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편제길 돌담마을 연애바탕길…쉬엄쉬엄 가보자 '슬로시티' 청산도

글·사진=서영도 기자(편집에디터) 2026. 5. 5. 05:02
음성재생 설정 이동 통신망에서 음성 재생 시 데이터 요금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글자 수 10,000자 초과 시 일부만 음성으로 제공합니다.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유채꽃 청보리밭 영산홍, 늦은 봄 아쉬워하며 색깔 대결
말탄바위 장기미해변도 눈길…구들장논은 세계농업유산
청산도의 '핫플' 서편제길. 소리에 광적 집착을 보인 아버지 유봉과 송화, 동호의 영화 속 장면을 회상하려는 듯 관광객이 몰린다. 오른쪽 위 삼거리 부근이 주막에서 쫓겨난 세 사람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떠돌이 소리꾼의 한을 풀던 곳이다. 2026.5.5 ⓒ 뉴스1

(청산도=뉴스1) 글·사진=서영도 기자(편집에디터) = 바다 위 섬은 산과 물을 품은 채 이름을 얻기도 한다. 산과 바다가 짙푸르다 못해 검게 보여 흑산도라 부르고,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푸르러 청산도라 한다.

늦은 봄 전남 완도군 청산도는 색깔의 경연장이다. 아기 살결보다 여린 노란 유채꽃이 봄과 작별 인사를 하는 듯 고개를 떨구고 초여름을 맞는 보리는 파르스름한 빛을 내며 섬을 물들이고 있다. 그 사이사이 보라색으로 단장한 영산홍도 조용히 웃는다. 청록색이 어우러진 5월의 푸른 섬은 싱싱한 생기가 살아 숨쉬고 있다.

청산도 여행은 서편제길에서 시작한다. 도락리에서 당리로 넘어가는 고개를 가로지른 야트막한 언덕길이다. 이곳에서 보는 좌우 풍경은 사뭇 다르다. 왼쪽의 당리는 성곽과 산 아래 내려앉은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고 오른쪽 도락리는 층층밭 아래 한옥펜션과 민박집, 어촌체험장이 있는 바다가 정연하게 자리 잡았다. 당리가 고풍스럽고 시골 같은 그림이라면 도락리는 세련된 도회적인 풍경이다. 과거와 현재 두 세상을 함께 볼 수 있는 곳, 이 언덕에서 바라보는 길 양쪽 모습이 청산도의 대표 전망 지점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서편제길에서 바라본 오른쪽 도락리 풍경. 유채꽃과 청보리, 파란색 바다가 잠이라도 든 듯 평화롭다. 가운데 바다는 어촌계에서 운영했던 어촌 체험장인데 코로나 이후 중단됐다.(완도군청 제공)

서편제길에선 영화의 장면을 떠오르게 하는 유봉(김명곤 분), 송화(오정해 분), 동호(김규철 분)가 부른 판소리 가락 진도아리랑이 구성지게 계속 흘러나온다. <노다 가세 노다나 가세 저 달이 떴다 지도록 노다 가세 사람이 살면은 몇백 년 사나 개똥 같은 세상이나마 둥글둥글 사세 소리 따라 흐르는 떠돌이 인생 첩첩이 쌓인 한을 풀어나 보세.> 여인숙(주막)에서도 쫓겨난 떠돌이 인생이지만 둥글둥글 살자며 판소리와 어깨춤으로 삭히는 해학과 달관이 소환된다. 영화는 언제 봐도 슬픔과 한이 가득해도 소리꾼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세 사람이 길을 걷는 안내판 속 장면은 자존심과 집착으로 사는 장인(匠人)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서편제길은 당연히 황톳길이겠거니 하고 올랐는데 시멘트로 포장돼서 실망이다. 동호가 북을 치며 유봉과 송화가 어깨를 들썩이는 한국 영화 최고의 장면을 오롯이 간직하지 못한 행정이 밉다. 바람 불어 먼지가 좀 일면 어떻고, 비가 와서 좀 질퍽이면 또 어떤가.

길 오른쪽 아래에 서편제주막이 눈에 띄어 막걸리라도 한잔할까 했더니 벌써 문을 닫았다. 아직 오후 6시도 안 됐는데….

살짝 뒤틀린 마음도 샛노란 유채꽃과 싱그러운 보리, 연분홍 영산홍을 보며 걸으니 저절로 풀린다.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했던 카페가 다가온다. 뒤이어 드라마 '정년이'를 찍었던 집도 기다린다. 청산도는 섬 전체가 영화와 드라마의 탄생지다. 피노키오, 여인의 향기도 이 섬에서 나왔다.

