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을 위한 명품’ 맞춤옷 장인의 일편단심

문준영·조승주 기자 2026. 5. 4.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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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가게, 고치가게] (21) 제주시 이도1동 벤스타일의상실

소년은 어머니를 닮아 손재주가 좋았다. 한복을 직접 손보고 재봉틀을 돌리는 어머니의 모습이 어린 소년에게는 신비롭게 다가왔다. 어느 날, 광목으로 나온 포대를 오려 속옷을 만들어봤다. 놀랍게도 이 초보 재단사의 결과물은 근사했고, 바로 입을 수 있었다. 

다시 재단을 하게 된 것은 스물일곱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배우자마자 솜씨가 금세 늘었다. 피를 이은 감각, 어린시절의 재능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이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섰다. 디자인, 제작, 수선. 정장부터 유니폼까지. 일단 한 번 고객이 되면 꼭 다시 그를 찾았다. 세월이 흘러 어느덧 그는 일흔이 넘었다. 눈과 손으로 쌓은 수 많은 경험들은 그를 이 분야의 장인으로 만들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지금까지 제주시 원도심을 지키고 있는 벤스타일의상실의 대표 이상기(71)씨의 이야기다.
이상기 벤스타일의상실 대표. ⓒ제주의소리

희노애락 담긴 의상실

1982년 평생의 운명을 만나 결혼식을 올렸다. 아내와 아내 친구가 의상실을 했던 것이 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 친구 집에 놀러갔다가 '어, 나도 하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그 당시에 50만원이라는 거금을 주고 전문적으로 제도(재단)를 배웠다.

눈금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그의 실력은 빠르게 늘었다. 집에서 직접 한복 수선을 하던 어머니의 영향, 어릴 적부터 빼어났던 손재주가 빛을 발했다. 그때 한해, 한해의 기억이 그에게는 선하다.

"1983년, 서문시장에서 작은 점포를 빌려 의상실을 시작했습니다. 실수도 많이 했죠. 1983년에는 큰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집사람이 고생도 많이 했죠. 용두암 용연 줄다리 있죠? 그 부근에 아이를 맡기고 젖 먹이러 다녔어요. 그러다 북교(제주북초등학교) 앞으로 옮기게 됐고, 지금의 벤스타일의상실을 하시던 분이 이사를 가면서 저에게 물려주고 간 거죠."

나름대로의 연구와 고민을 거듭해가며 실력을 쌓아갔다. 서서히 입소문도 퍼지고 단골들도 생겼다.

"북교 앞 쪽에 있을 때 집세가 90만원이었어요. 거기 살 때는 진짜 바빴어요. 보통 밤 12시, 새벽 1시까지 했으니까요. 제일 많이 찾은 손님은 관광 가이드였죠. 한 번 가이드들 사이에 알려지다보니까 서귀포에서도 저희 집에 와서 옷을 해달라고 했어요."

맞춤옷부터 수선까지 그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바짓단 수선비가 7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기억에 남는 손님도 있었다. 단골이었던 할머니가 찾아와 안동포로 옷을 만들어달라고 했다. 굉장히 비싼 옷감이었다. 이유를 물으니 '내가 죽을 때 갖고 가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당연히 그는 최선을 다해 땀을 흘렸고, 인생의 마지막 선물을 전달했다.
벤스타일의상실의 풍경. 모서리가 닳아버린 연자고에서 장인의 세월이 느껴진다. ⓒ제주의소리

주변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며 잘 풀려가던 그때, 갑자기 큰 고난이 그를 찾아온다.

"근처 다른 점포로 의상실을 옮겼는데 거기서 큰 손해를 봤어요. 점포 앞 가게에서 수리를 한다고 지붕을 뚫었는데, 태풍 때 비가 와서 손해를 굉장히 많이 봤어요. 빚이 억 이상 됐죠. 그 때 집 안에 물이 새다 보니까 뭐 수돗물을 튼 것처럼 물이 막 들어와요. 그래서 옷감이고 뭐고 다 버렸어요."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아온 그였기에 받은 충격은 더욱 컸다.

