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사위원단 퇴진, 관객 투표로 대체… 정치 휘말린 '미술계 올림픽'
이스라엘·러시아 보이콧 논란 끝 파행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엔 '황금사자상'이 없다. 본전시(110팀)와 국가관(100개국) 출품작에서 각각 최우수작을 선정해 9일(현지시간) 이탈리아 베네치아(베니스)의 주 전시장 자르디니 공원에서 발표할 심사위원 5명이 전원 사퇴했기 때문이다. '전쟁 가해국' 이스라엘과 러시아의 대회 참가 여부를 두고 심사위원단, 베니스비엔날레 재단, 당사국과 이탈리아 정부, 유럽연합(EU)의 입장이 엇갈린 결과다. 세계 최대 현대미술 행사로 '미술계 올림픽'으로 불리는 베니스비엔날레가 정치적 갈등에 휘말려 파행을 겪게 된 것이다.
이스라엘·러시아 보이콧 두고 균열

5일 외신을 종합하면 격년 행사로 올해 61회를 맞는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에 정치적 암운이 드리운 건 지난 3월. 행사 주최기관인 재단이 러시아관 개관을 허용한 것. "이탈리아가 인정하는 국가라면 행사 참가를 막을 권한이 없다는 것이 재단의 일관된 입장"이라는 설명이 따랐다. 러시아는 2022년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러시아의 비엔날레 참가 반대 여론이 높아지자 그해는 참가 계획을 철회하고 2024년엔 볼리비아에 국가관을 빌려주는 형식으로 불참해왔다.
러시아 복귀 결정에 EU와 우크라이나는 즉각 반발했다. EU 집행위원회는 EU 회원국 및 소속 기관은 대러시아 제재에 동참해야 한다고 강조했고, EU 22개 회원국 문화·외교 장관은 재단에 서한을 보내 결정 재고를 촉구했다. 러우 전쟁에서 우크라이나 편을 들어왔던 이탈리아 정부도 재단 결정을 비판했다. 재단은 러시아관을 정식 개막일 전 프리뷰 기간에만 열도록 하겠다는 타협안을 내놨지만, EU는 재단이 이런 결정에 납득할 만한 소명을 이달 안에 내놓지 않으면 200만 유로(약 34억5,000만 원) 보조금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압박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심사위원단이 궐기했다. 5인 위원 명단이 발표된 다음 날인 지난달 22일 성명을 내고 "국제형사재판소(ICC)로부터 반인륜적 범죄 혐의로 기소된 지도자가 있는 국가의 예술가들에게는 상을 수여하지 않겠다"고 발표한 것. 사실상 이스라엘·러시아 보이콧 선언이었다.
저자세인 러시아와 달리 이스라엘 정부는 "반이스라엘적 정치 세뇌"라며 대놓고 반발했다. 이번 대회 이스라엘 대표 작가인 벨루-시미온 파이나루는 여론전 선봉에 섰다. 뉴욕타임스 인터뷰에선, 출생국 루마니아에서 2차대전 때 아버지가 교수직을 박탈당하고 3년간 강제노동을 했던 과거를 언급하며 "내게도 이런 차별이 일어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고 했다. 친이스라엘 성향인 이탈리아 내각도 호응했다. 알레산드로 줄리 문화부 장관이 파이나루와 1시간가량 통화하며 위로하고 비엔날레 개막 후 면담을 약속했다. 심사위원단은 결국 지난달 30일 "22일 발표한 성명에 따라서 사임한다"는 짧은 입장을 냈고, 재단은 곧바로 사표를 수리했다.
재단 "올해는 관람객이 수상작 선정" 파격

이런 소동엔 이탈리아 내부 정치 상황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탈리아 정부가 러시아의 비엔날레 복귀에 표면적으로 반대하면서도 실력행사에 나서지 않은 것을 두고 집권 우파연합 일원인 '동맹'의 친러 성향이 작용했다는 분석이다. 실제 집권당 이탈리아형제들 소속인 조르자 멜로니 총리나 줄리 장관은 재단의 러시아관 개관 결정을 비판했지만, 연정파트너 '동맹' 수장인 마테오 살비니 부총리는 재단을 두둔했다. 한편에선 재단 이사장인 피에트란젤로 부타푸오코가 멜로니 총리의 측근이라는 점을 들어, 재단이 '정치와 예술은 분리한다'는 기조에 따랐을 뿐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재단은 심사위원단 퇴진 당일 올해 시상 제도와 운영규칙을 변경하겠다고 발표했다. 황금사자상, 은사자상 등 심사위원상 대신에, 전시 참석자들의 투표로 본전시와 국가관 전시에 각각 '관람객 사자상'을 수여하겠다는 것. 당초 개막일에 진행되던 시상식도 폐막일인 11월 22일로 연기된다. 재단은 "이번 조치는 개방성, 대화, 모든 형태의 폐쇄나 검열 거부를 바탕으로 하는 비엔날레 창립 정신과 일치한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베니스비엔날레 미술전은 예술의 상품화·서열화에 항의하는 68운동 여파로 1968년부터 1984년까지 시상 제도를 폐지한 적이 있지만, 출품작 심사를 관객에게 맡기는 건 전례 없는 일이다. 엄정한 심사위원단 구성은 이 대회에 권위를 부여해온 핵심 요소라는 점에서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수상작 선정 과정이 자칫 작가나 국가의 동원력에 기댄 인기투표로 전락하거나 정치적 팬덤 대결로 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훈성 기자 hs0213@hankookilbo.com
Copyright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다이소 물건 이름도 읽어요"… 8살에 처음 한글 뗀 다문화 아이들-사회ㅣ한국일보
- "이재명 강력범죄 연루" 모스 탄, 미국 내 발언 '공소권 없음' 종결-사회ㅣ한국일보
- '광주 도심서 여고생 살해' 20대, 범행 11시간 만에 긴급 체포-사회ㅣ한국일보
- 대낮 공원서 2세 아이 '묻지마 폭행'… "어린이날 악몽"-사회ㅣ한국일보
- "'선거의 여왕'도 판세 걱정" 박근혜 만난 추경호·이철우... 보수 결집 시동-지역ㅣ한국일보
- 가정폭력 3번 신고…이혼 한 달 만에 전처 살해 후 투신한 60대-사회ㅣ한국일보
- 김희철, 건강 이상으로 '아형' 하차? 직접 입 열었다-문화ㅣ한국일보
- 삼성·LG 합쳐도 못 따라가는 화웨이…창업자가 스파이 취급 받는 이유는-경제ㅣ한국일보
- "아기가 39도 고열" 순찰차 문 두드린 남성… '5분의 기적' 일어났다-사회ㅣ한국일보
- 국힘도 민주당도 싫다...2030이 '무당층' 되는 동안 정치가 놓친 것들 [지선 D-30]-정치ㅣ한국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