청산도에서 초분은 초빈이라고 한다. 초분을 빈소의 연장으로 여겼던 것으로 추측한다. 1980년대까지도 섬 전체에서 시행됐지만 2000년대 들어서 도락리, 도청리, 당리 등 일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다.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카페 앞에서 만났다.2026.5.5 ⓒ 뉴스1

봄의 왈츠 촬영지 부근 바다를 향해 누운 두 개의 무덤, 초분이 눈길을 끈다. 봉분이 크진 않지만 볏짚을 씌워 잔디를 대신했다. 초분은 섬 지역에서 치르던 장례 풍습으로 시신을 땅에 바로 묻지 않고 짚이나 풀로 이엉을 덮었다가 3~5년 후 유골을 추려내 땅에 묻는 장례 방식이다. 상주가 고기잡이를 나간 사이에 갑자기 상을 당하거나 선산에 매장하기 전, 또는 정월에 땅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풍습에 따라 벼 이엉을 덮어 임시 무덤을 만든 것이다. 화랑포 근처엔 더 큰 초분이 있는데 지금은 볏짚 대신 화학제품을 사용하여 관광객에게 마치 볏단처럼 보여준다.

청산도 슬로길 2코스 중간의 당리재 삼거리에서 시작되는 오솔길은 2007년 청산도가 왜 아시아 최초의 슬로시티가 되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바다를 굽어보며 적당히 자란 수풀을 헤치며 걷기에 편안한 경사를 가진 길이 마음을 여유롭게 한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화랑포인데 코스가 울퉁불퉁해 사랑길이라고 부른다. 옛날 청산도의 불타는 청춘들은 사람의 눈을 피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사랑을 나누었다고 한다. 마을 사람들은 ‘연애 바탕길’이라고 부른다. 손을 잡고 걸어야 할 정도로 경사가 심한 곳이 많다.

청산도에선 코스에 상관없이 발 닿는 대로 걸어야 제맛이다. 슬로시티에선 계획도 일정표도 다 잊으시라. 시간이 천천히 가는 섬, 빡빡한 일정은 어울리지 않는다.

말탄바위에서 장기미해변으로 가는 비탈길을 청산도에선 명품길로 이름 짓고 여행객을 유혹한다. 숲속 길을 걷는 동안 아찔한 절벽에 가슴이 콩닥거려서 아래 바다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2026.5.5 ⓒ 뉴스1

산길과 마을 길을 거쳐 말탄바위로 향한다.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는, 시야가 확 트인 뷰포인트다. 한가로운 권덕리 마을 풍경, 보적산과 범바위, 해안선도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 서서 서남쪽을 향해 바라보면 마치 말 안장 위에 올라탄 느낌이라서 말탄바위라 불린다. 범바위 쪽으로 갈까 장기미해변으로 갈까. 명품길이라는 이름이 호기심을 자극해서 장기미로 향한다. 산과 바다 사이, 아찔한 절벽에 사내 심장이 콩닥거리는데 좀 더 멀리 보면 무인도는 홀로 꿋꿋하다. 장기미를 바로 앞에 두니 어디서 흘러오는지 모를 계곡물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족탁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어 잠시 물에 담근다.

장기미에 다다르니 억겁 세월 바닷물과 싸운 공룡알 같은 몽돌이 오늘도 하얀 포말을 흠뻑 뒤집어쓰고 '자르락' 속삭인다. 청산도가 자랑하는 해변 중의 한 곳이라고 했던 주민의 말이 실감 난다. 섬 지역이나 바닷가 마을에서 쓰는 기미라는 말은 바닷물이 빠졌을 때 드러나는 갯바위나 암초지대를 뜻하는데 당리 이장님에 따르면 화랑포 쪽에 큰안기미, 작은기미도 있단다.

청산면 양지마을에서 만난 구들장논. 구들장 논은 농지가 부족하고 물빠짐이 심해 논이 될 수 없는 돌밭을 일구어 만들어낸 인공 농지다.아래쪽 통수로는 우리나라 전통주택의 불길이 통하는 길인 방고래와 비슷한 모양으로 선조들의 지혜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2026.5.5 ⓒ 뉴스1

청산도엔 최초 타이틀이 또 있다. 2014년 양지마을 구들장논이 국내 처음으로 세계농업유산에 올랐다. 구들장논은 산비탈에 마치 구들장을 놓듯 돌을 쌓아 먼저 바닥을 만든 뒤, 그 위에 다시 흙을 부어 일군 논이다. 논 아래엔 용·배수 조절을 할 수 있게끔 정방형의 통수로를 돌을 쌓아 만들었다. 쌀이 귀한 섬에서, 산자락에 기댄 마을은 자투리땅도 놀리지 않는 생존법을 터득한 셈이다. 1940년대까지 만들던 구들장논은 길게는 2년이 걸렸다. 켜켜이 쌓인 논엔 마을의 역사와 주민들의 이야기가 배어 있다.

