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욘세 무대에서 타자의 거울로...경계 없는 에스 데블린의 연금술

서정 2026. 5. 5. 18:06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arte] 서정의 어쩌면 나만 아는 명작들
무대 미술가·공연 연출가를 넘어 현대미술가로
에스 데블린의 예술 세계
오는 8월 서울 북촌서 전시 예정

보르헤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복수나 용서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망각만이 유일한 복수이며 유일한 용서이다.” 「바벨의 도서관」의 그 보르헤스라는 점이 중요하다. 망각의 이면은 기억이기에 영화 <인터스텔라> 테서렉스 구조가 바로 저러한 보르헤스의 ‘기억’ 이미지를 통해 나왔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다. “인간이 만든 다양한 도구 중에서 가장 놀랍고 굉장한 것은 당연히 책이다. 그 나머지는 인간의 육체를 확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력을 확장한 것이며 전화는 목소리를 확장한 것이다. 그리고 쟁기와 칼은 팔을 확장한 것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은 기억과 상상을 확장한 것이다.” 책으로 기억을 펼치고 기억으로 상상을 그리는 세계가 여기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가 에스 데블린이 2025년 4월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브레라 미술관 중정에 설치물로 <빛의 도서관(The Library of Light)>을 선보였을 때 우리는 시간의 제약 속에 기억을 붙드는 보르헤스의 꿈을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데블린은 지름 18m의 조형물 안에 책 삼천이백 권을 넣었는데 이 회전형 서가는 낮에는 거울처럼 반사되고 밤에는 자체가 조명이 되어 빛을 발했다. 데블린에게 도서관은 집단의 기억이 서로 공명하며 확장되는 공간이었다.


정서로 공명하며 메시지를 전달하다

가수들의 콘서트 무대를 디자인하고 럭셔리 패션 하우스의 쇼를 꾸미는 일은 산업의 영역이라 할 수 있을까, 예술의 영역으로 볼 수 있을까. 대대적으로 자본이 들어가는 소위 ‘규모의 작업’의 경우 산업과 예술의 경계 언저리에서 정체성 탐색이 조심스럽게 이루어지기 마련인데 에스 데블린이라면 이제는 ‘무대미술가’라든가 ‘공연 연출가’라든가 하는 말을 뛰어넘어 현대 미술 전반을 아우르는 예술가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수준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주문 제작과 자율 창작의 범주를 넘나들며 미디어를 동원하고 메시지를 전달하는 능력은 이미 검증 단계를 지났다.

에스(에스메랄다) 데블린은 런던 태생으로 브리스톨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클래식 음악에도 조예가 깊다) 런던 예술대학(UAL)의 센트럴 세인트 마틴에서 공부하던 중 무대·의상 디자인 교육 프로그램인 모틀리 시어터 디자인 코스에 참여하면서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1990년대 실험 연극을 올리는 소극장 무대에서 출발한 그녀의 작업은 언어와 음악, 디자인의 물성에 대한 종합적인 이해를 기반으로 더 넓은 분야로 뻗어나가 런던의 로열 오페라 하우스(<살로메>), 바비칸 센터(<햄릿>),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오셀로>), 오스트리아 브레겐츠 페스티벌(<카르멘>) 등의 무대를 꾸미고 비욘세, 아델, 카니예 웨스트, 레이디 가가, U2 등 유수의 뮤지션들을 위해 월드투어 무대를 설계하며 링컨 센터(<Your Voices>), 국제기구 등 공공 문화 기관과의 협업(<Congregation>), 올림픽 폐막식(2012년 런던)과 개막식(2016년 리우)의 디자인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 어디라도 데블린의 공간은 빛과 시간의 가변적 해석에 기초한다.




함께 경험하고 사유하는 장면을 꿈꾸다

몰입형 전시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보여주는 데블린의 작업은 음악과 빛, 언어와 조각이 관객의 감각으로 침입해 그 시간 그 공간에 머무는 개인이 ‘공동체’(퍼포먼스라는 측면에서 일시적 공동체 혹은 임시 사회로 해석된다)를 경험하게 한다는데 가장 큰 특징이 있다. 연극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한 그녀의 경험은 관객을 ‘장면’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탁월하다.

데블린은 2021년 두바이 엑스포에서 영국관을 ‘Poem Pavilion’이라는 이름으로 꾸몄는데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관람객은 누운 원뿔형 구조물에 입장할 때 특정 단어들을 말하도록 요청되었고 AI는 이를 조합해 시를 지었으며 결과물은 구조물 외관에 조명으로 표현되었다. 무한한 ‘집단 시’가 건축의 주요 요소가 된 기념비적 순간이었다. 그녀가 시어를 띄우는 방식으로 채택한 20m 높이의 LED 파사드는 압도적인 언어 장치로서 비현실적인 신비감을 주는 동시에 그 무엇보다 ‘물성’을 지닌 언어를 체험하게 했다.

