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논단] 지음(知音)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2026. 5. 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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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공진희 부국장(진천주재)

춘추시대의 거문고 명수 백아에게는 자신의 음악을 온전히 이해해주는 단 한 명의 친구, 종자기가 있었다.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며 연주하면 종자기는 "아, 태산처럼 우뚝 솟았구나"라고 감탄했고, 흐르는 물을 생각하며 타면 "도도히 흐르는 강물 같구나"라며 그 마음을 읽어냈다.
종자기가 세상을 떠나자, 백아는 거문고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 자신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알아줄 사람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절망 때문이었다. 여기서 유래한 '지음(知音)'이라는 말은 단순히 아는 사이를 넘어, 서로의 영혼의 울림을 이해하는 지고의 우정을 상징한다.
제나라의 관중과 포숙아의 관포지교는 상대의 허물과 실패조차 '형편이 어려워서였을 것'이라며 포용하는 무조건적인 신뢰를 보여준다. 관중은 생전에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나,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라며 고마움을 표했다.
오늘날 우리는 SNS와 메타버스를 통해 시공간의 제약 없이 수천 명의 '친구'를 맺을 수 있다. 하지만 왜 고독한 군중은 늘어만 갈까?
현대의 디지털 우정은 대개 편집된 일상의 단면만을 공유한다. 백아가 거문고 선율 속에 자신의 고뇌와 환희를 오롯이 담아냈다면, 현대인은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를 연출한다. 이는 깊은 내면의 공유보다는 얕은 공감과 전시(展示)에 치중하게 만들어, 관계의 밀도를 떨어뜨린다.
그리고 기술은 연결을 돕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비교의 장을 제공한다.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 오히려 나의 부족함을 확인하는 과정으로 변질된 것이다.
또한 과거의 우정은 편지를 기다리고 먼 길을 찾아가는 '시간의 축적'을 필요로 했다. 그러나 현재의 관계는 즉각적인 반응에 의존하며, 마음에 들지 않으면 쉽게 '차단'하거나 삭제할 수 있는 휘발성을 띤다. 고난을 함께 이겨내며 단단해지는 서사가 사라진 자리에는 공허함만이 남는다.
우울과 고독의 파도를 넘어 진정한 연결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술적 진보만큼이나 심리적·철학적 태도의 변화가 시급하다. 완벽한 모습만 보여주려 하는 SNS식 소통을 넘어, 나의 슬픔과 불완전함을 솔직하게 고백할 때 비로소 '종자기' 같은 친구가 나타날 수 있다. 진정한 우정은 강점이 아니라 약점이 만나는 지점에서 싹튼다.
디지털 기기는 만남의 계기일 뿐, 관계의 완성은 눈을 맞추고 서로의 호흡을 느끼는 대면의 공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텍스트 뒤에 숨은 감정의 맥락을 읽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백아가 거문고 줄을 끊은 것은 음악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공명(共鳴)이 없는 연주는 소음에 불과하다는 선언이었다. 현대 사회의 수많은 알림 소리는 혹시 우리 영혼을 갉아먹는 소음은 아니었을까?
우리는 더 많은 친구를 사귀는 법이 아니라, 단 한 명이라도 제대로 '지음' 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살과 우울이라는 극단적 사회 현상은 결국 "나를 온전히 이해해주는 이가 없다"는 절망에서 기인한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종자기가 되어주고, 또 누군가에게 나의 백아 같은 속내를 보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기술이 제공하는 '연결'은 진정한 '위로'로 거듭날 것이다.
거문고의 줄을 다시 매는 마음으로, 이제는 모니터 너머의 숫자가 아닌 내 곁의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의 내면과 깊은 우정을 맺어야 할 때이다.
백아와 종자기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처럼, 수많은 데이터와 연결 속에서도 결국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나의 진심을 알아주는 단 한 사람'의 존재이다. 
오늘 하루는 주변의 소중한 사람에게, 혹은 치열하게 살아가는 자기 자신에게 "고생 많았다"는 따뜻한 이해의 한마디를 건네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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