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브리옹의 모든 빈티지가 살아 있는 식탁"...르 클라랑스가 특별한 이유
수석 소믈리에 시릴 보사르 인터뷰
도매상 거치지 않고 레스토랑으로 직송
빈티지가 숨쉬는 와인의 성지
샤토 오브리옹을 소유한 도멘 클라랑스 딜롱의 직영 레스토랑. 이 한 줄이 르 클라랑스의 와인 리스트가 다른 이유다. 시중에서는 사라진 1977년산 라빌 오브리옹 블랑이 이 집의 셀러에는 살아 있다. 새 수석 소믈리에 시릴 보사르(Cyril Bossard)를 만났다.

미의식이 잔에 닿을 때
르 클라랑스의 저택에 들어선 순간, 황홀했다. 오래된 서가와 그림, 조각, 고가구. 손이 닿는 식기 하나까지 같은 결을 이루고 있었다. 후각과 시각, 청각과 미각, 촉각이 하나의 미의식 아래 맞아떨어지는 식탁. 그 마지막 자락은 와인잔에 담긴다. 그 한 잔을 고르는 사람을 만났다.
시릴 보사르는 여러 팰리스 호텔에서 경력을 쌓은 뒤 지난해 말 르 클라랑스의 수석 소믈리에로 부임했다. 시릴은 르 클라랑스를 "클래식하면서도 남다른 곳"이라고 표현했다.
"궁전 같으면서도 집 같은 분위기가 공존합니다. 로베르 왕자님의 개인적인 취향과 감각이 이곳에 많은 영향을 주었죠. 매일 아침 출근할 때마다 이 하우스에 대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오너가 실제 왕족이라는 사실은 공간과 호스피탈리티에 그대로 스며든다. 귀족의 예법과 삶이 일상인 사람이 만든 공간이기 때문이다. 가스트로노미가 귀족에게는 매일의 일상이라면, 왕자가 이 집에서 특히 공을 들이는 부분은 무엇일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최고의 와인 리스트입니다. 흥미로운 건, 공간은 지극히 클래식하지만 주방은 현대적이고 모던하게 풀어내는 것. 그게 왕자의 안목이죠."

클라랑스 2.0
시릴이 르 클라랑스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난해 말이다. "셰프 안드레아 카파소, 홀 디렉터 샤를 웨일랑, 그리고 저. 클라랑스 2.0이랄까요. 클래식한 골격 위에 새로운 결을 더해가는 작업이죠." 팰리스 호텔에서 쌓은 경험을 그대로 들고 와 클래식한 공간에 펼친다. 르 클라랑스를 택한 이유다.
샤토에서 식탁까지, 중간이 없다
보르도 와인은 보통 샤토에서 도매상을 거쳐 레스토랑에 들어온다. 운송과 보관 단계가 늘어날수록 같은 빈티지라도 잔에 담기는 와인의 풍미가 미묘하게 달라진다. 르 클라랑스는 그 단계가 없다. 같은 가문이 샤토와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하기 때문이다.
"샤토에서 곧바로 셀러로 옵니다. 운송과 보관이 완벽한 상태로 들어오고, 가격도 세계 어디와 비교해도 합리적입니다. 같은 오브리옹이라도 이곳에서 마시는 한 잔은 다른 곳의 한 잔과 다르다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차이는 빈티지의 폭에서 더 분명해진다. 샤토가 시장에 ‘품절’을 통보한 뒤에도, 르 클라랑스를 위해 따로 남겨두는 병들이 있다. 오브리옹 1961년과 1964년 빈티지, 라빌 오브리옹 블랑 1977. 시중 유통망에는 더 이상 공급되지 않는 와인들이다.
"전 세계에서 오브리옹의 모든 빈티지를 갖춘 마지막 레스토랑이라고 말씀드려도 좋습니다. 당연한 거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브리옹과 라 미시옹 오브리옹을 대표하는 식탁입니다."
손님의 출생 빈티지를 찾는 일도 종종 있다. 언젠가 한 손님이 "제 생일이 1947년인데, 그 해 빈티지가 셀러에 있느냐"고 물어왔다. 시릴은 곧바로 샤토에 전화를 걸었고, 1947년 빈티지가 남아 있다는 답을 받았다. 그 병은 르 클라랑스로 옮겨져, 그 손님 한 사람을 위해 열렸다. "이런 특별한 순간이 있다는 게 이 일의 좋은 점이죠."

"오브리옹은 왕, 라 미시옹 오브리옹은 여왕"
추천 빈티지를 묻자 시릴은 본인이 즐겨 쓰는 비유를 꺼냈다. "저에게 오브리옹은 왕이고, 라 미시옹 오브리옹은 여왕입니다." 무게감과 중심이 있는 왕의 와인 옆에서, 더 섬세하고 우아하게 빛나는 여왕. 빈티지에 따라 왕과 여왕이 각기 다른 해에 빛나기도 한다.
"라 미시옹은 2014년산이 아름답습니다. 섬세한 프랑스식 빈티지의 전형이에요. 오브리옹이라면 2015년산이 좋습니다. 2014년산보다 더 크고 풍성한 해입니다. 당장 마시기에는 2001년산 오브리옹이 좋고요."
보르도 전반으로는 2012년 빈티지가 지금 마시기에 균형이 좋다고 그는 덧붙였다. 부르고뉴 화이트는 산뜻한 2014년. 셀러에 남아 있는 전설적인 빈티지로는 1989년과 1961년산 오브리옹을 꼽았다.

