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연옥’에 갇혀 공포와 굶주림 시달리는 2만여명의 선원들

“바다에 방치된 선원들에게 수년간 도움을 줘왔지만, 이런 경우는 본 적이 없다. 극심한 심리적 압박감으로 공황 상태에 시달리고 있는 선원들은 제발 당장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 애원하고 있다.”
국제운수노조연맹 소속 변호사인 모하메드 아라체디는 호르무즈 해협에 갇힌 선원들에게서 구조 요청 전화가 쏟아지고 있다면서 최근 영국 옵서버에 이렇게 말했다. 국제해사기구(IMO)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이 봉쇄되면서 페르시아만에 갇힌 선박은 2000여척, 선원은 최대 2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은 지난 2월28일 전쟁이 시작된 후 9주가 넘도록 배 안에 고립된 상태다. 지난달 7일 휴전이 성사되면서 전쟁 초기처럼 미사일이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상황은 줄어들었지만, 눈앞에서 선박이 불타는 모습을 봤던 선원들은 여전히 목숨의 위협을 느끼고 있다. 최근 미국 ABC방송과 인터뷰한 선원들은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게 가장 큰 두려움”이라고 말했다. VHF라고 불리는 선박 간 통신 시스템에선 식수와 식량을 요청하는 절박한 신호와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고 애원하는 선원들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흘러나온다고 이 매체는 전했다.
수닐 나이르 인도전국선원노조 위원장은 “대부분 책임 있는 해운사들은 고립된 선박들에 추가 식량과 식수를 공급할 방법을 찾아냈다”며 “하지만 일부 악덕 업체에 소속된 선원들은 몇 주 동안 굶주리며 어려움을 겪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옵서버에 말했다. 선박이 정지해 있는 동안에는 담수화 설비 가동이 어려워 식수조차도 전적으로 보급에 의존해야 한다. 그나마 공급받는 식량도 대부분 통조림 식품에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선원들은 이란이 요구하는 통행료를 지급해서라도 해협을 빠져나가게 해달라고 선주들에게 요청해 왔지만, 해협을 ‘역봉쇄’한 미국이 이란에 통행료를 지불한 선박들의 운항을 막으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일부 선원은 위험을 무릅쓰고 자비로 귀국길에 오르고 있다. 미 공영라디오방송은 이란 코람샤르 항구에 발이 묶였던 한 인도 선원이 7000달러를 빌려 브로커를 고용한 뒤, 이란 영토를 가로질러 이웃 나라인 아르메니아로 탈출한 사례도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선원은 “가족들은 어떻게든 내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바랐다”며 “일단 살아있어야 돈을 더 벌 수 있을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다수 선원에게 배를 버리고 떠나는 것은 불가능한 선택지다. 계약을 이행하지 않고 배에서 이탈하는 선원들은 해운 회사들이 블랙리스트에 올릴 수 있어 향후 취업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부 선원들은 여권을 회사에 압수당한 상태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노조연맹의 해상운영조정관인 존 카니아스는 “멀리서 이 사태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호르무즈 사태를 에너지 위기나 경제 위기로만 보고 있지만, 이는 인도주의적 위기이기도 하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선원들은 식량, 의약품, 연료 등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의존하는 모든 것의 90%를 운송한다. 그들은 이보다 훨씬 더 나은 대우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ABC방송에 말했다.
워싱턴 | 정유진 특파원 sogun7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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