잿더미 곁에서 예술은 도대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르떼 2026. 5. 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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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정연진-오늘의 미술
영천 시안미술관 《불의 씨앗》
재난의 이미지가 소비된 자리에 머무른 예술
그 느리고 조심스러운 태도에 대하여

재난은 화면 속에서 빠르게 소비된다. 불길이 치솟는 장면, 검게 탄 능선, 망연자실한 표정들이 잠시 시선을 붙들다가 다음 소식과 함께 사라진다. 2025년 봄, 경북 일대를 집어삼킨 초대형 산불도 다르지 않았다. 헬기가 물을 뿌리고 ‘진화 완료’ 자막이 뜨던 날, 세상의 관심은 이미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재난은 그날부터 비로소 시작이었다.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이 이전과는 다른 시간을 견디기 시작할 때, 예술은 그 폐허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영천 시안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불의 씨앗》은 그 이후의 시간을 바라보는 전시다. 불길의 한복판을 재현하거나 참혹함을 자극적으로 보여주는 대신, 불이 지나간 자리 곁에 오래 머무르며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묻는다. 어쩌면 그것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라기보다, 무엇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가에 더 가까운 질문이다.

이번 전시가 인상적인 이유는 예술의 역할을 과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술은 산불을 끄지 못하고, 잃어버린 집을 되돌려주지도 못하며, 상처를 단번에 회복시키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나치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는 일, 너무 빨리 의미를 덧씌우지 않는 일, 사라진 것과 남아 있는 것을 오래 바라보는 일. 그 느리고 조심스러운 태도야말로 이 전시가 보여주는 예술의 자리다. 그리고 작가들은 그 역할을 말로만 주장하지 않았다. 직접 현장으로 들어갔고, 발화 지점과 피해 지역을 걸었으며, 불에 탄 나무의 표면을 만졌고, 재의 질감을 손끝으로 확인했으며, 그곳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했다.

전시장에 처음 발을 들이면 '발화'라는 이름의 섹션이 먼저 맞이한다. 이곳은 재난을 기록하는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공간이다. 장용근은 소방관, 기자, 주민이 각기 다른 위치에서 남긴 사진들을 한자리에 펼쳤다. 같은 사건이지만, 어디에 서서 찍었느냐에 따라 사진은 전혀 다른 장면이 된다. 단 한 장으로 재난 전체를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박창모는 산불이 일어나기 전부터 그 지역의 풍경을 꾸준히 기록해온 작가다. 재난 이전부터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작업을 특별하게 만든다. 전과 후를 나란히 볼 수 있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 자리를 미리 기억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심리상담사이기도 한 송혜경은 카메라를 들기 전에 먼저 피해 주민들 옆에 앉았다. 불길이 할퀴고 간 산의 모습은 사진에 담을 수 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면은 어떤 앵글로도 포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기록하기 전에 먼저 곁이 되기를 택했다는 그 태도가 이 섹션 전체가 향하는 방향을 알려준다.

다음 공간인 '터'로 이동하면 현장에 직접 몸을 두는 행위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배태열은 불이 지나간 산을 걸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지 눈으로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발바닥으로 경사를 읽고, 탄 흙의 냄새를 폐 깊숙이 받아들이고, 신발과 옷가지에 재가 쌓이는 감각을 온몸으로 통과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알고 있다. 잿더미를 묻히고 돌아온 사람과 그 화마 속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 사이에는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 불완전한 거리를 감수하면서 걷기를 멈추지 않은 것, 그것이 그의 작업이 갖는 무게다. 고운사를 반복해서 찾아가 주지 스님과 오랜 시간을 함께한 김제원의 작업은 다른 방향에서 같은 물음을 던진다. 상실의 흔적을 빠르게 지워버리고 새것으로 채우는 것이 치유처럼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렇게 서두르면 아직 끝나지 않은 것들이 그 아래에 묻혀버린다. 채우지 않는다는 것이 포기가 아니라 기다림이 될 수 있다는 그의 시선은 이 전시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의 문장처럼 읽힌다.

'재' 섹션 앞에 서면 생각이 잠시 멈춘다. 우리는 흔히 재를 끝이라고 여기지만, 이 공간의 재는 ‘다시’라는 이중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심효선은 숯이 된 나무를 직접 갈아 가루로 만들었다. 그 가루가 캔버스 위에서 다시 산의 윤곽을 이룬다. 생을 다한 나무가 다른 형태로 다시 숲을 이야기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숯은 나무의 끝이 아니라 나무가 다른 언어를 얻은 상태다. 그리고 그 숯은 캔버스 위에 고요하게 머물기만 하지 않는다. 화면 바깥으로 흘러내리며 여전히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한다. 김서울은 동판 위에 부식액을 올리는 동판화를 선보였다. 산(酸)은 금속을 서서히 파고들고, 온도의 변화는 그 속도를 바꾸며, 작가가 예상하지 못한 선들이 표면에 새겨진다. 작가는 환경을 만들지만 결과를 쥐고 있지 않다. 완성했다고 생각했던 지점에서 다시 부식을 시작한다. 산불 이후 고운사가 인위적인 복구 대신 숲이 스스로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한 것처럼 이 작업 역시 시간이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까지 기다리며 완성되었다. 이정민은 산불이 지나간 의성 운암사와 청송 약수터에서 가져온 재와 식물, 물을 빛과 수분에 반응시켜 이미지를 만들었다. 빛을 오래 받으면 흐려지는 것이 보통의 이치지만 그의 작업에서 표면은 오히려 더 깊어진다. 이는 마치 소멸이 아니라 다음을 준비하는 사물의 시간처럼 보인다.

