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로 글을 올려봐, 브라질에서도 읽을 거야

엑스(Xㆍ옛 트위터)에서 자동번역 기능이 출시되고 며칠 뒤 이런 글이 올라왔다. “와··· 자동번역 생기니까 문화의 벽이 허물어지는 정도가 아니라 자다 일어나서 거실 나가니까 이탈리아 아저씨랑 인도네시아 아줌마가 우리 집 냉장고 뒤지고 있는 느낌임. 누구세요?” 이 게시물에 이탈리아어 댓글이 달렸다. “냉장고 뒤를 청소하는 걸 추천해, 거기 온통 쓰레기야.” “우리는 너한테 김치 먹으러 왔어”라는 글은 러시아어로 달렸다. 누군가는 영어로 물었다. “너 바비큐 소스 어디 있어?” 모두 별도의 조치 없이 한국어로 볼 수 있었다. 엑스의 ‘자동번역’ 기능이 불러온 풍경이다.
지난 3월30일 니키타 비어 엑스 제품 책임자는 자신의 계정에 이런 글을 올렸다. “당신의 언어로 글을 올려보라. 당신의 문화와 일상을 게시하고 당신의 국가가 다음 대세가 되게 하라.” 이어서 ‘사상 최대 문화 교류가 방금 출시됐다’라고 밝혔다. 한국의 엑스 사용자들이 이 말을 체감한 건 일주일 뒤였다. 몇 개 국가에서 시범적으로 적용되던 엑스의 자동번역 기능이 4월7일 전 세계에 적용됐다. 이 역시 엑스를 통해 알려졌다. “우리는 X에서 모든 언어의 게시물을 전 세계적으로 도달할 수 있도록 자동번역을 전 세계적으로 출시하고 있다.” 어딘가 기계 번역 투를 연상하게 하는 이 글의 원문은 당연히 영어다.
다른 소셜미디어와 마찬가지로 엑스에도 이전부터 번역 기능이 있었다. 다만 전에는 ‘번역’ 버튼을 눌러야 비로소 기능이 실행됐다면 이제 기본값이 됐다. 어떤 언어로 작성된 게시물이든 사용자는 별도의 조작 없이 자신이 설정한 언어로 내용을 읽을 수 있다. 물론 번역 기능을 꺼놓을 수도 있다. 엑스는 지난해부터 기존 ‘구글 번역’ 기능을 단계적으로 축소하고, 자사 AI인 그록(Grok) 기반 번역으로 전환했다. 그록은 엑스의 소유주 일론 머스크가 설립한 xAI가 개발한 챗봇이다. LLM(거대언어모델)을 기반으로 문맥을 파악하고 말투와 의도, 뉘앙스를 살리는 데 강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클릭 단 한 번이 사라졌을 뿐인데, 플랫폼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동번역은 단순한 편의 기능을 넘어 언어 장벽을 허무는 ‘디지털 바벨탑’에 비유되기도 했다. 엑스의 월간 활성이용자 수(MAU)는 약 5억5000만명으로 추정된다. 이제 한국어로만 글을 올려도 전 세계를 향해 메시지를 던지는 구조가 됐다. 한글과컴퓨터 창업자인 이찬진 전 포티스 대표는 자신의 엑스 계정을 통해 “트위터에서 X로 바뀐 이후 지금까지의 변화 가운데 가장 큰 혁신으로 보인다”라고 평가했다.
