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밀하게 직조한 전자음의 향연…독일 전자 음악 거장 ‘크라프트베르크’ 내한 공연

윤수정 기자 2026. 5. 5.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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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네이션4일 오후 서울 명화라이브홀에서 약 7년 만의 내한 공연을 개최한 독일의 전설적 전자음악그룹 크라프트베르크. 현존하는 클럽과 전자음악들의 기초 문법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의 음악들이 과거 나이트클럽과 영화관을 개조해 지금의 모습이 된 명화라이브홀의 역사와 잘 맞아떨어졌다.

‘이진법만으로도 온 세상을 표현할 수 있다.’ 1970년 서독 뒤셀도르프에서 결성된 ‘크라프트베르크’(Kraftwerk)는 컴퓨터와 전자 시대의 혁명을 이끈 위 명제를 소리로 증명해 온 팀이다. 랄프 휘터(80)와 고(故) 플로리안 슈나이더를 주축으로 결성된 이 팀은 전 세계 전자 음악계의 지형을 바꾸고 이 장르의 대중화를 본격적으로 이끈 그룹으로 꼽힌다. 2014년 그래미 어워드 평생공로상을 수상, 202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부문 중 음악사를 뒤바꾼 ‘개척자’에 헌액됐다.

지난 4일 오후 8시 서울 명화라이브홀에서 열린 크라프트베르크의 내한 공연은 그 진가를 제대로 증명한 자리였다. 대표곡 ‘넘버스’(Numbers)와 ‘컴퓨터 월드’(Computer world) 메들리로 공연 포문을 열어제친 첫 등장부터 마지막곡 ‘더 로보츠’(The Robots)까지, 멤버들은 총 21곡의 대표곡을 통해 다채로운 전자음의 향연을 펼쳐보였다. ‘멀티미디어 투어’란 수식어가 붙은 공연 답게 매 곡마다 주제 의식이 뚜렷하고, 전자음과 배경 영상이 긴밀하게 조응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우주를 유영하는 우주선 영상에 맞춰 신비로운 울림감을 지닌 전자음들을 펼쳐 보인 노래 ‘스페이스랩’(Spacelab)의 순간이 대표적이었다. 멤버들은 공연 도중 한반도가 뚜렷하게 보이는 지도 좌표와 ‘크라프트베르크’란 영문명이 크게 적힌 공연장에 우주선이 착륙하는 모습을 띄운 무대 영상으로 큰 관객 함성을 끌어냈다.

독일어로 ‘발전소’란 뜻의 팀명처럼 대부분 음악의 주요 핵심 주제는 ‘현대 문명’과 ‘기계화’였다. 2020년 슈나이더를 떠나 보낸 후 유일한 원년 멤버로 남은 랄프를 비롯해 헤닝 슈미츠, 팔크 그리펜하겐, 게오르크 봉가르츠 등 4명의 현 멤버들은 온 몸을 로봇처럼 보이도록 네온 조명을 부착한 슈트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매 무대마다 멤버들의 서는 자리가 고정되기로 유명한 팀인 만큼 이날도 어김없이 1번 자리는 랄프의 차지. 멤버들은 가상악기가 설치된 노트북과 마스터 키보드를 즉석에서 초 단위로 조정해 가며 기발한 전자음들을 쌓아올렸다. 리더 랄프는 특히 얼굴에 부착한 헤드셋 마이크와 보코더(목소리 변조에 쓰이는 장치)를 통해 숫자나 짤막한 단어를 기계 같은 목소리로 반복해 읇조리거나 가쁘게 몰아쉬는 숨소리를 가미했다. 일반 음악에선 가사로 활용되는 문자 단어조차 이들의 음악에선 전자음의 한 요소처럼 활용됐다.

/윤수정 기자4일 오후 서울 명화라이브홀에서 개최한 약 7년 만의 내한 공연에서 한국 지도를 배경 영상으로 쓴 독일의 전설적 전자음악그룹 크라프트베르크. 현존하는 클럽과 전자음악들의 기초 문법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의 음악들이 과거 나이트클럽과 영화관을 개조해 지금의 모습이 된 명화라이브홀의 역사와 잘 맞아떨어졌다.

