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LG 합쳐도 못 따라가는 화웨이…창업자가 스파이 취급 받는 이유는

최연진 2026. 5. 4.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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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웨이의 수수께끼<1>

세계에서 가장 많은 기술 특허를 출원한 기업은 어디일까. 놀랍게도 내로라하는 세계적인 기업들을 제치고 최정상에 선 기업이 중국의 화웨이다.

지난 3월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가 발표한 특허협력조약(PCT)에 따른 2025년 국제 특허 출원 건수를 보면 화웨이는 7,523건을 기록해 2017년 이후 9년 연속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 지난해 2위 삼성전자(4,698건)와 4위 LG전자(2,400건)의 특허 출원 건수를 합쳐도 화웨이에 미치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화웨이는 디자인과 상표 등 지식재산권 분야에서도 지난해 1,200건을 출원해 세계 1위다. 5위 삼성전자(525건)와 비교하면 격차가 2배 이상이다.

화웨이가 1987년 설립된 점을 감안하면 약 40년 만에 그보다 더 오래된 기업들을 제치고 기술력으로 세계 최정상에 오른 셈이다. 그만큼 화웨이의 고속 성장 비결은 기업들 뿐만 아니라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연구 대상이다. 그런데도 화웨이는 국내에서 다른 외국 기업에 비해 덜 알려져 있다.

중국 선전시에 위치한 화웨이 연구개발센터. 화웨이 제공

국내에 화웨이를 알린 이동통신 보안 문제

화웨이가 국내에서 관심을 끈 것은 2013년이다. 당시 LG유플러스가 정부와 정치권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4세대(4G) 이동통신인 LTE 서비스를 위해 화웨이의 통신장비 도입을 발표하면서 논란이 됐다. 미국 정부와 정치권까지 나서서 LG유플러스의 화웨이 장비 사용을 반대했다.

미국이 반대한 이유는 보안 때문이다. 중국이 화웨이의 기지국 장비를 이용해 미국과 우방국의 정보를 빼낼 수 있다며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LG유플러스는 화웨이의 LTE 장비를 도입했지만 주한 미국대사관과 미군기지 주변에는 미국의 반대로 화웨이가 아닌 유럽산 통신장비를 설치했다. 통신업체 관계자는 "같은 권역 내에서 특정 지점에만 별도 장비를 설치하면 돈이 많이 든다"며 "그런데도 미국의 반대가 워낙 심해서 LG유플러스는 많은 돈을 들여 주한 미국 대사관과 미군 기지 주변에 에릭슨 등 유럽산 장비를 설치했다"고 말했다.

화웨이 장비의 보안 문제는 2018년 5세대(5G) 이동통신에서도 이어졌다. 국내에서도 LG유플러스가 4G에 이어 5G에서도 화웨이 장비를 도입하면서 같은 문제가 불거졌다. 당시 하현회 LG유플러스 부회장은 국회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국정 감사에서 “LTE에 화웨이 장비를 쓰면서 보안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며 화웨이의 5G 장비 도입 이유를 밝혔다.

그렇다면 왜 화웨이의 이동통신 장비를 두고 미국은 보안 문제를 강력하게 거론했을까. 왜 미국은 화웨이를 중국의 스파이 취급하며 강하게 의심할까. 이 수수께끼를 풀려면 화웨이의 지나온 여정을 돌아봐야 한다.

화웨이를 설립한 런정페이 창업자. 화웨이 제공

반동으로 몰린 아버지

화웨이는 중국 공산당과 군대를 떼어놓고 이야기하기 힘든 배경을 지닌 기업이다. 여기에는 창업자 런정페이(任正非)의 비극적인 가족사도 얽혀 있다.

영국 일간지 더가디언 등에 따르면 런정페이의 아버지 런모쉰(任摩逊)은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다. 진보적 지식인이었던 그는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공했을 때 광시성 룽현이라는 마을에 작은 서점을 열어 마르크스와 레닌의 공산주의 서적, 루쉰의 책 등을 팔며 혁명 사상을 퍼뜨렸다. 서점은 단순히 책만 판 것이 아니라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전쟁 소식 등을 전하며 동네 사랑방 노릇을 했다.

당연히 우익이었던 국민당 정부는 런모쉰의 서점을 폐쇄했다. 이에 그는 마오쩌둥(毛澤東)의 공산당에 합류하기 위해 옌안을 향해 떠났으나 전쟁으로 차단되는 바람에 베트남과 가까운 구이저우에 주저 앉았다. 그곳에서 그는 교사로 일하며 결혼해 1944년 아들 런정페이를 낳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49년 국민당과 내전 끝에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런모쉰은 두윈민족사범대학 학장을 맡았다. 그곳에서 그는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에 동참해 문맹 퇴치에 앞장섰다. 그 시절 런정페이는 1963년 훗날 충칭대로 합쳐지는 충칭건축공정학원에 입학했다.

