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 천재 가우디'의 죽음은 왜 그리도 조용했는가

아르떼 2026. 5. 5. 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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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유승준의 내 인생의 가우디
가우디는 살아 있다, 노래 속에 내 인생 속에

건축의 성자다운 죽음

2026년은 가우디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작년 말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과 바르셀로나 일대에서는 그를 기리는 다양한 행사가 이어지고 있다. 열여덟 개 첨탑 중 한가운데 자리한 그리스도의 탑은 이미 위용을 드러냈고, 이로써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세계에서 가장 높게 지어진 성당으로 기록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6월 10일이 되면 추모 분위기는 절정에 달할 것이다. 아직 한 번도 공개된 적 없는 주 출입문이 위치한 영광의 파사드가 전 세계인의 기대와 환호 속에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일 년 반가량 이어진 내 글쓰기도 끝이 났다. 마침내 완성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볼 수 있으리라는 설렘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지만, 한편으로 거대한 몬세라트처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와 작품을 나 같은 사람이 섣불리 건드려 무례를 저지른 게 아닌가 하는 죄송스러움이랄까 겸연쩍음이랄까 형언하기 어려운 후회가 밀려든다.

가우디를 만나러 갈 때, 처음 그에 관해 글을 쓰기 시작할 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떻게 살았을까? 나도 그렇게 살 수 있을까?’

가우디를 만나고 올 때, 그에 관한 글쓰기를 드디어 끝냈을 때 나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그는 어떻게 죽었을까? 나도 그렇게 죽을 수 있을까?’

그의 죽음은 갑작스러웠고 당황스러웠다. 말년의 그는 수도사처럼 살았다. 본래 채식주의자였고 소식을 했지만, 그마저도 먹는 둥 마는 둥 할 때가 많았다. 옷은 걸인이라 해도 부인할 수 없을 정도로 누더기에 가까운 옷을 입었다. 저녁 어스름 기도하기 위해 메르세드 성당이나 산 펠립 네리 성당에 가는 것 외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에 있는 자신의 작업실을 벗어나지 않았다. 1926년 6월 7일에도 그는 같은 시간에 산 펠립 네리 성당으로 기도와 고해성사를 하러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란 비아 데 레스 코르츠 카탈란스 거리를 걷고 있던 그에게 전차 한 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30번 전차였다. 기관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가우디도 전차를 보고 급히 피할 거라 여겨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가우디는 평소 전차나 자동차가 사람을 보고 피해야지 왜 사람이 전차와 자동차를 피해 다녀야 하느냐고 말하곤 했다. 그날도 전차가 자신을 보고 속도를 줄이겠거니 생각해 천천히 걸었다. 전차는 가우디를 들이받고 나서야 멈춰 섰다.

황당한 건 그다음부터다. 전차 기관사는 의식을 잃고 쓰러진 가우디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지 않고 철길 옆으로 옮겨 놓은 뒤 그대로 전차를 몰고 가버렸다. 그의 행색이 영락없는 부랑자 노인이었기 때문이다. 행인들이 그를 발견하고 택시에 태우려 했으나 택시 기사들도 피를 흘리며 쓰러진 나이 든 노숙자를 보고 줄행랑을 쳤다. 몇 번이나 승차 거부를 당한 끝에 가우디는 겨우 지나던 경찰의 도움을 받아 산 페드로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여기서도 그는 홀대를 당했다. 정성껏 치료해줘 봐야 돈을 받을 수 없으리라 여긴 의료진이 서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산타 크레우 병원으로 가보라며 그냥 방치한 것이다.

가까스로 산타 크레우 병원 공동입원실 구석 침대에 누운 가우디는 거기서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병원에서조차 그는 행려병자 취급을 받은 것이다. 신분증도 없이 남루한 옷차림에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가우디를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가우디가 예정된 시간이 넘어도 성당으로 돌아오지 않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주임 신부인 길 파레스와 조수인 수그라네스는 그를 찾아 나섰다. 혹시나 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뒤졌으나 가우디를 찾지 못했다. 길 파레스 신부가 그를 발견했을 때 가우디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린 데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상태가 매우 악화해 있었다. 다음 날 아침 가우디의 사고 소식이 바르셀로나 전역에 알려졌다. 사람들은 경악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가 뺑소니에 승차 거부도 모자라 진료 거절까지 당한 끝에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바르셀로나시와 가톨릭교회의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더 좋은 병원으로 옮겨 가능한 치료를 모두 받아야 한다고 채근했으나 가우디는 모든 제안을 단호히 거절했다.

