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판 동두천’ 마을 “미군 떠나면 식당·미용실·렌터카 다 망해”

란트슈툴/원선우 특파원 2026. 5. 5.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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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감축 앞둔 독일 마을… 원선우 특파원 르포
美, 12개월 내 5000명 감축 발표
주민들 “끔찍한 소식” 생계 걱정
지난 3일 독일 라인란트팔츠주 란트슈툴 마을에서 열리는 봄 축제장에서 미국을 의인화한 캐릭터 ‘엉클 샘’이 그려진 대형 벽화 앞으로 현지 주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유럽 최대의 미군 기지인 람슈타인 공군기지 인근에 있는 이 마을 주민 8000여명 중 상당수가 미군을 상대로 한 렌터카·식당·미용실 등을 운영하며 살아간다. 이들은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충돌하며 ‘주독 미군 5000명 감축’이 현실화하자 “미군이 철수하면 우리 동네는 다 망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원선우 특파원

일요일인 지난 3일 오후 3시 30분(현지 시각), 독일 남서부 라인란트팔츠주의 미군 람슈타인 공군기지(Ramstein Air Base) 앞 도로에 부대로 복귀하려는 차량 수십 대가 줄지어 서 있었다. ‘유럽 미군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이 기지는 여의도 다섯배 크기로, 일대에 미군·군무원 1만6000여 명 및 이들의 가족까지 5만4000명이 거주한다. ‘미 본토 밖 최대 미국인 커뮤니티’다.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 불과 1㎞ 거리에는 인구 8000명이 사는 작은 마을 란트슈툴(Landstuhl)이 있다. 마을 초입 높이 20m짜리 대형 맥도날드 로고 아래 ‘RAMSTEIN’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뉴욕피자’ ‘피자 익스프레스’ ‘헤어 뷰티’ ‘USA 네일’ ‘아메리칸 헤어’ 같은 영어 간판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식당과 렌터카 업체 앞엔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었다. 예전 한국의 동두천이나 의정부 같은 분위기인 이곳은 실제 ‘작은 미국’이라고 불린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주독미군을 줄이겠다”고 하고 미 국방부가 “6~12개월 내에 5000명 감축”을 공식 발표했다는 소식을 접한 주민들은 당혹해하고 있었다. 마을엔 단기 복무 미군 장병 등을 상대로 하는 렌터카 업체만 10여 곳이다. 11년째 이곳에서 업체를 운영 중이라는 40대 남성은 “하루 평균 미국인 20~25명이 차를 빌려 가는데 5000명이 빠진다는 게 말이 되느냐”며 “우린 다 망하라는 얘기”라고 했다.

지난해부터 란트슈툴 마을의 아파트를 구입해 공유 숙박 업소를 운영하는 라이너 클라인(38)씨는 “끔찍한 소식(terrible news)”이라며 “여기 사는 사람들에게 미군은 고마운 사람들이다. 람슈타인 공군기지에서 미군이 줄어들면 렌터카, 식당, 미용실 같은 미군 대상 가게들은 생계에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그래픽=박상훈

◇“메르츠 한 마디에...”

란트슈툴 마을의 미국식 닭고기 전문점 쇼윙즈(Shawingz)엔 독일 국기와 성조기가 나란히 걸려 있었다. 벽에는 조지 워싱턴부터 트럼프까지 역대 미국 대통령 초상화가 빼곡했다. 닭고기 소스 종류만 순한 라즈베리부터 ‘핵폭탄’까지 50종류였고 튀긴 오레오 쿠키, 핫 브라우니 같은 디저트가 눈에 띄었다. 점원은 “미국인 취향에 맞춘 메뉴”라고 했다.