작은 구들장논 하나를 만드는 일은 수개월 또는 1~2년이 걸리는 고된 일이었기 때문에 함께 구들장논을 만들 군사(힘이 센 장정)를 마을 젊은이들로 선발했다. 군사들은 이른 새벽부터 모여 돌을 쌓고 물길을 잡고 흙을 덮는 작업을 해가 떨어질 때까지 반복했다. 하루 일이 힘들어질 때쯤 군사 한 명이 꽹과리를 치고 "에헤라디야 상사디야 우리 군사 잘도 한다"라고 선창하면 동료 군사들이 따라 불러 서로를 응원했다. 또한 마을 아낙들은 때가 되면 논에 새참을 나르고 북장단을 치고 농요를 불러주기도 하며 사기를 북돋아 줬다. 가난하고 고단했던 삶을 헤쳐나온 주민들의 지혜를 보여주는 농업문화의 열린 박물관이 양지마을에 있는 셈이다.

상동리 상서마을은 마을 전체가 돌담으로 이뤄져 바람 많은 섬에서 꿋꿋이 세월을 버텨내고 있다. 2011년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지정됐는 데, 마을 위 논은 3억 5000만년 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멸종위기 2급 희귀생물인 긴꼬리 투구새우가 발견됐을 정도로 청정한 자연을 자랑한다.

양지마을 건너편 상서리 돌담마을은 한갓지다. 산과 들, 바닷가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돌로 쌓은 돌담길은 2011년 국립공원공단이 ‘국립공원 명품마을’로 지정해 청산도의 또 다른 명물로 인증했다. 낮은 지붕과 사람 키만큼 높은 돌담은 거센 바람에 맞서지 않고 바람이 빠져나가게끔 틈을 내준다. 흙을 거의 안 쓰고 모난 돌 하나하나까지 제 자리를 찾게 한 사람들의 지혜와 배려가 담긴 작품이 아닐까.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길은 물길처럼 자연스럽게 흐르고, 돌담 틈에 숨어 살던 사연들도 숨을 죽인 듯 마을은 조용하다. 마을 공동우물 복원지를 지나 동네 위쪽 돌담 찻집이 관광객을 맞고 있다.

표지석에 따르면 상서마을은 매봉산 정기 서린, 산세가 수려하고 물 맑은 아름다운 곳으로 청산에서 가장 먼저 사람이 정착했다는 설이 전해지는 유서 깊은 곳이다.

발길 가는 대로 갔더니 국화리 단풍길이다. 30년 넘은 단풍나무가 3.2㎞ 늘어서 터널을 만들며 초록빛 봄을 마음껏 발산한다. "우리 사진 찍고 가자"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 내륙의 단풍이 다 끝나가는 늦가을, 전국에서 ‘최후의 단풍’을 만날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영화 '서편제' 촬영 가옥 앞집의 어르신이 장작불로 고사리를 삶고 있다. 요즘 시골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이다. 당리에서의 시간이 무료했던 할머니는 정성으로 담벼락의 다육이를 키우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2026.5.5 ⓒ 뉴스1

청산도의 마침표를 서편제 촬영 가옥이 있는 당리 마을에서 하고 싶어 다시 찾는다. 도로 아랫마을 입구에 송화가 득음을 위해 소리 공부를 하던 초가가 보존돼 있다.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한 밀랍 인형은 세월의 무게만큼 낡았지만 아름다운 영상과 가슴을 울리는 소리를 되살리기에 충분하다.

집을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앞집 마당에서 고사리를 삶기 위해 장작불을 때는 할머니가 말을 건넨다. 사람이 그리우신 건가? 세월이 무료해 담벼락에 손수 키웠다는 다육식물을 보여주며 두서없지만 귀를 세우게 하는 얘기를 계속하신다. 기자는 잠시 불멍에 빠진다. 청산도의 하루가 이렇게 쉬엄쉬엄 간다.

청산도는 걸어서 또는 자전거나 승용차로 일주를 하거나 나눠 볼 수 있다. (디자인=윤주희)

#청산도에서 만든 11개 구간의 슬로길은 걸어서 다니기에 좋지만 전기자전거로 일주를 할 수도 있다. 도청항 부근에서 자전거를 유료로 빌려준다. 또 하루 10번 운행하는 무료 순환버스와 수시로 운행하는 셔틀버스로 걷고 싶은 구간을 가면 된다. 걷다가 돌아오기 힘든 투숙객을 위해 태워다 주는 민박집도 있다.

# 완도가 우리나라 전복 생산량의 70~80%를 차지하는 주산지답게 다양한 전복 요리가 식탁에 오른다. 식당에선 전복만 먹으면 억울할 거라며 청산도엔 광어도 유명하다고 권한다. 광어회와 전복, 문어, 소라, 거북손, 해삼, 멍게, 톳 등 푸짐한 해산물과 탕을 착한 가격에 맛볼 수 있다.

# 완도항~청산도 배는 정원이 517명인 대형이다. 평일 하루 편도 6회, 주말 8회 운행하며 50분 정도 걸린다. 청산농협 홈페이지에서 자세히 안내한다.

syd0001@news1.kr

Copyright © 뉴스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및 재배포, AI학습 이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