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감사원 제보 닷새 만에 노출된 제보자 신원···“국가 믿은 대가, ‘신뢰 파탄’ 증거로 돌아왔다”

김찬호·김지혜 기자 2026. 5. 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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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센트 비디오에 공개된 <용감한 소방차 레이 시즌2> 중국어판 화면. 왼쪽에는 ‘출품인(出品人)’으로 왕초황이 표기돼 있고, 한국 원작자·제작사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 아래에는 광둥성 애니메이션 심의 등록번호가 표시돼 있다. 심수진씨 제공

감사원이 피감 기관인 한국교육방송공사(EBS)의 저작물 부실 관리 의혹을 담은 제보문건을 제보자 이름, 지위 등을 고스란히 노출한 채 EBS에 전달한 것으로 확인됐다. 문건을 넘겨받은 EBS는 이를 제보자와 벌인 민사소송에서 ‘신뢰관계 파탄’을 주장하는 증거로 사용했다. 제보자 보호 제도에 구멍이 뚫렸다는 지적이 나온다.

4일 취재를 종합하면, 애니메이션 <용감한 소방차 레이> 원작자 심수진씨는 2023년 8월25일 감사원에 EBS의 ‘저작물 관리 부실’을 제보했다. 정부·공공기관 지원금 14억원이 투입된 <용감한 소방차 레이 시즌2>가 해외에서 중국 업체 제작물로 둔갑해 유통되고 있음에도, 방영·사업권자인 EBS가 이를 방치했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감사원 접수 닷새 후에 심씨의 이름 등이 담긴 제보 문건이 EBS에 전달됐다.

약관엔 없는 ‘신원 노출’···그래도 “동의받았다”는 감사원

제보 문건 전달 사실은 심씨가 감사원에 정보공개를 청구해 지난달 20일 받은 답변서에서 확인된다. 감사원은 “2023년 8월30일 제보내용 사실 확인 등을 위해 한국교육방송공사로 보낸 자료요청 문서에 (제보 문건을) 첨부해 발송했다”고 밝혔다. 발송 공문 문서번호(국민제안감사2국제1과-1012)와 문서명(‘감사제보 관련 자료 요청’)도 적시했다. 제보문건이 감사원 공식 절차를 거쳐 피감기관에 송부됐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감사원 관계자는 “제보 접수 단계에서 제보자 신원이 알려질 수 있다는 점에 대한 동의를 받았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감사원이 받았다는 동의는 인터넷 제보 시스템 첫 화면에 등장하는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 안내 동의’다. 약관에는 제보자 신원이 피감기관에 제공될 수 있다는 명시적 안내는 없다. 약관은 ‘개인정보는 소관 업무 수행을 위해 행정기관에서 이용한다’거나 ‘타 시스템 연계 시 이용한다’는 내용으로만 구성돼 있다. 감사원 온라인 제보는 해당 항목에 동의하지 않으면 제보 접수 자체가 되지 않는다.

감사원 홈페이지 갈무리

심씨는 “약관을 꼼꼼히 읽어봤지만 제보자 신원을 통째로 넘기는 데 동의하는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며 “감사원 홈페이지에 ‘공익신고자 보호법 제12조에 따라 공익신고자의 인적사항 공개가 금지된다’고도 적혀 있어 당연히 보호받는 줄 알았다”고 말했다. 실제로 4일 기준 감사원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공익침해행위 신고자 보호’ 안내가 게시돼 있다.

감사원은 이에 대해 “약관상 안내 문구가 두루뭉술하게 돼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며 “다만 공익신고자 보호법의 경우 법제처 해석례에 따라 2023년 11월부터 감사원은 적용 대상이 아닌데 그 이후 홈페이지가 업데이트가 안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감사제보 처리에 관한 규정상 ‘필요 최소한도’ 범위 내에서 신상 정보를 제3의 기관에 넘길 수 있다”고 덧붙였다.

