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투자 패러다임의 변화…‘IP 세공사’ 키우자

한겨레 2026. 5. 5.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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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 인사이트 _ Economy insight
CULTURE & BIZ
2024년 9월26일 서울 성동구에서 열린 ‘월드 웹툰 페스티벌’을 찾은 관람객이 웹툰 ‘나 혼자만 레벨업’ 팝업 스토어를 살피고 있다. ‘나 혼자만 레벨업’은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플랫폼이 유통하면서 지식재산권(IP) 몸값을 키웠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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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영화 ‘왕과 사는 남자’가 1500만 관객 고지를 넘어서면서 한국영화 회복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순제작비가 110억원가량인 이 영화에 정부 모태펀드가 51억원을 투자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정부 투자 성과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는 상황이다. 모태펀드는 정부 출자금에 민간 벤처자금을 매칭해 모펀드를 만든 뒤 이를 자펀드에 재출자하는 형태다. 정부 출자금이 종잣돈이 돼서 투자액을 키우는 구실을 한다.

하지만 최근 영화투자 상황은 녹록지 않다. 영화산업이 어려워지면서 정부는 ‘케이(K)-컬처 300조원 시대’라는 기조에 맞춰 시장에 투자금을 제법 많이 풀었다. 영화에만 투자하는 모태펀드 영화계정의 경우 2024년 정부가 325억원을 출자하고 민간 출자액 328억원을 매칭해 총 653억원의 투자액을 결성했다. 2025년에는 정부가 398억원을 출자하고 민간에서 같은 금액을 매칭해 796억원의 투자금을 결성했다. 정부가 종잣돈을 꾸준히 늘려 투자금 규모를 확대한 것이다.

마중물 있는데 물줄기는 줄어

그런데 현장의 온도는 그렇지 않다. 투자 부진으로 펀드가 조성돼도 투자 집행률이 떨어지고, 모펀드에 자금을 댈 민간 위탁운용사(GP)가 나서지 않기도 한다. 2024년 모태펀드 영화계정 결성액의 투자소진율은 36.3%, 2025년에는 10.1%에 불과했다. 물론 7년가량 존속되는 펀드이므로 이후 계속 투자를 집행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투자 집행은 펀드 조성 초기에 이뤄져야 수익률을 제대로 올린다. 이런 영향으로 2025년 상반기에는 영화계정 모펀드에 민간자금을 보태면서 자펀드를 조성할 민간 위탁운용사를 구하지 못하기도 했다.

투자 부진은 개봉 영화 편수로 확인할 수 있다. 2024년 한국 상업영화(순제작비 30억원 이상)는 총 37편이 개봉됐다. 2019년 45편에 비해 크게 줄어든 수치다. 그나마 2024년에는 코로나19 이전에 제작됐던 ‘창고 영화’들이 더해져 이 수준을 유지했다. 2025년에는 상업영화 개봉작이 30편으로 줄었다. 총제작비 기준으로 환산하면 2024년에는 4330억원이 투자됐는데, 2025년에는 2338억원이 투자됐다. 정부 출자금이 늘어났는데도 시장에는 ‘투자할 곳이 없다’는 투자자의 불만과 ‘돈줄이 말랐다’는 제작사의 비명이 공존하는 셈이다.

투자 부진의 원인은 수익률이다. 영화관 관람률이 크게 떨어지면서 예전처럼 ‘흥행 한 방’으로 수익률을 올리는 것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영화진흥위원회의 ‘2025년 한국 영화산업 결산’에 따르면 순제작비 30억원이 넘는 한국 상업영화의 2024년 평균수익률은 -19.3%였다. 2025년에는 이 수치가 -33.1%로 더 떨어졌다.

관객 수로 본다면 2019년 1억1562만 명이던 한국영화 관객 수는 2024년 7147만 명으로, 2025년에는 4358만 명으로 줄었다. 상업영화의 평균 제작비가 이미 100억원을 넘어섰는데, 이 정도의 시장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영화가 다수 탄생하기 어렵다. 그렇다고 줄어든 시장 규모에 맞춰 중저예산 영화로만 대응하는 것은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다. 사람들의 눈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화려한 시리즈에 맞춰 있는데, 상대적으로 ‘저렴한’ 영화로는 경쟁이 어렵다.

기업 지분 투자도 녹록지 않아

일부 제작자는 기업 지분에 투자하는 형태로 투자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영화나 애니메이션 등 콘텐츠 산업에선 작품 단위의 프로젝트 투자가 중심이다. 투자자 입장에선 개별 작품의 흥행 여부만 책임지는 것이 그나마 리스크를 제한하기 쉽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장 흥행력이 떨어지면서 프로젝트 투자로 수익을 올리는 것이 더 어려워졌다. 제작자들은 개별 콘텐츠의 흥행 성패라는 ‘홀짝 게임’에서 벗어나 더 많은 수익을 거두는 구조를 갖추도록 기업에 투자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예컨대 제작사가 우수한 감독과 작가를 전속계약으로 묶어두거나, 제작시스템을 갖추도록 지원한다면 제작사도 투자자도 더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이다. 또 극장 흥행만 겨누는 것이 아니라 웹툰·드라마·굿즈 등 2차 저작물로 확장 가능한 원천 지식재산권(IP)을 보유한다면 다양한 수익을 거둘 수 있다. 투자자 입장에서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를 고르기가 어려우니 장기적으로 다양한 수익을 갖출 수 있는 기업에 투자해달라는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이지만 현실적 장벽이 많다. 현재 벤처투자에서 자금회수의 절반 이상은 기업상장(IPO)을 통해 이뤄진다. 상장을 위해서는 기업이 지속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콘텐츠 제작사는 개별 작품의 흥행 여부에 따라 매출 변동폭이 커서 심사를 통과하기가 매우 어렵다. 수익은 떨어지지만 뛰어난 기술력과 성장성을 가진 경우 상장 재무 요건을 완화해주는 기술특례상장 제도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콘텐츠 기업 가운데 이 제도를 활용하려면 시각특수효과(VFX)나 실감형 기술 등 특수한 기술적 강점이 있거나, 적어도 자체 IP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콘텐츠 기업에 어려운 조건이다.