엑스의 자동번역 도입 직후 국내에서 가장 주목받은 사용자는 뜻밖에도 이재명 대통령이다. 4월10일 이 대통령이 이스라엘 방위군(IDF) 관련 영상을 공유하며 “우리가 문제삼는 위안부 강제, 유태인 학살이나 전시 살해는 다를 바가 없습니다”라고 올린 엑스 게시물에 2주 동안 댓글 3900여 개가 달렸다. ‘서울에 있으면서도 영혼을 지니고 있어서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란의 사악한 정권이 수천 명의 평화 시위대를 살해하고 고문한 것에 대해 언급하고 비난한 적이 있나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같은 댓글이 다양한 언어로 올라왔다. 이에 대한 이스라엘 외무부의 규탄과 이 대통령의 재반박, 한국 외교부의 유감 표명 등이 모두 엑스 안에서 이뤄졌다.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마저 바꿀 것”
최근 엑스 타임라인에는 미국·일본·인도네시아·인도·튀르키예·브라질 등 엑스 이용자 수가 많은 국가의 게시물이 자주 노출된다. 직접적으로 전 세계 가입자를 대상으로 한 글도 눈에 띈다. 한 러시아어 사용자가 “집마다 비닐봉지를 모아두는 ‘비닐봉지 봉투’가 있는 건가, 아니면 러시아만의 특징인가”라고 묻자, 여러 나라 이용자들이 “우리도 그렇다”라며 사진을 공유했다. 각국의 일상이 자연스럽게 비교되면서 공감대가 형성됐다. 한 이용자는 자동번역을 통해 발견한 세계의 공통점으로 ‘여성들이 처한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동그란 틴 케이스 통은 반짇고리’ ‘여기를 X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등을 꼽기도 했다. 이 밖에도 자신의 반려동물을 전 세계 사용자들에게 소개하거나,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해달라는 요청에 여러 나라에서 응답이 이어지는 등 국경을 넘는 상호작용이 늘고 있다. 사용자들은 어떻게 하면 자신의 글이 전 세계에 닿을 수 있을지, 혹은 그 반대일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엑스 사용자들은 2차 가공을 거치지 않은 여론을 직접 마주하게 됐다. 전쟁과 재난, 사회문제를 둘러싼 정보는 그동안에도 SNS를 통해 공유돼왔지만, 전달 속도와 범위가 한층 더 확장될 거라는 예견이 나온다. 일본의 후지타 나오야 문학평론가는 〈아사히 신문〉 기고에서 이번 변화가 “우리의 의식과 가치관마저 바꿀 것”이라고 짚었다. 그는 ‘상상의 공동체’ 개념으로 알려진 정치학자 베네딕트 앤더슨을 들어 설명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국민국가’라는 의식이 신문이나 잡지 같은 인쇄 매체를 통해, ‘국어’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된 일체감이라고 봤다. 그러나 자동번역은 이러한 ‘국어’의 경계를 가볍게 넘어, 기존의 민족주의를 넘어선 낯선 타인과의 일체감이나 동료 의식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있다.”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 나라 안에서만 소비되던 논란이 전 세계로 확산될 가능성도 커졌다. 잘못된 정보가 국경을 넘어 더 빠르게 전파될 수 있다는 의미다. 특정 관점에 치우친 인공지능 ‘편향’ 문제도 심화될 수 있다. 언어를 초월한 교류가 오히려 ‘자국 우선’의 기치를 높일 거라는 전망도 나온다. 이미 한국과 일본 사용자 간 영토분쟁을 둘러싼 시각 차이가 상호 비난으로 이어진 사례가 있다. 2002년 네이버가 선보인 ‘인조이재팬(Enjoy Japan)’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다. 한·일 월드컵 당시 양국 간 교류를 강화하기 위해 실시간 번역 기능을 제공했지만, 역사 논쟁의 한복판에 놓이면서 혐한·혐일의 장이 되었다.
번역의 한계도 있다. 그록은 단어 대 단어를 대응시키는 방식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구글 번역에 비해 약어와 이모티콘, 밈과 같은 SNS 특유의 표현을 비교적 자연스럽게 풀어낸다는 평가를 받지만 그래서 오히려 맥락을 잘못 짚었을 때 더 큰 오역이 발생할 수 있다. 특히 주요 인사의 정치적 발언이 확산될 경우, 톤과 맥락이 왜곡되면 외교 문제로 비화될 가능성도 있다. AI 번역의 위험성은 그록만의 문제가 아니다. 얼마 전 KBS가 달 왕복 우주선 아르테미스 2호 발사 생중계 도중 항공우주 분야 전문용어 “Roger, Roll, Pitch(수신 확인, 기체 좌우·상하 자세 조정이라는 뜻)”를 “로저, 굴러, 이 X아”로 번역해 노출한 사고가 있었다. AI 자동번역에서 발생한 오류 때문이었다.
트위터 시절 엑스는 중동에서 ‘아랍의 봄’이 일어났을 때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고,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LivesMatter)’나 미투(#MeToo) 같은 운동의 확산에도 기여했다. 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1기 재임 당시 그의 ‘의식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플랫폼 역할을 했다. 미국 기술 저널리스트인 커트 와그너는 책 〈트위터 X〉를 통해 “트위터를 운영하는 것은 전 세계적 발언에 관해 어마어마한 권력과 통제력을 행사한다는 뜻이었다”라고 밝히기도 했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엑스의 시도는 이어지고 있다. 한 엑스 이용자는 자동번역 도입의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했다. “번역을 해줄 테니, 이제 전 세계인과 쌈박질하면서 트래픽을 늘리거라!”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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