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미의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 미국의 즉시독립안, 3상 회의서 소련이 거부… 좌파 사학계 시각 교정해야

문유미 스탠퍼드대 역사학과 교수 2026. 5. 5.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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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 신탁통치
모스크바 3상 회의 후 좌·우 분열
민족주의 폭발을 우려한 존 하지는
신탁통치 재고와 즉시독립안 건의
군정 초기 정책과 3상 회의 결정의
한계와 실책 냉철하게 재평가해야

해방 전후사를 둘러싼 해석과 논쟁이 치열하게 전개돼 왔으나 연구는 아직도 미흡하다. 일제가 1940년대 들어 조선어 신문들을 폐간하고 출판 활동을 탄압하면서 조선인의 시각이 담긴 당대의 사료가 매우 부족한 것이 한 원인이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의 전개와 종전, 미군정과 정부 수립 등을 더 깊이 연구하지 않고는 역사적 상황에 대해 추상적이거나 편향된 해석을 할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 재미 학자 문유미 스탠퍼드대 교수가 ‘제대로 쓰는 해방 전후사’를 연재한다. –편집자 주

1945년 7월 독일 포츠담 회담장에서 만난 스탈린, 트루먼, 번즈, 몰로토프(앞줄 왼쪽부터). 그해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에 대한 5년간의 신탁통치안이 가결됐다. /트루먼도서관

해방 후 우익과 좌익이 골육상쟁에 이르게 된 큰 계기는 신탁통치 반대 운동이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미소공동위원회 설치와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자 우익은 반탁, 좌익은 찬탁으로 분열해 격렬하게 대립했다. 진보 진영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3상회의 결정을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긍정적 방안으로 평가했다. 이와 관련해 ‘동아일보 오보 사건’으로 알려진 일화가 있다. 동아일보는 “소련은 신탁통치,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이라는 헤드라인으로 3상 회의 결정을 보도했고, 이것이 전국적 반탁 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그러나 일부에서 지적한 바와 달리, 그 기사는 오보로 볼 수 없다. 후술하겠지만 “미국은 즉시 독립, 소련은 신탁통치”는 3상 회의 결정에 대해 영국 외교부가 내린 해석이었다.

진보 학계는 이 기사 배후에 군정 사령관 존 하지와 맥아더 휘하의 연합군 최고사령부가 개입했다는 음모론을 제기한 바 있다. 하지를 냉전주의자로 규정하고, 섣부른 반소 정책의 주체로 비판했다. 동시에 해방 공간의 역사를 인민공화국 설립과 좌우 합작, 5·10 총선거 반대 등 범좌익세력의 입장을 중심으로 서술하며, 이와 상충하는 사료는 경시·왜곡하는 편향을 보여왔다. 이런 관점에 의존하면 역사 이해를 한쪽으로 치우치게 할 위험이 크다. 하지의 입장과 미군정의 초기 정책, 3상 회의의 결정과 한계를 균형 있게 살펴야 한다.

존 하지 미군정 사령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존 하지와 미군정의 초기 정책

미국은 미·소의 분할 진주를 결정했지만 분단을 의도하지는 않았다. 일본군 무장해제가 마무리되는 즉시 한반도 전역에 통일된 민간 행정부를 수립한다는 계획이 있었다. 신탁통치와 별개로 중앙집권화된 행정부 수립을 겨냥한 정책으로, 서울신학대 박명수 교수의 선행 연구가 이를 뒷받침한다.

해방 직후의 정책으론 1945년 8월 24일에 작성된 삼부조정위 결정(SWNCC 176)이 있다. 이 문서는 맥아더에게 전달됐다. 이 외에 1945년 9월 15일 극동위원회 보고서(SFE 119)와 관련 삼부조정위 문서(SWNCC 79와 79/1)가 존재한다. 그 요지는 미·소 양군은 일본군 무장해제 직후 한반도 전역에 통일된 민간 행정부를 꾸리고, 이를 지휘할 ‘연합군 통제 회의(A Control Council)’를 설치하되 영국과 중국 관계자도 참여하게 하자는 구상이었다. 이후 적절한 절차를 거쳐 이 행정부는 신탁통치 기구로 대체돼 조선의 정부 수립을 관리할 예정이었다.

비록 미국과 소련은 얄타회담에서 신탁통치에 구두로 합의했으나, 점령 초기의 통일적 행정에 대해 구체적 합의는 없었다. 따라서 삼부조정위는 미 국무성이 즉시 소련의 동의를 구해 조선 전역에 통일적 민간 행정을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미국이 소련을 한반도 점령에 참여시키면서도 세부 절차에 충분한 합의를 보지 않은 점은 큰 실책이었다.