1966년 지식인과 정치인을 숙청하는 문화대혁명의 광풍이 몰아치면서 가족의 비극이 시작됐다. 런모쉰은 혁명을 위해 갖은 고생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식인이라는 이유로 하루 아침에 반동분자로 내몰려 숙청 대상이 됐다. 중일전쟁 기간 생계를 위해 국민당 정부의 군수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전력도 문제가 됐다. 런모쉰은 문화대혁명의 행동대인 홍위병들에게 갖은 고문을 받고 강제 노동수용소로 이송됐다.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까지 했으나 가족에게 불똥이 튈 것을 우려해 끝까지 견딘 그는 1976년 마오쩌둥 사망과 함께 수용소에서 풀려났다. 1979년 중학교 교장을 맡았던 그는 1995년 85세 나이로 사망했다.


비밀 군사 기지 건설에 동원

런정페이는 아버지 때문에 문화대혁명 기간을 숨죽여 보냈다. 그 시기에 열심히 책만 읽으며 3개 국어를 익혔다. 1966년부터 1976년까지 문화대혁명이 이어진 10년 동안 중국에서는 대학 입학이 금지됐다. 그 바람에 런정페이의 동생들은 대학에 가지 못하고 모래 채굴 등 고된 노동을 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한 런정페이는 마오쩌둥의 ‘상산하향운동’에 투입됐다. 상산하향은 도시 청년들을 농촌이나 광산 등에 보내 노동의 가치를 깨닫게 하는 운동이었다. 그는 공학도라는 이유로 구이저우성의 비밀 군사 기지를 만드는 일에 동원됐다.

당시 중국 공산당은 베트남전쟁을 보면서 미국의 침공에 대비해 중국 곳곳에 비밀 군사 기지를 만들었다. 이런 기지들은 단순히 군대만 주둔한 것이 아니라 공장 역할을 겸했다. 즉 군인들이 훈련을 받으며 민간인들과 섞여 직공 노릇까지 했다.

그 중 한 곳이 런정페이가 배치된 011기지였다. 외부에 드러나지 않도록 동굴을 뚫어 만든 011 기지에선 전투기를 만들었다. 이 곳에서 구 소련의 미그-19 제트기를 토대로 만든 중국 최초의 제트 전트기 젠-6(J-6)를 생산했다. 런정페이는 군인이 아니었기에 요리사로 일하다가 배관공을 거쳐 정식 기술자가 됐다. 그때 그는 틈틈이 전자공학을 혼자 공부했다.

그래서 화웨이는 훗날 미국 상무부와 연방통신위원회(FCC)가 런정페이의 군 경력을 문제 삼았을 때 그가 군인이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이 주장은 일부만 맞다. 런정페이는 군인이 아니었지만 011기지와 공병대 등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군대와 무관하다고 보기는 힘들다.

011기지 경험은 그에게 평생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는 화웨이 창업 후 군대 문화를 접목했다. 직원들에게 조직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군인 정신을 강조했고, 회의나 연설 때 제2차 세계대전과 국공내전 등 각종 전투 사례를 언급했다.

중국 선전시 완상텐디에 위치한 화웨이 플래그십 스토어. 화웨이의 모든 제품과 기술력이 총결집된 곳이다. 선전=최연진 기자

처가를 덮친 비극

런정페이는 대학 졸업 후 젊은 여성을 소개받았다. 충칭의 의대생이었던 멍쥔(孟軍)이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멍쥔은 얄궂게도 충칭의 홍위병이었다. 그것도 30만 명의 홍위병을 지휘하는 부정치위원이었다. 하지만 홍위병들도 파벌이 갈려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벌이는 바람에 멍쥔 또한 공격을 받았다.

멍쥔의 아버지 멍둥보(孟東波)는 공산당 1세대였는데도 불구하고 문화대혁명 때 숙청 대상이 됐다. 그는 공산당 지하 조직에서 연락책으로 일하다가 마오쩌둥의 공산군에 합류해 중일전쟁과 내전을 치렀고 공산당 정부 수립 후 쓰촨성 부성장이 됐다. 그는 고위 관료라는 이유로 숙청 대상이 됐다. 하루 아침에 강제 노동수용소에 갇혀 돼지치기로 살았다.

문화대혁명이 끝난 뒤 멍둥보는 쓰촨성 부성장으로 복귀했다. 그는 공산당 총서기를 지낸 자오쯔양(趙紫陽)의 지원을 받아 쓰촨성에 개혁경제를 도입했다. 이후 자오쯔양의 해외 사절단에 포함돼 유럽을 돌아보기도 했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에바 더우는 ‘화웨이 쇼크’에서 정치권의 든든한 배경을 지닌 멍둥보가 런정페이와 화웨이의 성장에 도움이 됐을 것으로 봤다.

문화대혁명의 고통을 함께 겪은 덕분에 런정페이와 멍쥔은 부부가 됐고 1972년 딸 멍완저우(孟晚舟)를 낳았다. 멍완저우는 나중에 부모의 이혼 후 어머니 성을 따랐다.

화웨이 창업자 런정페이의 딸인 멍완저우 화웨이 순환회장. 밴쿠버=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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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진 IT전문기자 wolfpac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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