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리에 리그 돌풍의 주역, 코모1907·인니의 화인 기업[동남아시아 TODAY]
[편집자주] 한국에서 '가성비 관광지'와 '저임금 생산기지'로만 여겨지던 동남아시아가 뜨고 있습니다. 높은 잠재력의 소비시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지정학적 중요성으로 인해 미중 패권 경쟁의 주요 무대가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동남아를 모릅니다. 더욱 가깝게 지내야 하는 이웃인 동남아의 정치, 경제, 문화를 서강대 동아연구소 필자들이 격주로 소개합니다.

동남아시아의 화인(華人) 기업이 스포츠 산업, 특히 유럽의 풋볼 클럽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로는 과거 프리미어리그 맨체스터 시티를 소유했던 탁신 가문이 있고, 싱가포르의 사업가 피터 림은 한때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발렌시아를 소유한 적도 있었다. 또, 말레이 화상(華商) 빈센트 탄은 영국 리그의 카디프 시티 운영에 관여한 바 있는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에도 화상들은 다양한 형태의 스폰서 계약을 통해 유럽 리그에 간헐적으로 등장해 왔다.
같은 선상에서 최근 가장 큰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사례는 이탈리아 세리에 리그의 '코모 1907'(Como 1907)이다. 2019년만 해도 4부 리그에 불과했던 코모는 현재(2026년 5월 1일 기준) 이탈리아 최상위 리그인 세리에 A 리그 5위에 오르며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가시권에 두고 있다.
그런 코모를 세리에 A 돌풍의 주역으로 이끈 핵심 요인으로 감독을 많이 꼽는데, 과거 스페인 대표팀과 영국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구단인 아스널에서 미드필더로 활약한 전설적인 축구선수 세스크 파브레가스가 팀을 지휘하고 있다는 점 역시 화제성을 더하고 있다.
현재 코모1907은 런던에 본사를 둔 스포츠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기업 '센트'(Sent)가 소유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기업이 인도네시아 최대 민영기업 가운데 하나인 '자룸'(Djarum) 그룹의 2세대 화인 기업가 형제이자 인도네시아 최대 부호 가문인 마이클 밤방 하르토노와 로베르트 부디 하르토노가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끄레텍'(Kretek)이라 불리는 정향 담배 사업에서 출발해 은행(현재 인도네시아 최대 민영 은행인 BCA 소유), 부동산, 기술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온 자룸 그룹을 이끄는 황(黃)씨 형제이자 현지에서는 하르토노 형제로 불리는 이 두 화상 형제는 2019년 당시 세리에 D (4부 리그)에 머물러 있던 코모를 약 22만 달러에 인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코모는 자룸 그룹의 막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유럽 축구계에서 가장 야심 찬 프로젝트 중 하나로 불린다. 하르토노 형제는 대출에 의존하지 않고 매 시즌 수천만 달러를 구단에 직접 투자해 왔는데, 경기장 개보수와 신규 스포츠 센터 건설에도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고 있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에 힘입어 코모는 2020년 세리에 C, 2021년 세리에 B로 차례로 승격한 데 이어 2024년에는 세리에 A에 오르는 성과를 거뒀다.
또한 최상위 리그 승격 이후 이적 시장에 1억 달러 이상을 투자하며 세리에 A 소속 구단 가운데 세 번째로 많은 지출을 기록하는 등 강력한 재정 기반을 과시하고 있기도 하다. 세스크 파브레가스 감독 체제 아래에서 팀은 전술적 안정성과 공격적 색채를 동시에 강화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데, 이 과정에서 자룸 그룹과 하르토노 형제는 하부 리그에 머물러 있던 코모를 인수한 뒤 막대한 자금을 투입해 단기간 내 최상위 리그로 끌어올린 든든한 모기업이자 전략적 구단주의 역할을 하고 있다.
직원 10명짜리 담배 기업에서 시작해 전국적 기업으로 성장한 자룸 그룹

자룸 그룹의 기원은 1951년 중부 자바 쿠두스(Kudus) 지역이다. 창업자 오웨이 위관(Oei Wie Gwan· 黃維源)은 화인 출신 상인이었다. 사실 그는 출생 연도나 출신지가 불명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름을 통해 중국 푸젠 출신인 것으로 짐작되기는 한다. 원래 1930년대 '레오'(Leo)라는 불꽃놀이 공장을 운영하며 수출까지 시도했으나, 화재로 공장이 전소되면서 사업 기반을 상실했다. 이후 그는 1951년 같은 지역의 소규모 담배 회사 '자룸 그라모폰'(Djarum Gramophon)을 인수하는데, 당시 직원 수는 약 10명 수준이었고 생산 규모 역시 제한적이었다. 브랜드명 '자룸'(Djarum)은 인도네시아어로 '축음기 바늘'을 의미한다. 이는 제품의 섬세함과 균질성을 상징하기 위한 명칭으로 알려졌다.
