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팔’ 치타 여사와 겹치는 늙은 노동자들…‘연대’가 문화자본


노동절이 공휴일이 되면서 주말과 어린이날을 포함해 닷새간의 연휴를 즐기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제주도의 일요일은 비 오고 바람 불어 기온도 떨어졌으나, 오후에 잠시 나가보니 렌터카들이 꽤 많았다. 공항도 국내선, 국제선 가릴 것 없이 북새통을 이루었다고 한다. ‘해외여행’ 하면 나는 항상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이제 밥 먹고 살 만해진 치타 여사가 일본 여행을 준비하는 장면, 여행사에 간 아들 정환이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 여권에 있는 영어 이름 스펠링 불러줘 봐.”
그러나 치타 여사는 알파벳을 모른다. 하필 집에는 이웃이 놀러 와 있다. 당황한 여사는 가스 불에 국 올려놨다며 전화를 끊어버린다. 부엌에서 서성이는 동안 재차 걸려 온 전화를 대신 받은 눈치 빠른 이웃은 수화기를 넘겨주고 슬그머니 나가버린다. 엄마가 미적거리는 까닭을 모르는 아들은 재촉하다 못해 짜증을 낸다.
“엄마, 영어 이름 하나 불러 달라는데 뭐 그렇게 어려워. 여권 첫장 열면 사진 옆에 영어로 쓴 이름 있잖아, 빨리 불러 주세요.”
여권을 펼쳐 들고 머뭇거리던 치타 여사가 입술을 한번 앙다물더니 입을 뗀다.
“응응 정환아, 저기 있잖아, 엄마가 영어를 몰라, 엄마가 영어를 읽을 줄 몰라. 아들 미안.”
미안하다 한 엄마는 하릴없이 깔깔 웃고 아들은 입을 닫는다.
1970~80년대 소녀 시절 ‘공순이’ 또는 ‘산업 전사’로 불렸던 이들도 치타 여사와 별다르지 않다. 이들이 실을 짜고 가발을 만들어 외화를 벌어들이는 동안 어떤 이들은 외화를 쓰며 문화 향유의 폭을 확장했다. 수십년이 흐른 지금, 이국의 낯선 땅에 설 때면 전자는 ‘패키지 여행객’으로 후자는 ‘자유 여행자’로 갈라진다.
나와 동료들은 가이드 노릇을 해줄 자녀를 동반하지 않는 한 외국으로의 자유 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영어로 된 웹사이트 검색이나 예약 앱들은 바라만 봐도 머리가 지끈거리니 정보 접근의 한계부터 우리를 가로막는다. 그 문제를 해결한다 해도 항공기 탑승과 환승, 입국심사 절차들이 줄줄이 걱정이고, 외국공항 검색대를 지날 때의 서늘한 긴장감은 두려움이다. 누군가는 구름 위를 걷듯 국경을 넘을 때, 누군가는 초조하게 단어 하나하나의 장벽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다.
기계를 돌리고 공단에 유인물을 배포하며 노조를 지키던 부지런한 손이 종이 위에 적힌 몇줄의 영어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은 도대체 그 세월 동안 뭘 하고 산 걸까 하는, 허탈함을 안긴다. 세계가 하나로 이어진 시대는 그저 지도 위의 상상에 불과할 뿐, 영어 중심 문화권에 들어서면 졸지에 지구별 바깥의 문맹자가 되고 만다.
우리가 일구었던 경제성장 덕에 문화의 장도 풍요로워졌지만, 때때로 우리는 집단으로 소외되는 기분이다. 지식과 문화자본이 어느 순간 자존감을 휘두르기 때문이다. 몇해 전, 유명 작가도 학자도 아닌 노동자 출신의 나이 든 내가 놀랍게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NU) 예술가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초청받았다. 8주가량을 그 나라에 머물렀는데, 일정 대부분을 수도 캔버라에서 보냈다. 영어권 국가에 혼자 가는 게 못내 걱정된 딸이 어미를 안전하게 이송해 주고 떠난 뒤 대학 안의 숙소에서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생활했다. ’


통째로 자유로운 시간이었고 이웃 나라 여행도 가능한 조건이었지만 나는 정작 엄두를 내지 못했다. 속 모르는 이들은 뉴질랜드에 가 보고 오라, 멜버른도 아름답다더라며 훈수를 두었지만, 그저 웃고 말았다. 영어권에선 언어 문맹자나 다름없는 내 속사정을, 처지가 다른 ‘지식인’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낯선 일에 도전하는 힘도 바탕이 뒷받침될 때 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수십년 전 이민을 가 말도 글도 통하지 않는 미국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언니는 수시로 내 안부를 물어왔다. 음식은 잘 사서 먹는지, 길을 잃지는 않는지, 아픈데 약을 못 사는 건 아닌지, 그런 걸 다 궁금해했다. 늘 핸드폰 번역기를 열고 다녔지만, 말이 통하지 않으니 요절복통 촌극도 많았다.