상장이 어렵다면 인수·합병(M&A)이라도 활발하다면 좋겠지만, 대형 미디어 그룹들이 자체 스튜디오 체제를 구축하면서 중소 제작사 인수도 줄었다. 결국 현 상황을 타개하려면 기업이 IP를 보유할 수 있어야 그나마 기업 투자가 가능하다는 것으로 귀결된다. 극장 흥행이나 방영권 판매 등 1차 수익을 넘어서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은 원천 IP도 훌륭했지만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장하는 과정에서 네이버의 힘이 컸다. 롯데엔터테인먼트

콘텐츠 산업에 이런 예가 없는 것은 아니다. 최근 웹툰과 웹소설에서는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IP 다각화의 예로 많이 거론되는 ‘나 혼자만 레벨업’의 경우 2016년 디앤씨미디어 출판사에서 웹소설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이 작품이 성공하면서 2018년 디앤씨미디어와 전문 제작 스튜디오가 웹툰화를 시도했고, 이 웹툰을 카카오엔터테인먼트의 플랫폼에서 유통하면서 IP 몸값을 키웠다. 웹툰도 성공하자 카카오엔터테인먼트는 주도적으로 애니메이션 판권과 게임 개발권 판매를 도왔다. 원천 IP는 디앤씨미디어 소유지만 자본력과 네트워크를 가진 카카오엔터테인먼트가 IP 컨트롤타워 구실을 하면서 대형 IP로 성공하게 된 것이다.

2018년 문피아에서 낸 ‘전지적 독자 시점’도 웹소설 성공 이후 네이버웹툰에서 웹툰으로 다시 개발해 유통하면서 성공을 이어나갔다. 웹툰이 성공하면서 웹소설 매출도 함께 증가했고, 이후 네이버가 2021년 문피아를 직접 인수해 IP를 확장해나갔다. 원천 IP도 훌륭했지만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확장하는 과정에는 네이버의 힘이 컸다.

이런 성공 뒤엔 특징적인 구조가 있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나 네이버웹툰 같은 플랫폼이 IP 비즈니스의 운영자가가 되어 사업화를 직접 지휘하거나 도왔다는 점이다. 이들은 계약 단계부터 2차 저작권 및 글로벌 판권을 통합 관리하면서 하나의 IP를 프랜차이즈로 성장시켰다. 플랫폼이 사업 주체가 되어 게임, 드라마, 애니메이션 제작사들과 협상하고 수익을 배분한 것이다.

IP사업 컨트롤타워가 있다면

현재 영화나 드라마 업계에는 이런 역할을 하는 사업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개별 제작사는 작품을 만들 역량은 있으나, 이를 게임화하거나 해외 라이선싱을 관리하고 굿즈를 기획할 전문 인력도 자본도 없다. 중소 제작사가 용기 내어 IP를 보유하더라도, 이런 사업을 펼칠 여력이 없어 장롱 속 보석에 그치게 된다. 영화투자 배급사가 이런 역할을 해준다면 좋겠지만, 이들 역시 극장 매출 감소로 새로운 사업 확장에 나서기 힘들다. 드라마 역시 비슷하다. 창작 현장과 자본시장 사이에서 IP를 전문적으로 가공하고 유동화해줄 중간 매개체가 비어 있는 셈이다.

따라서 정부의 지원 방식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모태펀드 출자액을 늘리며 투자를 독려만 하기보다는 IP 수익화를 위한 구조 자체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제작사가 보유한 IP를 체계적으로 신탁받아 관리하고, 이를 상업화해 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문기관, 가칭 ‘콘텐츠 IP 투자관리사’ 같은 사업자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이 기관은 제작사로부터 IP를 신탁받아 글로벌 플랫폼과 협상하는 공공 에이전트이자, IP의 가치를 정밀하게 평가해 이를 담보로 제작자금을 융통해주는 IP 전문은행까지 역할을 확장할 수 있다. 웹소설과 웹툰에서 플랫폼이 했던 역할을 대행하면서 투자금 조달과 자산 유동화까지 하면서 자본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아무리 마중물을 부어도 펌프가 낡으면 물줄기가 약해진다. 지난 30년간 문화산업은 줄곧 같은 펌프를 이용했다. 콘텐츠 산업이 발전하면서 이제는 창작과 제작 지원을 넘어 IP 자본의 정교한 설계로 넘어가는 것이 필요해졌다. 민간에서 어렵다면 공공 재원으로 이 부분을 보완하는 것도 필요하다. 낡은 펌프로 펌프질만 하기보다는 새로운 모터를 다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김윤지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yzkim@koreaexim.go.kr

김윤지 연구원은 한겨레신문사에서 발행한 경제주간지 ‘Dot21’ ‘Economy21’에서 산업부·경제부 기자를 했고,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한국 중소기업의 대기업 종속성과 관련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수출입은행 해외경제연구소에서 정보기술(IT) 산업, 문화콘텐츠 산업, 중소기업 연구를 맡고 있다. 문화산업을 경제학 관점에서 새롭게 접근해 분석하는 글을 연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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