자룸의 초기 사업 기반은 인도네시아 고유의 정향 담배, 즉 크레텍이었다. 크레텍은 담뱃잎에 정향(clove)을 혼합하여 제조하는 제품으로 인도네시아 내수 시장에서 독자적인 소비문화를 형성해 왔다. 1870~1880년대 쿠두스 지역에서 담배와 정향을 혼합하여 약국에서 판 것이 그 시작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향은 인도네시아 말루쿠·향신료 제도에서 나는 독특한 향신료인데, 이 제품이 19세기 이후 네덜란드에 의해 시작된 플랜테이션 기반 상품작물 산업화 정책과 함께 광범위하게 퍼진 담배 플랜테이션과 만나면서 크레텍의 산업화가 본격화했다.
당시 식민 시기 네덜란드는 화상들에게 세금 징수 등 경제적 특권을 부여해 원주민과 화교화인 계층 간의 위계를 조장하는 분할 통치 정책을 썼고, 이로 인해 1918년 쿠두스에서는 경제적 주도권을 둘러싸고 원주민 크레텍 생산자와 화인 자본가 간의 갈등이 폭발해 대규모 반중 폭동(Kudus riots)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과정을 거치며 크레텍 산업은 대부분 화상 기업의 독무대가 됐고, 1930년대 푸젠성 출신 림셍티가 세운 '삼포에르나'(Sampoerna)를 시작으로 수하르토 시기에는 4대 크레텍 및 담배 기업(벤투엘, 자룸, 구당 가람 등)이 전체 산업의 85%를 차지하기에 이른다.
쿠두스는 크레텍 산업의 시작이자 중심지로 식민 시기부터 다수의 소규모 제조업체와 숙련 노동자가 밀집해 있었다. 생산은 전통적으로 수동 롤링(hand-rolled) 방식에 의존했는데, 이 생산 방식이 노동집약적 구조를 형성하며, 구직자들을 불러 모았다. 자룸 역시 초기에는 이 방식에 의존했다. 그리고 이 크레텍은 현재 인도네시아의 대표적 문화 자산으로, 몇 해 전 넷플릭스에 '시가렛 걸'이라는 제목으로 1960년대 여성이 남성 중심 크레텍 담배 산업에 뛰어든 이야기를 다룬 시리즈에 자세히 나온다.
오웨이 위관은 사업 확장 과정에서 다시 한 차례 공장 화재를 겪었고, 이후 1963년 사망했다. 그의 사후 경영은 앞서 언급한 두 아들, R. 부디 하르토노(황휘총·黃輝聰)와 마이클 하르토노(황휘상·黃輝祥)에게 넘어갔다. 두 형제는 디포네고로 대학교에서 수학한 뒤 가업을 이어받았고, 이 시점부터 자룸은 단순 지역 제조업체에서 전국적 기업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들어 자룸은 과거 수동식에서 기계식 롤링 공정을 도입했는데, 이는 완전 자동화가 아닌 수동 공정과 병행하는 방식이었고, 생산량 확대와 품질 표준화에 기여했다. 동시에 연구개발 조직을 설립하여 배합비, 연소 특성, 포장 디자인 등을 개선하고, 그 과정에서 제품 브랜드가 세분화하면서 프리미엄 제품군이 형성됐다.
1990년대 말 금융위기 거치면서 인니 금융 핵심으로 자리매김…다각화 과정에서 스포츠에도 투자

이후 진행된 사업 다각화와 혁신을 가능하게 한 자룸 그룹 자본의 구조적 전환은 1997~1998년 아시아 금융 위기 때 이뤄졌다. 당시 인도네시아 금융 시스템은 심각한 유동성 위기를 겪었고, 대기업 집단 상당수가 구조조정을 겪었다. 당시까지(그리고 지금까지도) 가장 유명한 민영기업이자 화상 기업인 '살림'(Salim) 그룹이 통제하던 뱅크 센트럴 아시아(BCA) 역시 위기 상황에 놓였다.