한국에 대한 5년간의 미·소 신탁통치안이 가결되자, 전국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났다. /조선일보 DB

하지와 랭던의 ‘즉시 독립안’

하지는 진주 직후 맥아더에게 보낸 첫 전문에서 남한 상황을 ‘불씨만 던지면 폭발할 화약통’에 비유했다. 이 표현은 사회 혁명의 전야에 놓여 있었다는 의미로 인용돼 왔으나 하지가 전문에서 우려한 것은 민족주의적 요구의 폭발이었다. 하지는 당시 한국인들이 카이로 선언의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를 ‘수일 내’로 오해하는 등 즉시 독립 열망이 들끓었고, 일본인 재산 몰수 및 추방 요구를 제어하기 어려운 상태라고 보고했다. 또한 소련군 사령관이 모스크바의 훈령 없이는 결정할 권한이 거의 없어 협의가 어려운 실정을 반복적으로 토로했다. 하지는 미·소 점령군 간 협력이 무너지면 남북 행정이 분리되고 소련 관할 지역의 공산주의 고착화로 통일 정부 수립이 어려워질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하지는 조선 독립과 정부 수립에 관해 연합국 차원의 신속한 결정을 촉구했다. 한국민의 심리 상황을 볼 때 신탁통치 수용 가능성에도 큰 의문을 나타냈다. 하지는 즉시 독립 요구를 수용하고 정부 구성 전까지 중경 임시정부가 지도부 역할을 맡는 방안을 제안했다.

미국은 한반도 즉시 독립과 통일 행정부 수립 방안도 고려하며 국내 정치 지도자들을 접촉했다. 1945년 11월 이승만, 김구, 존 하지(왼쪽부터) 미군정 사령관의 회동. /조선일보 DB

1945년 10월, 군정 정치 고문으로 부임한 윌리엄 랭던은 하지의 이런 판단에 공감한 것 같다. 1945년 11월 말 국무성에 신탁통치안을 폐기하고 새로운 경로로 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을 한다. 랭던은 “조선인들이 미군의 점령을 인내하고는 있으나 군정 이후에도 외국 지배를 받거나 저문명국이라서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안으로는 김구를 중심으로 ‘정무위원회’를 구성해 임시정부를 운영한 후, 선거를 통해 정부를 조직하고 유엔의 승인을 받는 ‘즉시 독립’ 방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국무장관 번즈는 랭던의 안을 거부했다. 그는 “신탁통치는 국제적 합의에 기초한 것이고, 한국 문제는 소련의 동의를 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소련과 협상하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답변했다. 다만 소련이 동의한다면 신탁통치 폐기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모스크바 3상 회의와 영국의 해석

번즈는 소련과의 합의를 강조했지만 랭던의 판단에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즉시 독립안을 1안으로, 신탁통치안을 2안으로 소련과의 협상을 준비했고 3상회의 당사국인 영국 정부와도 협의했다. 영국은 내부 논의에서 미국이 즉시 독립안을 추진하나, 소련이 동의하지 않으면 유엔 헌장에 따른 신탁통치안을 선택한다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신탁통치를 선호하지만 미국이 1안을 추진한다면 이를 지지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사진 참조>

1945년 12월 영국의 극비 전문. ‘미국이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조선의 즉시독립안을 1안으로 추진하며, 영국은 소련이 반대하지 않는다면 미국 입장을 지지해야 한다’고 적혀 있다. /영국 국립문서보관소

미국이 3상 회의에 제출한 제안서는 ‘한국을 위한 통일 행정 수립’이라고 돼 있다. 행정, 경제, 재정 면에서 남북 행정을 즉시 통합하는 방안에 이어 신탁통치안을 병기했다. 영국 외상 어니스트 베빈은 “두 가지 원칙을 어떻게 조화시킬지가 과제”라고 발언했다. 미·소 간의 실제 협상은 12월 20일에 이뤄지는데 소련 외상 몰로토프는 번즈안에 교묘하고 주의 깊게 대응했다. 몰로토프는 남북 행정 통합 문제에 대해 구체적 협상을 피하고, 이를 미·소 점령 사령부의 논의에 맡겨두자고 했다. 그는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며 미·소 공동위를 통해 임시정부 수립 협상을 추진하자고 제안했다. 이에 번즈는 통일 행정 문제를 더 협상하지 않고 소련안을 거의 수용했다.

이후 영국은 모스크바 협상에서 미국의 즉시 독립안이 폐기되고 소련이 신탁통치안을 선택했다고 평가했다. 소련군은 38선 이북에서 배타적 권력을 유지하고 미국의 개입을 막은 한편, 미·소 공동위를 통해 임시정부에 참여할 남한의 정치 세력을 결정할 권한을 얻었다. 미 국무장관 번즈는 하지와 랭던의 판단을 일부 수용했으나, 대소 협조에 대한 관성적 태도로 즉시 독립안을 포기함으로써 한반도에 닥칠 대혼란을 미연에 방지할 기회를 잃었다.

진보학계는 그간 미국의 통일적 민간 행정 추진 계획이 소련의 비협조로 좌절됐다는 점을 간과했다. 즉시 독립안 추진을 우익 및 친일파 옹립 시도로 해석하는 등 편향적 서술을 해왔다. 그러나 당시 하지와 랭던의 즉시 독립안은 조선인의 절박한 요구와 소련 점령 지역의 상황이 의심스럽다는 문제 인식에 기반한 대안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남북한 통일적 행정 수립을 포기하고 임시정부 수립을 소련과의 협상에 맡긴 3상 회의 결정을 과연 통일과 민주적 정부 수립의 길로 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재고와 함께, 미군정 초기 정책과 3상 회의 결정의 한계를 냉철하게 재평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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