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호르무즈 된 파나마 운하… 美·中 물류 목줄 쥔 ‘해상 톨게이트’ 쟁탈戰

유진우 기자 2026. 5. 5.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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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중남미 5개국과 공동성명
“中 파나마 압박은 주권 침해”
‘물류 숨통’ 초크포인트 전략 자산화
우리 반구(hemisphere)의 자유는 협상 대상이 아니다.

미 국무부, 중남미 5개국과 함께 발표한 대중국 규탄 성명

미국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각) 중남미 5개국과 함께 중국을 정면으로 겨냥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이 사수하겠다고 나선 대상은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좁은 인공 수로 파나마 운하다.

미국 국무부는 이날 볼리비아·코스타리카·가이아나·파라과이·트리니다드토바고와 공동성명을 내고, 중국이 파나마 선적 선박에 “해상무역을 정치화하고 서반구 국가 주권을 침해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을 포함한 이들 6개국은 이어 “파나마는 우리 해상무역 체계의 기둥이며, 부당한 외부 압박에서 자유로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란의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글로벌 원유 공급망이 요동치는 가운데, 조용한 무역 통로였던 파나마 운하가 어느새 미중 패권 다툼의 뜨거운 화약고로 떠올랐다.

미국은 자국 안보와 물류 핵심 길목(choke point·초크포인트)인 파나마 운하 주변에 드리운 중국 영향력을 더는 좌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는 호르무즈 봉쇄 이후 좁은 바닷길 하나가 에너지 권력과 물가 상승률 모두를 흔들 수 있다는 사실을 전 세계가 확인한 직후 꺼낸 카드라는 점에서 의미가 더 크다.

미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 핵심 무대는 운하 전체가 아니라, 양쪽 입구에 자리한 항만 두 곳이다. 파나마 운하 태평양 쪽 발보아(Balboa)와 대서양 쪽 크리스토발(Cristóbal) 터미널이 그 대상이다.

두 항만은 매년 컨테이너를 1000만개 가까이 처리한다. 미국 서부 핵심 관문이자 북미 최대 항만인 로스앤젤레스(LA) 항 연간 컨테이너 처리량(900만 개)과 맞먹는다. 파나마 운하 양쪽 터미널 두 곳이 처리하는 물량이 미국에서 가장 큰 항만에서 1년 내내 처리하는 전체 물동량에 필적한다는 뜻이다. 두 항만은 홍콩 최대 재벌 리카싱(李嘉誠) 가문 소유 CK허치슨(長江和記實業)이 자회사 파나마포츠컴퍼니(PPC)를 통해 1997년부터 운영했다.

30년 가까이 무탈했던 항만 운영권은 지난해 갱신 과정에서 대형 부정 의혹에 휘말렸다. 파나마 감사원은 지난해 7월 운영사였던 PPC가 2021년 25년 운영권을 공개 입찰 없이 연장했다며 위헌 제소했다. 감사원에 따르면 파나마 운하는 막대한 물동량에도 과도한 면세 혜택과 미납 분담금이 겹쳐 파나마 정부에 12억 달러(약 1조8000억 원)에 달하는 누적 손실을 안긴 것으로 드러났다. 파나마 대법원은 올해 1월 30일 1997년 법률 5호와 2021년 갱신 계약이 모두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계약이 PPC에 과도한 특혜를 주고 국가 이익을 침해했다”고 판시했다.

24일 파나마 감보아 항만 인근 운하를 항해 중인 바하마 국적 LNG 유조선 노수마루호. /연합뉴스

표면적으로 보면 파나마 사법 당국이 해묵은 특혜를 근절하기 위해 내린 조치로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중국계 자본을 밀어내려는 미국의 안보 전략이 깊숙이 개입해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했다.

