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당 공천활동 “타락” 비난받고 “反페미 소설” 공격받기도… 주류 문인중 외롭게 우파 지켜[장재선의 한국문화 ‘논란의 초상들’]
(14) 작가 이문열의 정치적 발언 <하>
부친 월북탓 연좌제 시달려… ‘영웅시대’서 불행한 가족사 다뤄
1980년대 문학계, 진보 주류… ‘반동’ 비판속 “우파 보수로 균형”
23년전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 참여한 이유도 ‘균형 감각’ 때문
族親 이재오 사무총장 “개헌저지선 확보 위태… 도와달라” 요청
소설 ‘선택’서 모범적 여성상 제시… 여성단체는 “가부장적” 맹공
전여옥 “매춘부” 일갈에… “30년 지나도 그 비판엔 화가 나” 토로


“정말 재주 있는 사람인데 이런 사람이 시절을 잘못 만나면 맞아 죽는다. 바른말을 잘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재승박덕에 안 빠졌으면 좋겠다. 보통 재주 많은 사람이 덕이 없어 보이기 쉽다.”
작가 이문열이 2023년 말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평한 말이다. 언론 인터뷰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윤석열 대통령 부부와 한 위원장 사이의 파열음을 내다보는 듯한 발언이었다. 이문열은 이처럼 언론에서 정치 사안에 대해 물으면 자신의 생각을 분명하게 밝혔다. 시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치 발언과 글이 자주 논란이 되었기에 또 시비에 휘말릴 것을 걱정하면서도 그랬다.
◇“왜 굳이 정당 활동까지…”
그는 발언을 했을 뿐 아니라 현실 정치에 참여한 적도 있다. 지난 2003년 12월 29일부터 70여 일간 활동했던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이 그것이다. 이에 대해 그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는 것”이라고 했으나, 세상은 그렇게 봐 주지 않았다. 언론은 그의 활동을 중계방송하듯이 전했다. 좌파 진보 진영에선 “유명 문인의 타락”이라며 비난했다. 그의 정치 발언에 호의적이었던 사람 중에도 정당 활동엔 실망감을 표하는 이들이 꽤 됐다. 그는 그걸 알면서도 보수 정당을 중심으로 한 국민통합연대 활동 등에도 나섰다.
“한국을 대표하는 문호가 왜 굳이 이전투구의 정치판에 개입하는가.” 이문열은 이에 대한 답으로 ‘공리적 실용’을 내세운다. 그는 문학의 사인성(私人性), 즉 오로지 나를 위한 행위라는 점을 좋아했다. 그러나 작가로 인기를 누리게 되자 생각이 달라졌다. 자신의 작품을 좋아해 준 사람들이 사는 사회가 잘되도록 사인성을 넘어서는 일을 해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 그가 세상일에 침묵하지 않은 까닭이다.
이문열의 정치 발언과 참여는 한결같이 한곳을 지향했다. 자신이 태어난 1948년에 함께 탄생했던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지키고 가꾸는 것. 그 지향점이 확고해서 우파 보수의 대표 논객으로 불렸다. 그는 우리 체제를 만들기 위해 애쓴 사람들과 그 시간에 대한 존중을 늘 강조했다.
그의 공리적 실용은 왜 우파 보수를 지향했을까.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첫째는 역시 한국 현대사의 질곡이다. 알려진 것처럼, 그는 부친이 월북자였던 탓에 1980년대까지 연좌제에 시달렸다. 아버지의 월북 이미지를 벗기 위해 “나는 좌파가 아니다”라고 세상에 외치고 싶었다고 한다.
이문열이 1984년 펴낸 소설 ‘영웅시대’는 그 불행한 가족사를 다루고 있다. 그의 아버지 이원철은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나 해외유학을 다녀온 지식인이었다. 해방공간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했던 그는 1950년 9월 햇살이 화창한 어느 날 3명의 자식과 만삭의 아내를 남겨두고 자신의 ‘낙원’을 찾아 월북했다.
‘영웅시대’는 그런 아버지를 모델로 한 이동영이 주인공이다. 이동영은 이념에 순사(殉死)할 각오였으나, 공산주의자들의 당파 싸움을 뼈저리게 겪으며 허무주의에 빠진다. 그는 소설 말미에 아들에게 남기는 편지글에 이렇게 썼다.