이 식당은 람슈타인에 처음 온 미국인들에게 독일 생활 노하우를 전수하는 ‘사랑방’ 역할을 하는 곳이다. 매니저 카를 마주르 레코프스키(48)씨는 “이곳 사람들은 미국과 아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며 “미군이 철수하면 반경 30~40㎞ 내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우리야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일부 미군은 “우리가 독일 안보를 언제까지 책임질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주민들은 일방적으로 미군 감축을 지시한 트럼프 미 대통령뿐 아니라, 프리드리히 메르츠 자국 총리에 대한 불만도 표출했다. “미국이 이란에 굴욕을 당하고 있다”는 발언으로 ‘빌미’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클라인씨는 “왜 안 해도 될 말을 해서 이 지경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며 “우리에겐 정치가 아니라 평화가 중요하다”고 했다. 한 주민은 ‘메르츠’ 이름만 듣고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그 사람 얘긴 하기도 싫다”고 했다. ‘한국에도 2만8000명 미군이 있고, 미군에 경제를 의존하는 도시들이 있다’고 하자 주민들은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이 정말 중요하다. 메르츠를 보라”고 했다.

◇80년 대서양 동맹 역사 서린 마을

2023년 7월 16일, 독일 LRMC가 창립 700주년을 맞아 주독 미군이 마을에서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미군 홈페이지

란트슈툴과 미국의 관계는 1945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2차 세계대전의 미군 명장 조지 S. 패튼 장군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미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거쳐 독일 라인란트팔츠주로 진입했다. 1951년 해외 미군 병원 중 최대 규모인 란트슈툴지역병원(LRMC)이 설립됐다. 같은 시기 조성된 람슈타인 공군기지와 함께 이 지역은 냉전기 소련을 견제하는 유럽·중동 작전의 거점 역할을 했다. 베트남전, 걸프전, 이라크·아프가니스탄전, 최근 이란전에서 부상당한 장병들까지 그간 미군 수만 명이 이곳으로 후송돼 진료를 받았다.

1953년 이후 이곳에서 태어난 미국인이 5만5000명 이상이다. 배우 레바 버튼, NBA 선수 숀 브래들리 등 상당수 미국 유명인도 이 병원에서 태어났다. 미국과의 인연이 80년이 넘어가면서 이 지역에선 미국인과 연애, 결혼해 미국인 가족을 맞이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미국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애정은 때마침 열리고 있던 봄 축제 현장에서도 나타났다. 미국의 마스코트인 ‘엉클 샘’을 비롯, 스파이더맨, 디즈니 캐릭터와 성조기 문양으로 도배된 놀이기구에서 현지인 가족들이 주말을 즐기고 있었다. 스피커에선 팝송이 요란스럽게 흘러나왔다. 풍선을 들고 지나가던 한 가족은 “우리는 미국을 정말 사랑한다”고 했다. 아이스크림을 든 일곱 살 아들과 전투복 차림으로 돌아다니던 독일 연방군 소속 마흐(37)는 “미군들은 매우 친절하고 우리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라며 “나는 미군들과 함께 여러 번 훈련을 해봤는데 미군들은 언제나 용감하고 성실하다”고 했다.

◇독일·미국 정치권서 우려 쏟아져

이번 주독 미군 철수 논란에 대해선 독일 정치권의 우려도 쏟아지고 있다. 람슈타인미젠바흐시의 랄프 헤클러 시장은 현지 방송에 “약 20억달러(약 3조원)가 지역 경제에 유입될 만큼 미군 기지의 중요성이 크다”고 했다. 미군들이 발음하기 쉽게 ‘K타운’이라고 부르는 기지 동쪽의 인구 10만 도시 카이저슬라우테른에까지 미군이 미치는 경제적 영향력이 절대적이라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상원 군사위원장 로저 위커 의원과 하원 군사위원장 마이크 로저스 의원은 공화당 소속임에도 공동 성명을 내고 “주독미군 감축은 대러 억지력을 약화시키고 푸틴에게 잘못된 신호를 보낼 위험이 있다”고 했다. 민주당 군사위 간사 잭 리드 의원은 “동맹과 장기 안보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기 전에 즉각 철회해야 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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