누구에게나 열린 식탁
미슐랭 2스타 레스토랑인데 가격 정책은 의외로 열려 있다. 50유로짜리 병 와인부터 1,000유로가 넘는 와인까지 같은 리스트에 올라 있다.
"유명한 분들이 많이 오시지만 손님을 가려 받지 않습니다. 예약하시는 분이 곧 특별한 손님이시죠. 50유로로도 여기서 식사하며 와인을 즐길 수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매주 다른 샴페인을 잔으로 연다. 크리스탈(Cristal), 살롱(Salon), 크루그(Krug), 돔 페리뇽(Dom Pérignon), 자크 셀로스 로제(Jacques Selosse Rosé). 셀로스 로제를 잔으로 65유로에 낸다.
이러한 가격 책정이 레스토랑의 평판을 만든다. "와인 메이커들도 우리가 자신들의 와인을 합리적인 가격에 판다는 걸 압니다. 그러면 다음번에 더 좋은 물량을 배정받게 되죠. 선순환입니다."
코르키지 방식도 열려 있다. 손님이 가져온 와인의 수수료는 받지 않는다. 조건은 하나, 비슷한 가격대의 와인을 한 병 주문하는 것이다. "와인은 나눔입니다. 손님이 로마네 콩티 1945 같은 걸 가져오신다면, 그런 와인을 경험할 기회가 얼마나 있겠습니까. 저로서도 배우는 일이고요. 안 된다고 말할 이유가 없죠."

클래식 하우스의 내추럴 와인
와인 리스트는 100% 프랑스 와인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클래식한 골격 안에 내추럴 와인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준은 정갈한 내추럴입니다. 유황 사용을 절제하면서도, 발효 과정에서 오는 거친 향이 튀지 않아 와인 본연의 결이 깨끗하게 드러나는 것이죠. 우리는 11구의 캐주얼한 내추럴 와인 바가 아닙니다. 클래식 하우스니까요."
전체 리스트에서 내추럴이 차지하는 비중은 10~20% 정도. 그가 직접 셀러를 찾아다니며 고른다. 쥐라(Jura)의 도멘 라베(Domaine Labet)의 포도밭에서 시간을 보내고, 니콜라 자콥(Nicolas Jacob), 갸느바(Ganevat)와도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리스트는 그렇게 계속 새로워진다. "팀이 주말에 새 와인을 발견해 '한번 같이 열어보자'고 가져오는 일도 늘 있습니다." 시릴 한 사람이 짜는 리스트가 아니라 팀과 함께 만들어가는 리스트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파트릭 부주(Patrick Bouju) 같은 펑키한 와인도 좋아합니다. 다만 그건 일요일 오후 네 시, 생 마르탱 운하 옆 와인바에서 마시기에 더 어울리는 와인이죠. 그랑 팔레 맞은편의 이 저택에 어울리는 결은 또 다릅니다."

왕자와 소믈리에
로버트 왕자는 어떤 경영자인가. "꾸밈없는 분입니다. 음식과 와인,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시고요. 최고의 와인 리스트를 만들라는 말씀 외에 나머지는 위임하시고요." 왕자는 자주 주방에 들러 셰프 카파소와 테이스팅에 함께한다. 이름만 걸어둔 오너가 아니라는 뜻이다.
르 클라랑스의 와인 부티크, 라 꺄브 뒤 샤토
르 클라랑스와 같은 건물 1층에는 도멘 클라랑스 딜롱이 직영하는 와인 부티크 라 꺄브 뒤 샤토(La Cave du Château)가 자리한다. 샤토 오브리옹과 라 미시옹 오브리옹의 다양한 빈티지부터 프랑스 전역의 그랑 크뤼와 작은 도멘의 와인까지, 3,000여 종의 프랑스 와인·샴페인·스피릿을 갖췄다. 보르도 시내와 샤토 오브리옹 입구에도 매장이 있다.
부티크의 디렉터는 다미앵 드 지롱드(Damien de Gironde). 2015년 부티크 오픈 때부터 10년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가 이끄는 라 꺄브 뒤 샤토는 2026년 프랑스 와인 평론지에 '올해의 와인샵'으로 선정됐다.

이 부티크에서는 와인 메이커들이 직접 찾아와 시음회를 연다. 통상 캐주얼한 비스트로에서 열리는 내추럴 와인 시음회가 골든 트라이앵글의 우아한 부티크에서 열린다. 누구나 공식 사이트에서 신청해 참석할 수 있다. 인기 도멘의 시음회는 빠르게 마감되니 서두르는 편이 좋다.
한국 포함 전 세계 배송. 온라인 주문 후 오프라인 매장에서 수령하는 것도 가능하다. 문의는 사이트 또는 이메일로.
라 꺄브 뒤 샤토에서 추천하는, 지금 마시고 싶은 세 병
• 도멘 동-그레예(Domaine Dhondt-Grellet), 레 떼르 핀 Les Terres Fines
- 오크 숙성 샤르도네로 만든 프리미에 크뤼 블랑 드 블랑 샴페인
• 도멘 로슈 오 무안(Domaine Roche aux Moines), 사브니에르 Savennières 2023
- 미네랄이 인상적인 루아르의 슈냉 블랑
• 샤토 퀸투스(Château Quintus), 그랑 크뤼 2016
- 과일과 신선함의 균형이 아름다운 생떼밀리옹 와인
파리=김인애 럭셔리&컬쳐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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