“모든 이데올로기에 거역하고, 그 찬란한 약속 뒤에 감추어진 독이빨과 날카로운 발톱을 경계하여라. 그 대의(大義)가 아무리 휘황스럽더라도, 그걸 위해 죽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한껏 비웃고 경멸하여라.”

1980년대는 한국 문학계에서 이른바 민중·민족 문학이 지배했던 시절이었다. 그때 이문열이 이른바 ‘이념 지우기’를 주제로 한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이 시기부터 그는 문단 주류 세력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방향에서 동행한 주요 문인은 복거일(1946∼) 작가밖에 없었다는 것이 이문열의 회고이다.
“우리 국민에게 보수-진보 이념 성향을 물으면, 거의 반반으로 나왔다. 큰 선거 결과는 그걸 반영해왔다. 그런데 문학계는 유독 진보 성향 인물이 압도적으로 많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나 혼자라도 균형을 잡는 데 나서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균형 감각. 이것이 그가 보수 문인이 된 또 하나의 이유다. 그는 좌파 진보 이념의 무용성을 주장한 적이 없다. 세상을 바라보거나 살아내는 이념으로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 반대편인 우파 보수도 비슷하게 존재해야 건강한 공동체가 된다고 믿는다.
그의 말대로 문학계는 진보 성향이 주류를 이룬다. 문인들이 기성 질서에 저항적인 기질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문단 내 진보 세력이 구축한 운동 네트워크가 워낙 강고해서이기도 하다. 이문열은 거기에 편입되지 않은 채 자신의 길을 걸었다. 그 네트워크에서 ‘반동(反動)’이라고까지 비난받으면서도 반대쪽에서 발언하고 행동했다.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참여한 것도 균형 감각 때문이었다. 직접 계기는 그와 재령(載寧) 이씨 족친(族親)인 이재오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 부탁을 한 것이었다. 이재오가 총선에서 개헌저지선 확보도 위태롭다며 청하자 특유의 감각이 발동을 했다. “진보와 개혁 세력만 남게 되면 한국 사회는 불행해진다. 개혁은 필요하지만 보수가 없는 사회도 문제가 아닌가.”
그는 타고난 성향이 보수주의에 가깝다고 수차례 밝힌 바 있다. 고향(경북 영양)과 문중(門中), 전통에 대한 지향성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

◇‘시대와의 不和’ 만들어
그런데 그것이 ‘시대와의 불화(不和)’를 만들어내곤 했다. 그 불화가 극단적으로 드러난 게 페미니스트들과의 갈등이었다. 20세기 말에 펴낸 소설 ‘선택’이 그 계기였다. 그는 자신의 직계 조상인 조선시대 선조∼숙종 연간의 정부인(貞夫人) 장(張) 씨를 내세워 시대를 넘어 본보기가 되는 여성상을 제시했다. 장 씨는 뛰어난 재능과 학식을 지녔으나 한 집안의 후처로 들어가 남편·자녀·시댁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었다.
이런 내용이 여성단체와 여성 독자들의 반발을 샀다. 가부장적 남성 우위 질서를 현대 사회에 강요한다는 점에서였다. 소설 ‘선택’의 내용 중 여성주의 문학과 그 작가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대목도 거센 비판을 받았다.
당시 방송인 전여옥은 “남성 사회의 권력과 명예에 기생했다는 점에서 정부인 장 씨는 매춘부와 다를 게 없다”고 했다. 이문열은 30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그 비판에 대해선 화가 난다고 했다.
그는 그때의 논란이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한다. 그 소설을 쓴 이유가 반(反)페미니즘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현모양처로 살았으나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다고 느끼는 중년 여성을 위로하고 싶어서였다고 했다. 또 하나는 남성들을 향해 성난 외침을 쏟아내는 여성 중 일부가 여성 해방과 성적 방종을 혼동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다는 것이다.
오해라며 내세운 그의 주장은 역설적으로 남성 중심적 한계를 드러낸다. 그래서 보수 칼럼니스트로 유명했던 서지문 고려대 교수조차 “이문열이 여권주의자들을 대부분 성도착자로 간주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문열의 ‘반여성 극우 이미지’는 실제로 오해에서 비롯된 게 있다. 그중 하나가 1989년 방송에 나가서 방북 대학생 임수경을 두고 “미친 계집애”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게 시사잡지에 실린 후 그에 대해 비난이 쏟아졌다. 나중에 그 잡지 측에서 영상을 재검토한 후 “사실이 아니었다”라는 정정보도를 냈다. 그러나 그 이후에도 그를 공격하는 소재로 활용됐다.