4일 기준, 감사원 홈페이지에는 ‘공익침해행위 신고자 보호’ 안내가 게시돼 있다. 감사원 홈페이지 갈무리

문제는 감사원이 ‘필요 최소한도’ 정보만 제공했는지를 두고도 논란이 제기된다는 점이다. 감사원은 EBS에 보낸 자료를 “원문을 발췌해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심씨는 EBS가 감사원에서 받았다며 민사소송 법원에 제출한 증거(을 제14호증)가 원본과 문구, 구성, 심지어 오탈자까지 일치하는 것을 근거로 들어 원문이 그대로 전달됐다고 말한다. 실제 해당 문건에는 심씨가 감사원 제보서에서 ‘포스트프로덕션’을 ‘포스트프포덕션’으로 잘못 쓴 표현까지 같은 위치에 그대로 남아 있다. 감사원은 제보사실을 확인하는 데 제보자 실명과 지위, EBS와의 관계 등의 정보가 왜 필요한지에 대해서는 구체적 설명을 내놓지 않았다.

심수진씨 제공
제보가 ‘소송 무기’로···“누가 국가 믿고 제보하겠나”

피감기관으로 넘어간 문건은 소송 무기로 둔갑했다. EBS는 심씨가 대표로 있는 원작사 연두세상과의 사용료 지급 청구 민사소송에서 해당 문건을 증거(을 제14호증)로 제출했다. EBS 측 소송대리인은 지난 3월24일 변론기일에서 “을 제14호증은 감사원에서 질의한 것에 대한 답변을 제출하기 위해 제출받은 것이며, 원·피고 간 신뢰관계가 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자료”라고 했다.

감사원은 EBS가 문건을 법정에서 활용한 것을 두고 “안 되는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감사원 관계자는 “사전에 EBS와 협의하거나 동의한 사실이 전혀 없다”며 “EBS에 자료를 보낼 당시 공문에 ‘감사제보 처리 과정에서 제보자가 불이익을 받지 않도록 인적사항 비밀유지 등 개인정보 보호에 유의해 달라’고 명시했고, 문서 접수 및 연계문서 발송 시 비공개·보안설정 등 취급에 주의하라는 문구까지 넣었다”고 밝혔다. 감사원은 제보자가 지난 4월 문제를 제기한 시점에 해당 사실을 인지했고, 후속조치 여부를 확인하고 있다고 밝혔다.

<용감한 소방차 레이> 원작자 심수진씨는 정보공개를 청구해 지난달 20일 감사원으로부터 제보문건이 EBS에 송부됐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 심수진씨 제공

심씨는 “감사원에 낸 제보가 피감기관 손에 들어가 공격 무기로 쓰일 줄은 몰랐다”며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앞으로 누가 국가기관을 믿고 제보를 하겠느냐”고 말했다.

경향신문은 지난 1일부터 EBS에 ‘감사원 공문의 비밀유지·보안설정 유의사항 인지 여부’ ‘해당 문건을 민사소송 증거로 제출한 이유’ ‘감사원 동의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한 입장’ 등을 여러 차례 전화와 문자로 질의했으나 EBS는 답변하지 않았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시민입법위원장 정지웅 변호사는 “감사원은 (개인정보 수집·이용) 동의를 받았다고 하지만 약관에 ‘피감기관에 신원이 노출될 수 있다’는 구체적 고지가 없다면 개인정보 보호법 제15조가 요구하는 ‘명확한 동의’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제보자 실명, 지위 등이 담긴 문건이 피감기관에 넘어가 제보자와의 소송에 활용되는 것은 공익제보자 보호 제도 취지를 정면으로 훼손한 일”이라고 지적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지난 3월25일 해당 사건을 ‘감사원 비공개 제보자료의 피감기관 무단 유출 및 공익침해 의혹’으로 접수해 조사를 진행 중이다.

김찬호 기자 flycloser@kyunghyang.com, 김지혜 기자 kim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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