다행히 아시아마트가 있어 김치 된장 간장 다 살 수 있는 시대라, 언니의 그 많은 걱정은 기우였지만 한계는 명백했다.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다 대학교수들과 각국에서 온 연구자들, 학생들이었다. 그들 가운데는 다섯개 국가를 거치며 생활한 이도 있었고, 방학이면 세계 어딘가를 다녀오는 게 자연스러운 듯했다. 평소 지식인층과 교류할 일이 많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은 대체로 서울에서 부산 가듯 외국 여행이 편해 보였다. 그것은 경제력 문제만이 아닌 어쩌면 살아온 습관, 풍토, 즉 쉽게 섞일 수 없는 문화자본의 차이이자 계급의 경계선 같은 것이었다.
머나먼 중동 전쟁의 여파로 경제가 더 어려워지는 게 실감 난다. 쓰레기봉투부터 라면 가격까지 모든 게 걱정이다. 연식 10년이 넘은 자동차도 기름값을 불안해한다. 지난 4월, 제주에서 서울 가는 항공료 앞에서도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40년이 넘게 인연을 이어온 원풍동지회 동료들 얼굴이 아른거려 김포행 항공표를 클릭했다. 올해 원풍 봄나들이 장소는 수원 화성이었다.
수원역에서부터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길바닥에서 얼싸안고 소리를 질러대며 이미 복잡한 버스에 올라탔다. 장안문 앞 잔디광장에 모인 백여명이 또 한바탕 인사를 나누고 정사과, 전방, 가공과, 직포과, 염색과, 검사과…, 45년 전의 부서별로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회장은 상기된 목소리로 인사말을 했고 곧 팔순이 되는 백전노장의 선배는 마이크조차 무시한 채 후배들이 너무 예쁘다는 말을 거듭했다.
떡집 운영하는 동료가 실어 온 찰밥과 전라도에 사는 동료가 조달해 온 김치와 홍어 무침은 꿀맛이었다. 햇살에 미지근해진 맥주와 소주도 제 나름 흥을 돋웠다. 다들 이제는 웬만큼 살지만, 여전히 “일을 하지 않으면 몸이 아픈” 사람들이다. 여전히 새벽 청소, 마트 판매, 식당, 가게 일로 바빠 주말이 아니면 날을 잡지 못한다.
걷는 게 힘든 선배들은 행궁 마루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다리 성한 이들은 해설자의 설명에 귀를 모은 채 봄볕을 쬐었다. 수원갈비를 먹고 부서별로 카페에 앉아 미진한 수다를 푼 뒤에야 어둑해진 골목으로 흩어졌다. 부서 회장이 준비해 온 퀴즈 선물, 다과를 종류별로 담은 봉지, 아침 먹으라고 챙겨 준 찰밥으로 등에 멘 내 가방은 방실방실 부풀어 있었다.
다음주에는 광주 5·18민주항쟁 46주기 행사장에서 다시 만날 것이다. 19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70민노)를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버스를 대여해 광주를 거쳐 봉하마을까지 들러서 돌아갈 예정이라니 그 에너지가 대단하다. 오가는 버스 안에서 수다 떨며 찰밥을 나누고 우리만의 거칠 것 없는 언어로 노래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늙은 노동자들이 누리는 가장 편안한 여가이자 연대의 봄볕을 쬐는 문화적 향유다.
장남수 | 경남 밀양 출생. 1958년생으로 열여섯살부터 공장에서 일하며 신정야학에서 공부했다. 원풍모방에서 노동조합 활동을 하다 해고된 뒤 노동운동을 하며 글을 써왔다. 늦깎이로 검정고시를 거쳐 성공회대에서 공부했다. 지금은 제주도에 살면서 걷고 배우며 글쓰기를 계속하고 있다. 1984년 ‘빼앗긴 일터’를 시작으로 ‘빼앗긴 일터, 그 후’ ‘파문’ ‘노동의 시간이 문장이 되었기에’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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