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결정문엔 '문제'가 있다… 김기영 전 재판관이 고백한 헌법의 순간들

최다원 2026. 5. 6. 0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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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헌법을 생각하는 일' 낸 김기영 전 헌법재판관
'12·3 불법 계엄' '이재명 파기환송' 계기로 집필 결심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법농단' 거치며 법관 독립 고민
제왕적 대법원장 비판뿐 아니라 동료 재판관 결정도 지적
"헌법은 누구나 고민하고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일"
김기영 전 헌법재판관이 4일 서울 중구 한국일보사에서 본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퇴임 후 버킷리스트를 지워나가는 재미로 지내던 2024년 가을이었다. 중고거래 플랫폼을 통해 오래된 태블릿PC를 팔고, '휴대폰 성지'에서 기기를 구입하는 등 소소한 경험이 즐거움을 줬다. 그리고 유럽 출장길을 떠난 게 12월 3일 낮. 14시간의 비행 끝에 내렸더니 200통 넘는 연락이 와 있었다. 계엄이 선포됐다는 것이었다. 먼 이국땅에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귀국 후 공직생활 33년간의 메모들을 꺼냈다. 책으로 쓸 일 있을까 싶어 모아둔 것들이 생각보다 이르게 제 역할을 하게 됐다. 이듬해 5월 1일 대법원이 이재명 대통령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을 접수 34일 만에 파기환송 선고한 것을 보고 집필 방향을 굳혔다. "법관의 양심이란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했죠." 퇴임 후 첫 저서 '헌법을 생각하는 일'을 낸 김기영 전 헌법재판관의 얘기다.

왜 '5월 1일 판결'을 책의 출발점으로 삼았는지는, 김 전 재판관이 2018년 9월 재판관 후보자 신분으로 임했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당시 청문회에선 그가 2009년 신영철 전 대법관의 '촛불재판 개입 의혹' 이메일을 폭로한 일과, 2015년 대법원 판례와 달리 긴급조치 피해자들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가 법원행정처의 징계 검토 대상에 올랐던 일이 집중 질의됐다.

김기영 전 재판관이 2018년 9월 10일 국회에서 열린 인사청문회에 후보자 자격으로 답변하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례적 속도로 처리된 지난해 대법원 판결 역시 2008년의 재판개입 시도와 2018년의 사법농단 사태처럼 '법관 독립'의 가치를 퇴색시켰다는 게 김 전 재판관의 설명이다. 이렇게 부연한다. "외부로부터 사법부 독립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것 같아요. 내적 독립, 그러니까 판사가 행정처 등 상부 압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 역시 꽤나 개선됐다고 봤어요. 그런데 그게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거죠."

대법원장에게 사법행정 권한이 집중된 현 체제에 대한 비판은 첫 장부터 신랄하다. "한 사람의 손에 모든 법관의 운명이 달려 있다는 것은 구조적으로 독립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며 법원의 경직된 위계서열 문화를 꼬집었다. 지난 3월 많은 진통 끝에 시행된 재판소원에 대해서는 "법관이 헌법을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진단했다.

사법부 독립에 대한 논의를 지나 책은 그가 재판관 임기 6년 동안 마주했던 고뇌의 순간들로 나아간다. 어쩌면 '반성문'에 가까운 이 대목들은, 헌재가 쟁점이 동일한 사안을 두고도 일관되지 않은 결론을 내렸던 사례들과 시대의 요구에 시의적절하게 응답하지 못했던 사건들, 헌재의 정치화 문제 등을 여과 없이 복기하며 결정문에 미처 담지 못했던 고민을 풀어낸다.

2024년 10월 17일 김기영(왼쪽부터) 전 재판관이 이종석 전 헌법재판소장, 이영진 전 재판관과 함께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열린 퇴임식을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한호 기자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에 대해서는 언급을 피할 법도 하건만 지적은 더 매섭다. 2019년 4월 낙태죄 사건에서 안락사와 고려장 등을 거론한 반대의견엔 "논리적 비약이 크다"고 평하고, 2024년 5월 안동완 검사 탄핵소추를 기각하며 법원과 정반대 근거를 댄 재판관들에 대해 "법원 판단 존중의 원칙을 이탈하고 충분한 설명이 없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물론 자기 고백도 있다.

김 전 재판관은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에겐 성역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제가 느낀 걸 가능하면 솔직하게 쓰려고 했어요. 누구든 비판할 지점이 있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판결이나 결정을 잘해서 하는 말은 아니고요. 법관의 양심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거죠."

책에서 김 전 재판관은 법관이 가진 경험과 배경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에 영향을 미친다고 썼다. 그렇다면 충남 홍성군 구항면 청광리에서 태어난 시골내기를,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재판관으로 성장시킨 자양분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즉답 대신 어린 시절부터 오늘날까지를 회고한 짧은 글을 건넸다. "사심을 버리자, 내 이익을 먼저 생각하지 말자. 이 원칙을 계속 되뇌었어요."

법복을 벗은 김 전 재판관은 현재 단국대에서 헌법을 가르치는 석좌교수로 있다.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가 내려지던 지난해 4월 4일도 그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중계를 지켜봤다. "계엄이 선포됐을 때 다들 이건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게 바로 정답이었잖아요. 헌법은 그런 거예요. 누구나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일이죠. 모든 분들이 이 책의 독자가 될 수 있어요."

헌법을 생각하는 일·김기영 지음·사회평론 발행·328쪽·1만7,800원

최다원 기자 da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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