. "우리가 아직 미비한 점은 연구소입니다. 정부 허가를 빠르게 받아서 약 5만 평(165,289㎡)의 마북리 부지를 확보합시다. 그곳에 각 사가 한 동씩 연구소를 세우면 되죠."
재계 라이벌인 삼성, 금성(현 LG)이 연구·개발에서 현대보다 열성적이라고도 말했다. "우리는 다른 회사보다 연구·개발을 소홀히 하는 것 같아요. 삼성과 금성이 적극적으로 개발에 투자하면서 고도 기술 산업을 하고자 노력하고 있어요. 우리도 조선, 자동차, 반도체 모두 세계 최고가 되도록 해야 합니다."
정 회장은 현대의 기술력 개선과 인재 영입을 수시로 강조했다. 1985년 3월 11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 우리는 기술의 빈약함을 느끼고 있습니다. 자동차 부문만 해도 인원 보충이 되지 않으면 기술 향상이 지연될 겁니다. 그래서 미국에 있는 재미 한인 과학자들을 모집해 한국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해 두었습니다. 설령 실패하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기술자 모집에 투자할 계획입니다. 연구소도 강화하려고 합니다. 3월 중에 허가가 나서 4월에는 연구소를 착공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삼성이나 금성보다 매출이 많지만, 기술 투자나 연구소 시설은 다소 뒤처진 듯합니다. 연구·개발에 대대적으로 투자하고, 전문 인력도 적극적으로 확보할 예정입니다.
석 달 뒤 정 회장은 기술 인력 부족 문제를 다시 제기했다. 6월 17일 사장단 회의.
정 회장: 성장은 결국 시설과 사람에 달렸습니다. 우리는 기술 연구 요원 보강이 미진합니다. 과거에는 현대인력관리위원회에서 인력 충원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각 사가 필요한 인력을 빨리 보강하는 데 지장이 있다면 이제부터는 독자적으로 모집 방안을 강구해야 합니다. 각 사의 경영자는 성장하려면 무엇을 보강해야 할지 철저히 점검하고, 여건이 어렵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항상 의논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