◇“말이 잔인해지면 행동도…”
그는 우파 운동을 하다가 극우 인사들과 함께 종종 사진이 찍혔다. 그로 인해 꼴통 보수라는 비난을 들었으나, 자신의 세계관은 조화·균형·중용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강조해왔다. “세상은 좌와 우, 유심론과 유물론, 색(色)과 공(空),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지 않다.”
그는 우리 정치에서 좌우 진영 싸움이 격렬해지며 공격적 언사를 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흐름을 경계해왔다. 또 그게 시민사회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을 걱정했다. “말이 잔인해지면 행동도 잔인하게 변합니다.”
그가 말에 유독 예민한 것은 역시 작가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그의 작품들을 다시 보니 짧은 정치 발언에서는 만날 수 없는 깊이와 넓이의 사색이 존재했다. 이른바 시론소설(時論小說)이라고 불리는 것들조차 종교, 역사, 철학에 대한 성찰을 웅숭깊게 담고 있다. 책으로 그를 만나니 새삼 그런 생각이 찾아왔다. “이문열은 논객이 아니라 문학인이구나.”

역대 대통령들이 빌려 쓴… 유려하고 명료한 글
이열(李烈). 이문열 작가의 본명이다. 1970년대 말 문단에 등장할 무렵에 ‘文’을 넣어서 필명을 만들었다. 필명을 통해 소망한 대로 이 작가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자 빼어난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자신의 발표문에 그의 문장을 빌리려고 했을 정도였다.
그가 문명(文名)을 날리기 시작한 1980년대부터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이 비서관을 통해 문안을 다듬어달라고 청했다. 이후 김영삼 대통령도 잦은 사건·사고로 인한 사과담화문 발표 때 같은 부탁을 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측근을 통해 자서전을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써 줄 것을 청했다. 이문열은 김 대통령이 야당 정치인이었던 시절에 잡지사 인터뷰 등을 통해 수차례 만나며 친분을 쌓았다. 그때까진 그에게 좌우 진영 갈등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대통령들과 알고 지내는 것이 세상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데 중요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 친분으로 덕을 보거나 작가 자존을 굽히진 않았다.
그에 따르면, 1980년대까진 대통령이 유명 문인을 초대해 식사를 함께했던 관행이 살아 있었다. 그 시절 전두환 대통령이 그를 자주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당시 대구에 산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절하곤 했다. 서울에 이사 와서 참석하니 전 대통령이 “이문열 씨는 한번 보는 게 왜 이렇게 힘듭니까?”라고 농담조로 타박했다. 그는 “(프랑스 문인) 사르트르도 드골 대통령을 만날 때 그랬던 것 같습니다”라고 응수했다.
이문열이 수차례 밝힌 것처럼 그는 아름답고도 힘 있는 문체를 문청 시절부터 꿈꿨다. 고교 졸업 후 낭인(浪人)이었을 때 독학으로 문장 수련을 했다. 그림 배울 때 데생하는 것처럼 주변 사물에 대해 대학노트 한 장으로 묘사한 글을 일기처럼 썼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애써 외웠다.
그는 유려하면서도 이해가 쉬운 명료한 문장을 지향했다. 하나의 글에서 같은 단어는 가능하면 피했다. 감탄사와 느낌표, 말없음표를 절제했다. 우리 고전 시가에서 보이는 음수율을 산문에서 적절히 활용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이란 조건문을 즐겨 썼는데, 이는 가독성을 위한 장치였다. 인과 관계가 동떨어진 문장들 사이에 그걸 넣으면, 독자들이 설명 받았다고 느껴 훨씬 쉽게 읽는다는 것이다.
어느덧 노년에 다다른 작가는 자신의 글쓰기를 세상을 향해 부단히 던진 투망질로 비유했다. “때로는 홀린 듯, 더러는 신들린 듯 함부로 내던진 내 언어의 그물은 어떤 시간들을 건져 올릴 것인가.”
장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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