하르토노 형제는 이 시기에 BCA 지분을 확보하기 시작했고, 이후 지주회사를 통해 현재의 54.94%에 달하는 지분을 보유하게 됐다. BCA는 인도네시아 최대 민영 은행으로 소매금융과 기업 금융에서 광범위한 고객 기반을 보유하고 있다. 2020년대 중반 기준 BCA의 시가총액은 약 768.62조 루피아 수준으로 집계됐으며, 이는 인도네시아 금융 시장에서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 자룸 가문의의 자산 중 약 3분의 2가 이 은행 지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평가되는데, 이 시점을 기점으로 자룸은 제조업 중심 기업에서 금융 자산 중심 복합 기업으로 전환됐다.
이후 자룸 그룹은 부동산, 통신 인프라, 디지털 플랫폼 등으로 사업 영역을 확대했다. 2022년 인도네시아 주요 전자상거래 플랫폼인 '블리블리'(Bliblis·인도네시아어로 '사다'라는 의미)를 운영하는 자룸 그룹의 자회사, '글로벌 디지털 니아가'는 인도네시아 증시에 상장했으며, 약 5억 1000만 달러를 조달했다. 이는 인도네시아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의 IPO 사례로 기록됐고, 이를 계기로 자룸 그룹은 디지털 상거래를 통해 내수 소비 시장과 금융 서비스 간 연계를 강화하고 있다.
지금까지 자룸 그룹의 사업 구조는 크레텍 담배 산업에서 발생하는 안정적 현금 흐름, 즉 BCA를 중심으로 한 금융 자산 구조, 가전, 디지털, 부동산 등 다각화된 산업 포트폴리오 등이다. 디테일은 다르겠지만, 전체적으로 화상 기업의 전형적 흐름과 구조를 공유하고 있다. 즉, 전통적 노동집약적 제조업에서 출발했으나, 1990년대 후반 이후 금융 자산을 중심으로 구조가 재편됐고, 이후 신산업 분야로 확장하는 양상인 것이다.
그 결과 하르토노 형제는 장기간 인도네시아 부호 순위 상위권을 유지해 왔다. 포브스 집계에 따르면 부디 하르토노의 순자산은 2025년 4월 1일 기준 약 224억 달러였으며, 2026년 2월 20일 기준 약 198억 달러로 집계됐다. 형제인 마이클 하르토노 역시 비슷한 규모다.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자룸 그룹의 스포츠 투자는 결코 갑작스러운 행보가 아니었다. 1969년 쿠두스 지역 자룸 담배 공장 직원들의 취미 활동으로 시작된 배드민턴 클럽 'PB 자룸'은 이후 체계적인 유소년 육성 시스템을 구축하며 다수의 세계적 배드민턴 챔피언을 배출해 왔다. 이는 배드민턴을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스포츠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한 사례로 평가된다. 더 나아가 마이클 하르토노는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 당시 78세의 나이로 브리지 종목 동메달을 획득하며 스포츠에 대한 개인적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다.
이와 같은 스포츠를 통한 공익적 활동은 자룸 그룹이 담배 산업에서 출발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기업 브랜딩 전략과 일정 부분 맞물려 있다는 분석도 있다. 인도네시아 법령에 따르면 담배 광고는 저녁 9시 30분 이후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스포츠 후원을 통해 낮 시간대에도 브랜드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효과를 노렸다는 해석이다. 실제로 담배 브랜드 '자룸'과 배드민턴 클럽 'PB 자룸'은 동일한 로고와 붉은색 브랜드 컬러를 공유하고 있다. 이는 아동 및 청소년에게 직접적으로 담배를 홍보하지 않으면서도 '건강', '승리', '성취'와 같은 긍정적 이미지를 연상시키는 고도의 간접 마케팅 전략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물론 이러한 방식에 대한 비판 역시 있다. 인도네시아 아동보호위원회는 이를 '아동 착취 및 담배 브랜드 노출' 문제로 규정하며 후원 중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와 인도네시아 배드민턴 협회는 예산 부족과 국가 대표급 인재 육성의 필요성을 이유로 자룸을 옹호하는 입장을 취해 왔다. 이는 화상 기업이 구축한 경제적, 사회적 영향력이 국가 제도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며, 때로는 강력한 방어막으로 기능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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