나는 타자의 타자다

카사 브라데스쿠(Casa Bradesco)에서 최근 오픈한 상파울루 전시의 타이틀은 <나는 타자의 타자>이다. 데블린은 무대를 정신적 풍경으로 변형시켜왔는데 제목에도 드러나듯 정체성, 타자성, 공존을 재고하도록 관객(이자 행위자)을 이끈다. 전시에서 중요시된 것은 (몰입형인 만큼) 특히 경로인데 관람객은 각 방에서 일정 시간 머물거나 길을 따라 어떤 속도로 걸음으로써 다양한 관점을 체험하게 된다. <Infinite Library>의 공유 지식 풍경을 시작으로 전시는 2022년에 시도되었던 <Come Home Again>의 변주로 이어진다. 런던에서 서식하는 멸종 위기의 생물 250종을 드로잉으로 기록해 테이트 모던 외벽에 설치하고, 여기에 지역 디아스포라 합창단의 목소리를 더해 하나의 풍경으로 엮어냈던 데블린은 다양한 층위의 예술 공동체에서 생태주의를 탐구해온 브라질 예술인들과 협업한다. 작품이 설치되는 공간의 특성, 즉 장소성이 작품의 또 다른 요소로 강하게 작용하므로 유서 깊은 산부인과 병원을 개조한 마타라조 시티에 자리 잡은 카사 브라데스쿠라는 환경은 상파울루 시민들에게 특별한 경험을 선사한다. 데블린의 표현대로 “일시적인 공동체” 경험이다. 무대 안으로 빨려 들어갈 듯한 몰입감이 느껴진다.


하이라이트는 <Mirror Maze>(이 또한 런던의 서머셋 하우스에서 유엔 지속가능 발전 목표를 논하던 2016년 전시의 다른 버전이다)인데 웬만한 4~5층 건물 높이의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설치된 거울 미로를 눈앞에 두고 보면 “작품에 들어갈 때는 임시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데 열려 있어야 합니다.”라는 데블린의 언급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들은 길을 잃고 출구를 찾기 위해 애쓴다. 거울은 실재이면서 은유이기도 한데, 어쩔 수 없이 나르시시즘에 대해 논의하게 되기 때문이다. 다들 본능적으로 셀피-자기 확인의 유혹에 빠지게 된다. 이 집단적 변형의 논리는 처음엔 ‘나’가 서 있는 위치에서 반사되는 ‘또 다른 나’들(반사는 반사로 이어지기 때문에)을 찾느라 정신이 없는데 곧 ‘반사된 나’를 눈에 담는 다른 이들의 모습이 ‘나’의 눈에 담기게 되고 ‘다른 이를 눈에 담는 나’를 또다시 다른 이들이 보게 되는 무한대의 경험 속으로 빠지게 한다. 때문에, 공간에 담기는 사람들은 자기 얼굴을 찾다가 다른 이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게 된다. 다면체 거울들은 반사를 분열시키고 증식시키며, 끊임없이 변이하는 인간 모자이크를 만든다. 데블린은 빛을 단순한 기술 자원이 아니라 실존적 물질로 이해한다. “모든 것은 존재의 서로 다른 단계에 있다. 우리는 햇빛으로 만들어졌다. 여기서 유리는 햇빛으로 만들어졌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당신이 작품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움직이는 빛을 통해 이야기를 전할 것이다. 중심 작품의 거울은 무한한 빛의 도체다. 결코 가만히 있지 않다. 사람이 움직일 때마다 빛이 변한다.”

공간의 물리적 점유가 작품의 중심 요소
니테로이 현대미술관, 코파카바나 해변의 기억
서울에서 떠내려갈 시어

건축과 기술, 연극과 시가 만나는 지점에 에스 데블린의 작품이 있다고 밝혔다. 이와 더불어 지금 ‘나’가 살아가는 공간에서 ‘우리’를 경험하는 것이 궁극의 목표라는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무대든 쇼든 전시든 데블린의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작품의 능동적인 일부가 된다. 브라질인들은 오스카르 니에메예르의 니테로이 현대미술관에서 2016년에 있었던 루이비통 크루즈 쇼와 지난해인 2025년 5월 리우데자네이루 코파카바나 해변에서 벌어진 레이디 가가의 콘서트 (약 250만 명이 모여 여성 아티스트 최대 규모 콘서트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무대 세트 디자인으로 에스 데블린을 강력하게 경험한 바 있었고 이번 카사 브라데스쿠의 <나는 타자의 타자> 전시를 통해 본격 ‘전시’ 예술가로서의 에스 데블린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2026년 8월 서울의 북촌에서 데블린 전시가 계획되어 있다는 소식은 그래서 크나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서정 에세이스트•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