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두율 칼럼]미국과 유럽, 힘과 규범 사이에서

미국 중심 질서에 계속 결속이냐, 하나의 전략적 주체로 재구성이냐,
규범·중재 통해 다극 질서의 균형자로 남느냐
유럽은 지금 자신들 앞에 놓인 세 가지 길 사이에서
결정을 유보한 채 고민하고 있다
다극화 시대에서 정치적 판단력을 확보해야만 하는 과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분단체제 속의 한국에도 낯설지 않다
며칠 전 베를린을 떠나 포르투갈로 향하던 길, 공항으로 가는 도중 하나의 포스터가 나의 시선을 붙잡았다. 한때 냉전의 상징이었던 브레즈네프와 호네커의 포옹 장면을 패러디하듯, 그 자리에 푸틴과 트럼프가 서로 끌어안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짧고 도발적인 문장이 적혀 있었다. ‘유럽합중국, 지금!’ 그리고 그 곁에는 ‘볼트 유럽’이라는 이름이 보였다.
이 이미지는 단순한 정치 광고를 넘어 하나의 징후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외부의 힘으로 규정되어온 유럽의 최근의 역사, 그리고 이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2017년에 등장한 이 초국가적 정당은 국가 단위를 넘어 유럽 전체를 하나의 정치적 공간으로 사유하려는 드문 시도다. 그러나 이 시도는 아직 제도적 현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질문에 가깝다. 유럽은 과연 스스로 하나의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가.
오늘의 유럽은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회의에 빠져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그리고 이어진 중동의 위기는 단순한 지정학적 사건이 아니라, 유럽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해왔는지를 되묻는 계기이다. 오랫동안 지속해온 미국 의존적 안보 질서는 이제 더는 자명하지 않다. 유럽은 미국의 전략 속에서 움직이면서도, 동시에 그 전략을 규범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이중의 위치에 서 있다. 이 모순된 자리에서 유럽은 지금 결단하기보다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방식으로 자신을 유지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대서양을 사이에 둔 두 세계의 관계는 언제나 상호 시선의 교차 속에서 형성되어왔다. 미국의 독립선언이 선포되었을 때, 프랑스의 계몽주의 경제학자 튀르고는 그것을 인류사의 희망으로 보았지만, 네덜란드 출신의 문화철학자이자 외교관인 코르넬리우스 드 파우는 오히려 퇴화의 징후로 보았다.
이 상반된 평가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미국이라는 ‘새로운 대륙’에 대한 유럽 내부의 분열된 인식 자체를 드러낸다. 이에 대해 미국의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반박에 나섰던 사실은 이미 그 시점에서 유럽과 미국은 서로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정책 넘어 세계 질서에도 시각차
그럼에도 유럽은 프랑스 혁명 이후 오랫동안 자신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이해했다. 칸트나 헤겔에게도 미국은 정치적 사유의 중심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보면 알렉시 드 토크빌의 <미국의 민주주의>는 하나의 전환점을 보여주었다. 그는 미국을 단순히 찬양하거나 비판하지 않으면서도 미국의 핵심적 문제를 드러냈다. 평등은 개인을 해방하는 동시에 고립시키고, 다수 의지는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새로운 억압이 될 수 있다는 그의 통찰은 미국을 이해하는 동시에 유럽 스스로도 돌아보게 하였다.
이러한 관계는 20세기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외부의 관찰자가 아니라 개입하는 행위자로 등장했다. 중립을 선언했던 미국은 독일의 잠수함 공격을 계기로 참전하면서 유럽의 운명에 직접 개입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전환이 아니라, 세계사의 중심이 이동하는 사건이었다. 유럽이 더는 자기 완결적인 세계가 아니라는 사실도 명확해진 것이다.
이때로부터 30년 만에 발생한 제2차 세계대전은 유럽에는 단순한 패배나 승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유럽이 만들어낸 문명이 또 한 번의 자기 파괴로 귀결된 사건이었다. 이후 유럽은 더는 세계의 중심일 수 없었고 자신을 반성하는 공간으로 변모한다. 복수 대신 화해, 주권 대신 통합, 권력 대신 규범을 강조하는 오늘날의 유럽 질서는 바로 이 전쟁의 폐허 위에서 형성되었다. 유럽연합이라는 실험 역시 궁극적으로는 전쟁의 불가능성을 제도화하려는 시도였다.
