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려 할수록 선명해지고, 넘어서려 할수록 이길 수 없는 그것

아르떼 2026. 5. 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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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신지혜의 영화와 영감
감독 노무라 요시타로의 영화 <모래그릇>
"고독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경의"

두 형사가 시골 마을에 도착한다. 도쿄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 수사차 온 것인데 그들이 쥐고 있는 단서라고는 ‘카메다’라는 말뿐.

사건은 1971년 6월, 신원불명의 사체가 역에서 발견된 것인데 이렇다 할 단서도 없고 목격자도 없어 난감할 따름이다. 멀리까지 출장을 왔으나 손에 쥔 것이 없어 의욕이 앞서는 젊은 형사 요시무라는 아쉬움이 가득하지만 노련한 형사 이마니시는 역시나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렇게 도쿄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유명한 지휘자이자 연주자인 와가 에이료를 보게 된다. 어딘가 우울함이 깃든 얼굴은 이마니시의 어딘가를 자극하지만 그 자신도 그의 주변의 어떤 인물과도 관련이 없는 그이기에 곧 관심을 거둔다.

수사본부는 해체되고 평상수사로 전환되고 이 사건은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묻혀져 가게 되는데 뜻밖의 미세한 단서 아닌 단서가 생긴다. 신문에 ‘종이를 흩날리는 여자’라는 제목의 칼럼이 실렸는데 기차에서 잘게 찢은 흰 종이를 흩날리는 여자를 보고 그 기이하고도 아름다운 장면에 인상을 받아 작가가 쓴 글이다. 요시무라가 그 칼럼을 보고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기사의 주인공이 다카기 리에라는 것을 알게 되고 그녀를 만나러 가는데 그곳에서 와가 에이료를 또다시 보게 되고 잠시 자리를 뜬 리에는 그 길로 자취를 감춰버린다.

그렇게 또 한 번 난항을 겪게 되는가 싶었는데 또 하나의 실마리가 주어진다. 바로 피살자의 신원을 확인해 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젊은 남자는 피살자가 잡화점을 운영하던 미키 겐이치라는 이름의 남자였고 자신의 아버지라고 확인한다. 정확히 말해 그는 미키의 양자였고 아버지가 왜 도쿄에 갔는지는 전혀 모르겠다며 아버지가 얼마나 인자하고 훌륭한 사람이었는지 전하면서 그런 훌륭한 성품의 아버지에게 원한을 품을 사람은 없다고 단언한다.

그 가녀린 실마리를 움켜쥔 채 형사의 감으로 조금씩 움직이던 이마니시는 ‘카메다케’라는 지명을 알게 되고 미키 겐이치가 순경으로 근무했던 서를 찾아간다. 이후 그에 대한 추억담은 온통 미담뿐이다. 그가 얼마나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했는지, 얼마나 다정하고 선했는지... 모든 사람들은 그는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진술한다.

이마니시가 이곳저곳, 사람들을 수소문해 찾아다니며 미키 겐이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요시무라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움직이다가 ‘흩뿌려진 종이 조각’, 아니 정확히 말해 ‘흩뿌려진 천 조각’을 찾아낸다.

그렇게 이마니시와 요시무라는 미키 겐이치의 삶을 천천히 되짚으며 살인자를 추적해 간다.

<모래그릇>.
제목부터 아스라하고 쓸쓸하다. 이 영화는 오프닝 타이틀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고 일러준다. 누군가의 고결하고 훌륭한 삶이 누군가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이야기할 테니 찬찬히 따라오라고 한다. 그리고 누군가의 삶이 얼마나 처절하고 애달플 수 있는지 이야기할 테니 마음 단단히 붙잡고 따라오라고 한다.

오프닝 타이틀을 채우던 소년의 실루엣. 반짝거리는 윤슬을 배경으로 모래로 무언가를 열심히 짓고 있는 소년의 실루엣. 그 실루엣은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멜랑콜리하고 애수가 깃든, 고전 영화의 정서를 담은 멜로디와 함께 마음과 시선을 붙잡는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우리는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누구인가를 알게 되고 그의 가혹하고도 애절한 숙명과 마주하게 되면서 깊은 애통과 연민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는 살인 사건과 수사라는 표면적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조금 더 들여다보면 무거운 운명을 걸머진 가녀린 영혼과 그 영혼을 가엾게 여겨 많은 것을 베풀어 준 누군가의 덕목이 숙연하고도 장중하게 펼쳐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 거센 파도를 배경으로 걷는 부자의 모습이 아련하고도 싸늘하다. 차디찬 겨울 풍경 속에서 갈 곳 없는 두 사람이 서로의 온기에 기대는 모습은 눈물겹고, 설원을 정처 없이 걷는 모습은 탄식을 자아낸다.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에게 아무것도 해 줄 것이 없는 병든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런 아버지가 세상의 전부인 어린 아들의 마음은 또 어떠했을까. 다시 봄이 오고 벚꽃이 아름답게 피었지만 부자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고 이렇게 끝도 없이 걷다가 과연 어디엔가 정착할 수나 있을까 하는 마음이 가련하기만 하다.

무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손수건으로 연신 얼굴을 닦아가며 탐문 수사를 벌이는 이마니시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오랜 형사 생활이 주는 노련함과 느긋함이 빚어내는 날카로운 촉과 성실하게 제 할 일을 하는 모습은 든든함과 미더움을 준다.

이렇게 인물 하나하나가 살아 있고 그 누구의 삶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서사 덕분에 그리고 그 서사를 감싸는 곡 ‘숙명’ 덕분에 우리의 마음은 움직일 수밖에 없다.

마츠모토 세이초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노무라 요시타로가 연출한 작품 <모래그릇>은 워낙 유명하고 감동적인 작품이어서 다섯 차례나 TV 드라마로 만들어졌다. 영화의 서사를 따라가다 보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몇 겹으로 등장하는데 그 깊은 인연과 숙명에 마음을 숙이게 된다.

연출을 맡은 노무라 요시타로 감독은 구로자와 아키라의 조감독으로 영화에 입문했는데 이 작품에 대해 “고독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경의”라고 표현했다. 크고 무거운 숙명을 걸머진 소년에 대한 애틋함과 눈물겨움이 온기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에 퍼져 오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감독의 이 말이 그 모든 감정을 표현해 주고 있다.

영화의 음악은 음악평론가이기도 한 아쿠타가와 야스시가 맡았는데 오프닝 타이틀을 받쳐준 그 곡, ‘숙명’이 후반부 콘서트장에서 연주되는데, 경건하고 침통한 마음을 안고 수사상황을 발표하는 이마니시의 모습과 연주 장면이 교차편집 되면서 천천히 관객의 마음에 스며들며 흔들어 놓는다. 일본에서는 아직도 매년 영상과 음악을 함께 보여주는 <모래그릇> 시네마 콘서트가 개최되고 있다고 하는데 영화를 보고 ‘숙명’을 듣고 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신지혜 칼럼니스트•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