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젠 ‘어떻게 함께 오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실용이다[류영재의 제3의 자본주의]
요즘 한국 사회에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자주 회자된다. 실용주의란 무엇일까. 그것은 이념의 깃발만 높이 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문제를 대하고 푸는 태도일 것이다. 실용주의의 반대말은 비현실적인 이상주의나 공상만은 아니라고 믿는다. 더 무서운 반대말이 있기 때문이다. 자기 진영의 관점과 이해만 진실이라 믿는 태도가 그것이다. 그 순간 상대는 대화의 상대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이 된다. 실용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성토와 구호만 남는다.
체 게바라의 유명한 금언이 있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는 불가능한 꿈을 꾸자.”
보기에 따라 현실과 이상은 대척 관계가 아닌 상호 보완관계일 수도 있다. 자본과 노동, 원청과 하청 사이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문제는 현실을 핑계로 원칙을 쉽게 버리거나 이상을 앞세워 현실을 무시하는 데 있다. 오늘날 한국 자본주의 자화상이다.
지금 한국 자본주의는 ‘파이를 키우고 나누는 식탁’보다 ‘거친 바다를 건너는 배의 기관실’에 비유될 수 있다. 노동은 임금계를 보고, 주주는 수익률계를 보고, 경영진은 매출계를 보고, 협력사는 납품단가계를 본다. 계기판을 들여다보는 각자의 시선은 모두 절박하다. 그러나 배의 항로를 함께 보지 않는다면, 각자의 숫자에 만족하는 순간에 배는 암초를 향해 갈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제는 자기 계기판의 논리가 아니라 배 전체와 항로를 보는 시선이 아닐까.
최근 한국에서는 주주 중시 경영이 힘을 얻고 있다. 지배주주 전횡이 뿌리박힌 오랜 현실을 감안할 때, 소수주주 권리 강화는 분명 가야 할 길이다. 그러나 기업의 목적을 주가와 주주환원으로만 좁혀 버리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회사법 학자 린 스타우트는 주주가치 극대화가 기업의 장기 경쟁력과 사회 전체에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데이비드 맥클린은 ‘주주자본주의를 위한 변론’에서 장기적 주주가치의 창출이 혁신과 성장, 더 나은 일자리로 이어진다고 옹호한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누구 편에 서느냐가 아니라 복잡계 현실에서 균형을 잡는 일이다.
노동의 요구도 마찬가지다. 기업의 이익은 노동 없이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노동의 몫만 정의롭고 자본의 몫은 의심스럽다고 말하는 순간 기업은 내일의 투자 여력을 잃을 수 있다. 소수 주주의 권리도 정당하다. 그러나 배당과 자사주 매입이 미덕이라는 프레임에 빠지면 기업은 미래를 갉아 오늘의 숫자를 꾸미기 쉽다. 원청의 이익이 커질수록 하청의 부담이 깊어지는 구조라면, 그것은 플러스섬이 아니라 제로섬이다. 하청의 경쟁력이 전제되지 않는 원청의 경쟁력이란 결코 지속 가능할 수도 없다.
돌이켜보면 지난 70여 년의 한국 자본주의는 각자 몫의 균형점에 대해 외면해 왔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은 말할 자유조차 빼앗긴 채 일해야 했다. 성장의 과실은 주로 지배주주에게 치우쳤고, 소수 주주의 권리는 밀려났다.
87년 체제는 노동의 몫이 분출한 시간이었다. 97년 외환위기 이후에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가 굳어졌다. 이제는 소수 주주와 협력사도 희생을 감수해 온 자기 몫을 주장한다. 오늘의 충돌은 그간 오래 미뤄뒀던 청구서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면이다.
경제학자 맨슈어 올슨은 사익집단들이 조직화해 서로 충돌할수록 사회의 경직성이 커지고 국가 경쟁력이 하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문제는 이해의 조직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조정하고 절충할 공적 능력이 설 자리를 잃을 때다. 모두가 자기 이익의 언어만 정교화하고 사회 전체의 언어는 퇴화될 때 혁신은 느려지고 성장은 마른다.
그래서 나는 이제 한국 자본주의가 ‘누가 더 많이 가져갈 것인가’의 체제에서 ‘어떻게 함께 오래 갈 것인가’의 체제로 옮겨가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이 내가 말하는 ‘제3의 자본주의’다.
주주만의 자본주의도 아니고 노동만의 자본주의도 아니다. 대주주와 소수 주주, 정규직과 비정규직, 원청과 하청, 소비자와 지역사회가 모두 자기 몫을 말할 권리를 인정받되, 그 권리가 공동의 지속 가능성을 무너뜨리지 않도록 조정되는 자본주의다.
실용은 누구의 편인가. 실용은 강한 자의 편도, 약한 자의 편도 아니다. 실용은 ‘우리 공동의 미래 편’이다. 한국 자본주의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면 이제는 어느 한쪽의 승리를 정의라고 부르는 문화적 관성부터 버려야 한다.
각자의 계기판을 잠시 내려놓고, 배가 가야 할 항로를 함께 바라보아야 한다. 실용은 결코 쉬운 타협이 아니지만 가야 할 길이다. 서로 다른 몫을 인정하면서도 함께 살아남을 질서를 만드는 가장 어려운 지혜이자 용기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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