반면 미국에 이 전쟁은 다른 의미를 지닌다. 미국은 이 전쟁을 통해 완전한 세계 패권으로 등장했다.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서 유럽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그 개입을 세계 질서의 재편으로까지 확장시켰다. 전쟁 이후 미국은 단순한 승전국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설계하는 중심이 되었다. 이의 상징이 바로 마셜 플랜과 나토였다. 전자는 폐허가 된 유럽을 재건하는 경제적 틀이었고, 후자는 냉전 속에서 유럽을 보호하는 군사적 장치였다. 이 두 제도는 유럽의 재건과 의존을 함께 만들어낸 동시에 유럽의 평화가 단순히 유럽 내부의 노력만으로 유지된 것이 아니고 자율성과 의존성 사이의 긴장 속에서 형성된 정치적 공간임을 밝혀주었다.
냉전기에 미국과 유럽의 관계는 비교적 분명했다. 유럽은 소련의 위협 앞에서 미국의 군사적 보호가 있어야 했고, 미국은 유럽을 자유주의 진영의 핵심 전선으로 보았다. 미국은 유럽의 방패였고, 유럽은 미국 세계전략의 중심 무대였다. 이런 관계에서 노벨 평화상 수상자 선정에 오랫동안 관여했던 노르웨이의 역사학자 예이르 루네스타는 미국을 유럽의 ‘초대된 제국’이라고 표현했다.
냉전 종식 이후 상황은 달라졌다. 소련이라는 공동의 적이 사라지자, 미국과 유럽을 묶어주었던 강한 접착제도 약해졌다. 독일 통일, 동유럽의 민주화, 유럽연합의 확대는 유럽에 새로운 자신감을 주었다. 유럽은 더는 단순한 미국의 보호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 정치공간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현실은 복잡했다. 유고슬라비아 전쟁, 코소보 전쟁,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은 유럽의 한계도 드러냈다. 특히 이라크 전쟁은 미국과 유럽 사이의 깊은 균열을 보여주었다. 미국은 군사력과 일방주의를 앞세웠고, 유럽은 국제법과 다자주의를 강조했다.
타자의 결정 따라야 하는 유럽
이때부터 미국과 유럽의 차이는 단순한 정책 차이가 아니라 점차 세계 질서에 대한 시각에 있어서도 예민한 차이로 나타났다. 미국은 여전히 힘을 통해 질서를 만들 수 있다고 믿었고, 유럽은 전쟁의 기억 때문에 규범과 제도 속에서만 질서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독일 총리 메르츠가 최근 미국의 이란 전쟁에 대해 명확한 전략도 없고 이란에 ‘굴욕당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에 발끈한 트럼프는 미국의 대외정치를 논하기 전에 독일의 이민이나 경제 문제에나 신경 쓰라고 비난했고 독일 주둔 미군 5000명을 철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현재 미국과 유럽의 관계가 어디까지 왔는지를 보여준 하나의 사건이다.
지난해 말 발표된 미국의 안보전략 보고서는 러시아를 단기적인 위협이지만 구조적으로는 제한된 행위자로 평가하는 한편, 중국은 장기적으로 국제적 힘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도전자로 규정하고 있다. 다극화는 단순히 강대국의 숫자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질서를 규정하는 중심이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 되는 상황, 다시 말해 규범과 힘, 경제와 안보가 서로 다른 축으로 분리되는 시대를 의미한다. 이 새로운 세계에서 유럽은 지금 더는 과거처럼 미국의 보호 아래 머물 수도, 그렇다고 완전히 독자적인 세력으로 곧장 전환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유럽은 국제법, 인권, 다자주의와 같은 규범의 언어를 정교하게 발전시킨 공간이지만, 그 규범을 지탱할 힘의 문제 앞에서는 주저해왔다. 반대로 미국, 중국, 러시아와 같은 행위자들은 힘을 통해 질서를 구성하려 한다. 이 틈 속에서 유럽은 종종 설득의 언어를 사용하지만, 결국 타자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 위치에 놓여 있다.
결국 유럽은 세 가지 길 앞에 서 있다. 미국 중심 질서에 계속 결속되는 길, 스스로 하나의 전략적 주체로 재구성하는 길, 혹은 규범과 중재를 통해 이미 시작된 다극 질서의 균형자로 남는 길이다. 그러나 지금의 유럽은 이 세 길 사이에서 결정을 유보한 채 고민하고 있다.
얼마 전 별세한, 공론장의 철학자이자 유럽 통합을 줄곧 강조했던 위르겐 하버마스는 그의 생의 마지막에 유럽 자체의 국방력 강화를 자주 언급했다. 자신이 만든 규범의 언어를, 스스로 지켜낼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행위자로 유럽이 당당히 서기를 바라는 그의 유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고민은 결코 유럽만의 것이 아니다. 미국의 보호 아래 오랫동안 안보를 유지하고 있지만 다극화 시대를 맞아 자신의 정치적 판단력을 확보해야만 하는 과제는, 분단체제 속의 한국에도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송두율 전 독일 뮌스터대 사회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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