'씨앗' 섹션은 전시 전체의 온도를 가장 잘 설명하는 공간이다. 결과를 알 수 없어도 무언가를 계속하는 행위들이 이곳에 모여 있다. 김승현은 불을 끄는 방법도, 피해를 수습하는 절차도 내놓지 않았다. 비가 내리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도문만을 작품으로 남겼다. 이루어질지 알 수 없으면서도 멈추지 않는 기원, 그것은 무력함이 아니라 불가능 앞에서 인간이 내놓을 수 있는 가장 솔직한 몸짓이다. 문서진은 화마가 쓸고 간 자리에서 마른풀을 모아 종이를 만들고, 그 안에 씨앗을 심어 다시 그 땅으로 돌려보냈다. 그 자리에서 온 것이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순환이다. 종이가 흙으로 돌아가는 사이 씨앗은 움틀 가능성을 품게 된다. 안성환은 나무에 직접 불을 붙이는 소각 행위를 작업으로 삼았다. 화면을 통해 흘러가는 재난 이미지가 아니라, 불의 열기가 피부에 어떻게 닿는지를 신체에 새겨두는 방식으로 기억에 저항한다. 몸으로 겪은 것은 다음 뉴스가 와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곁'에 이르면 이 전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를 만나는 기분이다. 이재호는 불이 지나간 의성과 영덕의 풍경 앞에서 그 장면을 설명하거나 정리하는 대신, 그 앞에 오래 머물렀던 시간의 결을 천 위에 겹겹이 쌓았다. 단순히 풍경을 옮긴 것이 아니라, 그 풍경 곁에서 보낸 시간이 천 위에 결처럼 남은 것이다. 주기범은 같은 산불을 겪었지만 저마다 다른 속도로 이후를 살아가는 여러 장소들의 차이에 주목했다. 빠르게 정리된 곳과 아직 그대로인 곳, 그 차이를 하나의 이야기로 묶지 않고 있는 그대로 두었다. 이세준의 네 개의 캔버스는 완전히 이어지지 않은 채 서로 어긋나 있다. 재난이 지나간 풍경이 깔끔한 하나의 장면으로 봉합될 수 없다는 것을 작품의 구조 자체가 보여준다. 채온은 그을린 나무와 잿빛 땅 앞에서 그 감정을 풀어내거나 정리하려 하지 않았다. 재난 앞에서 느끼는 것들은 때로 언어보다 먼저, 그리고 해석보다 먼저 도착하기 때문이다. 이우수의 가느다란 필라멘트는 서로 엉켜 밑동만 남은 나무처럼 보이기도, 무언가를 안고 있는 둥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있다. 이는 아직 끝나지 않은 숨결처럼 느껴진다.

전시의 마지막 공간인 '다시 봄'은 이름과 달리 화사하지 않다. 계절은 돌아왔지만 땅은 달라져 있다. 윤세영은 허리 위까지 불에 탄 나무들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도 꺼낼 수 없었다. 대신 숯과 푸른 물을 놓아두고, 그것이 천천히 결정으로 굳어지기를 기다렸다. 위로는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천천히 진행되고 있을 뿐이다. 신준민은 회색빛 일색이던 폐허의 풍경 속에서 오히려 더 강렬하고 격정적인 방향으로 붓을 움직인다. 재가 내려앉고 흰 비가 쏟아지며 화면이 서서히 백색으로 가득 차는 과정이 그 안에 있다. 이 백색은 텅 빈 상태가 아니라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기 직전의 상태다. 나무들 사이로 작고 여린 빛들이 돋아난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불의 빛이 아니라, 계절과 계절 사이를 이어주는 생명의 빛으로 변한다. 최선의 검은 천은 액자에 고정되지 않은 채 제 무게로 흔들린다. 화마가 모든 것을 벗겨낸 뒤 남겨진 검은색은 역설적으로 어떤 수단으로도 지울 수 없는 것들의 색이 되었다. 안민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질문 하나를 남긴다. 캔버스 위에서 검은 산을 그었다가 닦아내면 그 아래에서 빛이 스며 나온다. 그것이 산불의 잔상인지, 산이 오랜 시간을 버텨온 끝에 내뿜는 무언가인지는 쉽게 결정되지 않는다. 그 빛 앞에 서 있는 동안, 우리가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산이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찾아온다.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매일 수백 개의 이미지를 보고 흘려보낸다. 재난의 이미지도, 누군가의 상실도, 한때 울창했던 숲의 잔해도. 스크롤은 멈추지 않고, 다음 소식은 언제나 먼저 도착한다. 그 속도 속에서 예술이 하는 일은 어쩌면 아주 단순한 것일지도 모른다. 멈추는 것. 지나치지 않는 것. 잊히기 전에 그 자리에 오래 서 있는 것. 예술은 사회가 빠르게 덮어버리려는 상처 옆에서 가장 느리게 움직이는 목격자이고, 그 느림이야말로 예술이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저항이다. 아무도 보지 않을 때에도 타버린 풍경 곁을 지키고, 소비되고 남겨진 감정들이 사라지지 않도록 형태를 만들어주는 일. 그것이 예술이 이 사회에서 여전히 필요한 이유이고, 예술이 우리에게 남기는 가장 조용하고도 오래가는 물음이다.

정연진 독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