파나마 운하는 미국에 압도적인 전략적 가치를 제공한다. 길이는 약 80km에 그칠 정도로 짧지만, 전 세계 해상 무역 물량 5%가 이 길목을 지난다. 특히 통과 화물 70% 이상이 미국에서 출발하거나, 미국을 향한다. 미국 컨테이너 물동량 40% 이상을 처리하는 핵심 통로다. 블룸버그는 전문가를 인용해 “미국 동부 소비경제, 해군 함정 이동, 아시아와 미국 간 교역이 모두 운하 양쪽 입구에 묶여 있다”고 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1월 취임 연설에서 중국이 파나마 운하를 “운영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통제권을 되찾겠다”고 일관되게 밝혔다.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장관 역시 인준청문회에서 중국계 기업이 항만을 운영하는 상황을 두고 “유사시 중국이 운하 물류를 고의로 틀어막고 미국의 숨통을 조이는 무기로 악용할 수 있다”고 수차례 경고했다. 루비오 장관은 28일 중남미 5개국과 함께 중국의 경제 압박을 규탄하는 공동성명을 주도하며 파나마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논란의 중심에 섰던 두 항만은 현재 홍콩계 CK허치슨 손을 떠나, 파나마 정부가 18개월 임시 운영권을 위탁한 글로벌 해운 1·2위 기업이 운영하고 있다. 덴마크 머스크(Maersk) 자회사가 태평양 쪽 발보아 터미널을, 스위스 MSC 계열사가 대서양 쪽 크리스토발 터미널의 운영을 담당한다. 운하 양쪽 톨게이트 모두 중국 영향권에서 벗어나 서방 진영으로 넘어갔다. CK허치슨은 “법적 근거가 없는 결정”이라고 반발하며 지난 3월 20억 달러(약 3조 원) 규모 국제중재에 돌입했다.

중국도 가만 있진 않았다. 보복은 자국 항만에서 시작됐다. 중국 항만 당국은 ‘파나마 국기를 단 모든 배’를 표적으로 삼아 검사를 강화하고, 일부 선박은 억류하기 시작했다.

파나마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배가 ‘가짜 국적’을 두고 있는 나라다. 해운업계에서는 이를 편의치적(便宜置籍)이라고 부른다. 쉽게 말해 선박계 조세피난처로 생각하면 된다. 파나마는 물류가 생명줄인 국가라 선박 관련 세금이 저렴하고 노동법이나 안전 규제가 헐겁다. 이 때문에 실제 배 주인이 한국인이든, 일본인이든, 미국인이든 자기 나라에 배를 등록하지 않고 파나마로 배 국적을 신고하는 관행이 해운업계에 굳어졌다.

즉 컨테이너선이나 유조선 다수가 겉으로 파나마 국기를 펄럭이고 있지만, 진짜 주인은 글로벌 해운사들이라는 의미다. 중국 항만당국이 파나마 선적 선박에 대한 검사 빈도만 살짝 높여도, 파나마 정부를 포함한 전 세계 해운사와 화주, 보험사는 동시에 막대한 지연 비용을 떠안는다. 운하에 군사적인 공격을 가하지 않아도 ‘파나마’라는 국가 브랜드를 해운업계에서 위험 자산으로 만들어버리는 압박 수단으로 작용한다.

미국 연방해사위원회(FMC)와 아시아·태평양 항만국 통제 협약 자료에 따르면 지난 3월 중국 항만에서 억류된 선박 123척 가운데 이 중 74%에 해당하는 91척이 파나마 선적이었다. 아시아·태평양 전체 권역에서 억류된 선박 179건 가운데 절반 이상이 3월 한 달 동안 중국 항만 한 곳에서 잡힌 파나마 선적이었다.

로라 디벨라 FMC 위원장은 “중국 측이 이전보다 강화한 선박 검사를 비공식적인 지시에 따라 시행했다”며 “허치슨 항만 자산 이전 뒤 파나마를 응징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해석했다. FMC는 파나마 선적 선박이 미국 컨테이너 교역에서 의미 있는 비중을 차지한다며 중국 측 검사가 이어질 경우 미국 해운에 상업·전략적으로 중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중국 외교부 린젠 대변인은 29일 정례 브리핑에서 미국 주도 공동성명을 “근거 없는 거짓이며 사실을 왜곡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이어 “선박 검사는 법규에 따른 정당한 조치”라며 “미국이 항만 문제를 정치화·안보화하고 타국을 헐뜯는다”고 비판했다.

전문가들은 호르무즈에서 홍해, 그리고 파나마에 이르기까지 해운이 무기화한 산업으로 변하고 있다고 잇따라 진단했다. 데이비드 스미스 시드니대 미국학연구센터 부교수는 알자지라 인터뷰에서 “호르무즈 해협 봉쇄 후 각국이 해상 운송망의 취약성을 깨달았다”며 “선박과 해운이 국제 정치의 볼모가 되더라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글로벌 공급망 관리 플랫폼 와케오는 “지정학적 갈등이 파나마 운하 안정성과 비용을 좌우하고 있다”며 “미국행 화물 운송의 핵심 변수로 떠오를 것”이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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