나날이 걱정이 깊어지던 차에 힘이 된 것은 가족이었다. 

"우리 집사람이 했던 말이 있어요. 그게 힘이 됐어요. '우리가 젊고 건강한데, 그게 재산이다. 그러면 살아질거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거는 좋은 생각만 해라. 나는 부자다, 잘 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을 바꾼 거예요. 그때부터 변화가 있었어요. 나는 부자다, 난 건강하다, 난 잘 살 거다 항상 생각했어요. 그 생각을 하다보니 완전 바뀌더라고요. 빚을 차츰차츰 갚아나갔고, 완전히 없어졌어요."
이상기 씨의 딸 이윤지 씨가 네 살때 모습. 아버지가 직접 만들어준 옷을 입은 딸이 환하게 미소짓고 있다. /사진 제공=이상기. ⓒ제주의소리

딸이 이어가는 가업

지금의 의상실 2층에는 패션학원이 있다. 이 곳은 이씨의 딸인 이윤지(39)씨가 운영 중인 곳. 아버지의 감각을 닮은 그녀는 자연스레 가업을 이어받게 됐다. 의상제작부터 수선까지, 취미부터 양장기능사 실무까지 패션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대를 이은 노하우를 전수하는 공간이다.

"제가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는 계속 재단과 재봉을 해오셨어요. 어릴 때 제 바비인형을 아버지가 만들어주시기도 했어요. 그때부터 계속 봐왔는데, 아버지의 기술력은 다른 사람이 따라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다보니 '우리 아빠는 왜 전수를 안 하시지?'라는 생각에서 시작하게 됐어요.

저는 아빠가 재단하고 계시는 뒷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아 옷이 이렇게 만들어지는 구나' 이런 걸 많이 봤죠. 아빠한테 한 번 맡겼던 손님은 그 이후에도 항상 찾아오세요. 그런 아버지의 기술을 전수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쁨이예요.

저와 아빠가 같이 해서 제가 부족한 부분을 아버지가 채워주시고 계세요. 아빠가 지금 70대가 되셨는데 80세가 되셔도 함께하고 싶어요."

아버지 이상기씨는 딸의 얘기가 나오자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너무 기쁘다"고 말했다. 이 곳에는 "이 아빠가 살아있는 동안 내 모든 기술을 물려주겠다"는 그의 굳은 약속이 담겨있다.

정직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세월이 흐르고 사람들이 옷을 소비하는 방식도 많이 변했지만 여전히 그의 의상실에는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옷'을 꿈꾸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이어진다.

"이 곳은 여성복 맞춤 전문이에요. 그분의 체격에 맞게끔 제도를 하고 제작을 해요. 그래서 저만의 명품을 만들어서 입혀드리는 거죠. 한 땀 한 땀 신경 써서 해야 돼요. 재단도 제가 하고, 재봉도 제가 직접 해요. 재봉은 많이 뜯으면 뜯은 만큼 선수가 돼요."

그를 50년 가까이 이 길에서 버티게 해준 힘은 무엇일까? 장인이 되는 길에 그는 '약속'과 '노력'이라는 기본적인 원칙을 강조한다. 요행 없이 묵묵하게 이어온 그의 인생철학이다.

"손님이 만족할 때가 가장 기분이 좋아요. 진짜 손님만의 명품을 만들어야겠다는 그 생각을 지금도 항상 하고 있어요. 또 내가 만족을 안하면 계속 연습을 해요. 지금도 배우고 있고, 그런 다짐으로 생활해왔어요. 

제일 중요한 것은 손님과의 약속이예요. 손님과 약속을 했으면 절대 날짜를 어기면 안된다는 약속은 철저히 지켜야 돼요.

벤스타일의상실은 곧 저예요. 한마디로 내 자신이고, 내 인생이고, 내 가족이예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후회해본 적은 없어요. 단골들에게 항상 고맙고, 최선을 다하는 명품을 만들어가겠다는 그런 다짐을 합니다."
아버지 이상기 씨와 딸 이윤지 씨. ⓒ제주의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