“단지 옷차림을 보고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이 거지 같은 가우디가 이런 곳에서 죽는다는 걸 보여주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저는 가난한 사람들 곁에 있다가 죽는 게 더 낫습니다.”

이렇게 말한 가우디는 치료를 거부하며 신의 곁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가우디다운 결단이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기를 원했던 건축의 성자 가우디는 사고를 당한 지 사흘 만인 1926년 6월 10일 74세를 일기로 미완성 상태인 자기 인생의 건축을 끝마쳤다.

파격과 혁신으로 일관한 삶

바르셀로나의 한 천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바르셀로나의 한 성자가 우리 곁을 떠났다.
돌마저도 그를 위해 울고 있다.

6월 12일, 가우디의 장례식은 스페인 국민의 애도 속에 국가장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치러졌다. 수많은 행렬이 운구차를 뒤따르며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가브리엘 포레의 레퀴엠이 숙연히 연주되는 동안 그의 시신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장되었다.

“Déu meu(나의 하느님)!”

임종을 앞둔 가우디가 사제 앞에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라고 한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졌다.

안토니우스 가우디 코르네트
레우스 출신. 모범적인 삶을 살았고, 뛰어난 장인이었으며, 경이로운 이 교회의 건축가. 74세의 나이로 1926년 6월 10일 바르셀로나에서 경건하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이후로 이 위대한 사람의 재는 죽은 자의 부활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편히 쉬기를 바랍니다.

그가 떠난 뒤 그의 작품은 방치되었고 한동안 건축계는 물론 대중에게도 호응을 얻지 못했다. 1936년 스페인 내전 중에는 작업실이 약탈당했고, 그가 남긴 설계도와 모형 등이 파괴되기까지 했다. 그는 글을 거의 남기지 않았으며 제자들을 기르지도 않았다. 학맥이나 인맥이 있을 리 없었다. 많은 장인이 그와 함께 작업했지만, 그를 닮기도 따라가기도 힘들었다.

그는 그저 화려한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아르누보 건축가, 전통을 중시하는 고전주의의 마지막 건축가 정도로만 알려졌을 뿐이다. 사람들이 그에게 비로소 주목하기 시작한 건 1950년대 이후였다.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는, 자연과 인간과 전 우주를 담아낸 그의 독자적인 건축에 사람들은 점점 매료되었다. 1984년에는 구엘 공원, 구엘 저택, 카사 밀라, 2005년에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카사 비센스, 카사 바트요, 콜로니아 구엘 성당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한 건축가의 작품이 이토록 많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다. 20세기 건축에 깊은 흔적과 영감을 남긴 그의 작품들은 르 코르뷔지에를 비롯한 수많은 건축가에게 교훈을 주고 영향을 끼쳤다.

그의 삶은 파격과 혁신으로 일관한 것이었다. 그는 끝없이 생각하고 궁리하고 연구했다. 그리고 타협하지 않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느라 싸움도 많이 했고 세상과도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돈과 명예를 추구하지 않았다. 가치와 의미에 자신을 걸었다. 그는 언제나 신에게 자신의 모든 걸 아낌없이 바쳤으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발적 가난에 동참했다. 전차 기관사나 택시 기사가 그를 빨리 병원으로 옮겼다면, 병원 의료진이 그를 제때 알아보았다면 그는 조금 더 살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그는 그에게 주어진 생의 시간을 여한 없이 불살랐기에 미련을 두지 않고 사람들과 세상에 경종을 울리며 신의 곁으로 다가갈 수 있었다.

그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이나 많은 것을 남겼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지하에 누워 지금도 세상의 건축을 지휘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에게 묻는다. 가우디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러나 가우디는 이렇게 되물을 것이다. 당신은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왜 그 방법밖에 없냐고. 왜 정확히 하지 않고 적당히 하려고 하냐고. 당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 동안 당신은 무엇을 얼마나 쌓아 올렸느냐고.

알란 파슨스 프로젝트의 ‘La Sagrada Familia’를 듣는다. 바르셀로나에 가고 싶을 때마다, 가우디가 생각날 때마다, 그의 건축물에 발을 들여놓고 싶을 때마다 이 노래를 듣는다.

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지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길에서 만날지 누가 알겠어요?
우리가 여행 중에 만날지 누가 알겠어요?
용감한 사람이 감히 갈 수 있는 한 가장 밝은 별을 따라가세요.
용감한 사람이 도전하는 곳까지 가장 밝은 별을 따라가세요.
그곳에 도착하면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요?

유승준 작가
[The Alan Parsons Project - La Sagrada Famili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