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형철 칼럼] 북한 8년만의 방한… 남북이 ‘비난’만 해서 살 수 없다
전쟁직전까지 악화된 남북 관계 해빙 신호탄 관심
극적인 포옹· 화려한 합의보다 묵묵한 신뢰가 우선

| 서울=한스경제 최형철 대기자 | 8년 만이다. 북한 선수단이 2018년 12월 국제탁구연맹(ITTF) 인천 월드투어 그랜드파이널스 이후 다시 남쪽 땅을 밟는다. 평양 연고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챔피언스리그 출전을 위해 오는 17일 수원을 찾는다. 선수 27명, 스태프 12명. 총 39명의 방문단이 베이징을 경유해 인천국제공항에 내린다. 내고향축구단은 평양에 연고를 두고 2012년 창단했다. 20일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FC위민과 4강전을 치른다. 일회성 이벤트라 치부하기엔, 이 장면이 품고 있는 무게가 예사롭지 않다.
2019년 이른바 '하노이 노딜' 이후 전쟁이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남북관계에 해빙의 마중물로 이어질지 주목된다. 남과 북은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이전까지는 당국·민간 차원의 교류를 활발히 추진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과 그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는 한반도기를 휘날리며 공동 입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노이 노딜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고 코로나19 팬데믹이 겹치면서 교류가 단절됐다. 특히 윤석열 정부 때는 막무가내 공세적 대북정책으로 악화일로를 걸어왔다. 그 결과 지금까지 모든 남북교류가 차단된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2023년 12월 30일 남북관계를 '동족 관계' 가 아닌 '적대적 두 국가관계'로 규정했다. 이어 호칭도 '남조선' 이 아닌 '한국' 또는 '대한민국'으로 바꾸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이 주장한 모든 통일 노선을 철폐하며 "조선반도에는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이라는 상호 적대적인 두 국가만이 존재할 뿐"이라고 덧붙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술 더 떴다. 윤석열은 현재 2024년 10월께 평양에 무인기를 투입하는 작전을 지시한 혐의를 받고 있다. 내란 특검팀은 윤석열이 12·3 비상계엄을 선포하기 위한 명분을 만들고자 평양에 무인기를 투입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만약 북한이 무인기를 빌미 삼아 남한을 공격하고, 국지전이 발생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만해도 모골이 송연해진다. 순식간에 남북이 초토화 되는 것은 불문가지다. 2018년 4월 27일 문재인-김정은의 판문점 정상회담 때 성사된 9·19 군사합의도 이미 휴지 조각된 상태다. 전쟁이 발발할 수 있는 최상의 조건에서 윤석열은 무인기를 평양에 보냈다. 남북 공멸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명백한 이적죄다.

무엇이 빗장을 열었을까. 이재명 정부의 대북 기조가 훈풍으로 작용한 것을 먼저 꼽을 수 있다. 실제 이재명 대통령이 북한 영공 무인기 침투 문제에 사과하자, 김정은 위원장의 여동생 김여정 부부장이 "매우 다행스럽고 현명한 처신"이라 평가했다. 김정은이 이 대통령에 대해 "솔직하고 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본다는 언급도 나왔다. 2023년 '적대적 두 국가' 선언 이후 북한이 남한 지도자에게 이런 표현을 쓴 건 전례가 없다.
물론 하루 만에 북한은 다시 강경 태도로 돌아섰다. 한국이 유화적 신호로 해석하자 "허튼소리"이자 "희망에 찬 꿈같은 해석"이라며 일축했다. 전형적인 북한식 밀당이다. 그러나 그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미 있다. 이재명 정부의 통일부도 "북한이 신속하게 입장을 밝힌 것에 유의한다"며 신중하면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내놨다. 무인기 재발 방지를 위한 9·19 군사합의 복원 검토도 이어졌다. 작지만, 대화의 맥락이 형성되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면 한반도의 경색 국면을 가장 먼저 녹여온 것은 언제나 스포츠였다. 탈냉전의 물결 속에서 1990년 남북통일축구대회가 평양과 서울을 오갔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서 남북은 한반도기를 함께 들고 입장했다. 정치가 막힌 자리에서 선수들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지금 수원에서 벌어지는 일도 그 연장선이다. 20일 수원종합운동장의 잔디 위에서 남북 선수들이 공을 다툰다. 경기 결과가 어떻든, 그 장면 자체가 역사다.
전문가들은 이번 방문이 즉각적인 남북 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낮다고 입을 모은다. 북한의 '두 국가 정책'은 여전히 유효하고, 구조적 경색은 단기간에 풀릴 수 없다. 이재명 정부의 접근도 그래서 조용하다. 국가대항전이 아닌 민간 클럽 경기라는 틀을 존중하고, AFC라는 국제기구의 테두리 안에서 행정적 지원에만 집중하겠다는 것이다. 큰 그림보다 선례를 쌓는 전략이다. 첫 단추를 잘 꿰어야 두 번째 단추도 있다. 청와대는 입장문을 통해 "내고향여자축구단의 아시아축구연맹 여자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 참가를 환영한다"며 "정부는 아시아축구연맹, 수원FC 위민과 함께 선수단이 경기를 잘 치를 수 있도록 협조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지금 필요한 것은 극적인 포옹보다 꾸준한 공존을 향한 모색이다. 화려한 합의보다 묵묵한 신뢰 축적이 우선이다. 해빙은 요란하지 않다. 처음엔 작은 물방울 하나가 얼음 끝에서 맺히는 것처럼 시작된다. 남과 북이 평생, 영원히 비난만 해서는 살 수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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