가장 압권은 프랑스의 유명 자전거 경주 대회 ‘투르 드 프랑스’(Tour de France)와 동명의 제목을 달고 대회 중 풍경을 전자음에 담아낸 시리즈 음악들을 선보일 때. 경기 중 긴장에 찬 선수들의 숨소리를 보코더에 직접 불어넣으며 생생하게 재현하고, 이들을 따라붙는 중계 카메라의 시선까지 긴박감 넘치는 전자음 비트로 치환한 음악적 상상력이 장내 감탄을 자아냈다.

달리는 유럽 열차를 그린 ‘Trans-Europe Express’에선 기차가 플랫폼으로 들어오는 순간과 ‘철컹철컹’ 거리는 선로의 이음새 소리를 표현하는 멤버들의 세밀한 전자음 강약 조절이 돋보였다. 고속도로 풍경을 담아낸 이들의 히트곡 ‘Autobahn’에선 미니 벤틀리 차량이 고속도로를 한참 달리다 출구로 빠져나가기까지의 장면들이 통째 청각으로 치환됐다. 차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 ‘빵빵’거리는 경적 소리, 옆차를 지나쳐 가는 소리, 라디오 트는 소리 등이 가미될 때마다 관객들은 마치 무성영화에 전자음악을 입히는 현장을 직관하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이날 약 2시간의 공연 동안 멤버들이 관객에게 말을 건 순간은 딱 한번 뿐이었다. 자신들과 동시대 유명 전자음악 밴드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의 멤버이자 피아니스트로 활약했던 고(故) 류이치 사카모토를 추모한 순간이었다. 사카모토의 대표곡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런스’(Merry christmas Mr. Lawrence)를 차분한 전자음으로 선보인 이들은 연이어 ‘라디오액티비티’(Radioactivity)를 연주했다. 멤버들이 직접 “사카모토는 우리의 오랜 친구였고, 2012년 이 곡의 일본어 가사를 직접 써줬다”고 소개한 이 노래는 원전 사고에 대한 경각심을 전자음악으로 풀어낸 곡이다. 멤버들은 ‘해리스버그’ ‘셀라필드’ ‘체르노빌’ ‘후쿠시마’ 등 방사능 유출 사고를 겪은 도시명들을 전자음 목소리로 읇조리며 노란색 원전 경고 표지판을 무대 배경 영상을 띄웠다. 원폭 순간을 표현하듯 무대 조명이 섬광처럼 점멸하는 가운데 모스 부호와 라디오 주파수를 닮은 금속성 전자음이 마치 원전 사고를 경고하는 경고음처럼 공연장을 울렸다. 관객들은 “이젠 멈추자, 방사능!”을 영어로 반복해 외치는 가사를 한 목소리처럼 크게 떼창했다.

이날 공연장은 입석과 좌석이 섞인 1600석 규모로 운영됐다. 예매 초기부터 전석이 빠르게 매진됐고, 20대(39.2%)와 30대(38.7%)가 관객이 주축을 이뤘다. 그룹이 활동하던 시기 태어나지도 않은 젊은 층 관객이 예매 비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이다. 이날 공연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KTX를 타고 올라왔다는 임지현(28)씨는 “중학생 때부터 이미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크라프트베르크의 노래를 접했다”며 “특히 디자인 관련 직업을 갖고 있기에 이들의 음악과 특히 무대 장치, 연출 하나 하나에서도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윤수정 기자4일 오후 서울 명화라이브홀에서 약 7년 만의 내한 공연을 개최한 독일의 전설적 전자음악그룹 크라프트베르크. 현존하는 클럽과 전자음악들의 기초 문법을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이들의 음악들이 과거 나이트클럽과 영화관을 개조해 지금의 모습이 된 명화라이브홀의 역사와 잘 맞아떨어졌다. 멤버들은 이날 명화라이브홀의 외관 모습을 공연 배경 영상에 활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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