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 부자’ 기업, 앞으론 옐로카드 받는다
주주 돈은 ‘공짜’가 아니야
돈 묵혀 두면 낙인 찍힌다
저 피비알 기업 명단 공개
자본 활용 계획 공시해야
‘주가 누르기’ 악습도 단절
자본 흘러야 저성장 탈피

간단한 퀴즈. 다음은 맞는 말일까?
1) 기업이 증자해서 은행 대출을 갚았다. 자기자본은 이자가 안 나가는 돈이니 회사는 홀가분해졌다.
2) 이익을 내 현금성 자산을 많이 쌓아둔 기업은 내실 있는 우량기업이다.

첫 번째 진술은 부분적으로만 옳다. 이자가 나가지는 않지만, 주주 돈(자기자본)은 ‘공짜’가 아니다. 주주도 투자한 돈에 대한 수익을 기대한다. 기업이 망하면 주주는 빈손이 되므로 은행 이자보다 더 높은 수익을 기대해야 정상이다. 이런 최소한의 기대수익을 ‘자본비용’이라고 한다. 계산 식은 복잡한데, 재무학 전문가인 김우진 서울대 교수(경영학)는 “연 10%쯤 된다”고 말한다. 은행 이자의 두배가 넘는 수준이다. 김 교수는 4월 16일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한국 경영자의 자본비용 인식이 너무 낮다고 지적했다. “그동안 우리는 이익이 늘어난 것만 봤지 투입 대비 얼마나 성과를 내는지는 안 봤다”며 “100억원을 버는 회사가 1조원을 들여서 버는지, 1000억원을 들여서 버는지는 안 봤다”는 것이다.
그래서 경영진은 자본비용을 넘어서는 이익률(ROE·자기자본이익률)을 올리도록 경영을 하고, 번 돈으로 배당이나 자사주 매입 등 적정한 범위의 주주환원을 해야 한다. 주주가 배당이나 주가 상승으로 얻는 총주주수익률(TSR)이 기대에 못 미치면 주식을 팔고 나가고, 그러면 그 기업의 주가는 낮게 형성된다.
두 번째 진술도 이젠 조건을 따져봐야 한다. 1990년대 말 외환 위기 무렵 기업이 빚을 잔뜩 지고 줄도산할 때 내부 유보가 많은 기업은 박수를 받았다. 기업에 유보가 많은 것은 갑작스러운 경영환경 변화에 대처할 수 있고, 좋은 사업기회가 오면 투자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소유주 일가 등 지배주주는 내부 유보를 선호한다. 자신의 권력을 키우는 자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기도 아닌 시기에 현금을 몇 년째 계속 쌓아두거나, 용도가 불분명한 부동산을 계속 보유하는 기업은 그에 상응한 기회비용을 치르게 된다. 다른 곳에 투자했으면 더 큰 수익을 올릴 기회를 날린 셈이기 때문이다. 자본을 비효율적으로 활용하면, 자기자본이익률은 자본비용에 미달하기 쉽다. 이런 회사는 성장성이 낮다고 봐 주가가 오르지 않는다. 주가를 한 주당 순 자산으로 나눈 주가순자산비율(PBR)이 1이 안 되는 기업 가운데 이런 의심을 받는 곳이 적지 않다. 시가총액이 회사의 순자산 가치만큼도 안 될 만큼 저평가됐다는 이야기이다.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낮은 자본 효율성 문제
이 사례처럼 한국 자본시장에는 피비알이 1이 안 되는 기업이 많다. 지난달 12일 현재 코스피와 코스닥 상장사의 약 50%가 피비알 1이 안 된다. 주가가 극히 저평가된 상태인 피비알 0.3 미만 기업도 약 6%나 된다. 지난해와 올 초 주가가 많이 올랐는데도 상황이 이렇다. 같은 아시아권인 일본(35%), 대만(17%)에 비교해도 우리가 유독 비율이 높다. 미국도 27% 수준이다.
물론 설비 투자 규모가 큰 전통 제조업은 구조적으로 피비알이 낮고, 회계 기준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수치가 달라질 수 있다. 그렇다 해도 기업가치가 순자산 만큼도 되지 않는 선에서 오래 거래되는 것은 투자자들이 회사의 수익 창출 능력이나 주주 환원 의지를 신뢰하지 못한다는 뜻일 수 있다. 김형균 차파트너스자산운용 본부장은 같은 토론회에서 “3% 이자를 주는 예금에 만족하지 못해 연 10% 수익을 기대하고 펀드에 가입했는데, 펀드매니저가 자금의 90%를 주식이 아닌 예금에 넣어 놓고 있는 상황”이라고 비유했다. 한국 자본시장의 오랜 낙인인 ‘코리아 디스카운트’는 불투명한 지배구조, 인색한 주주 환원, 자본의 효율성 저하가 결합한 결과이고, 낮은 피비알은 그 단면이다.
‘주가 누르기’와 낮은 피비알
브이아이피 자산운용은 지난 3월 중견 자동차 부품회사 ㄷ사 주총에서 “현금 활용 계획을 밝힐 것”을 이사회에 요구하는 등 투자자로서 공개적인 목소리를 냈다. ㄷ사는 순자산이 많고 지난해 770억 원대 순이익도 냈지만 피비알이 0.5가 안 될 만큼 심하게 저평가된 기업이다. 지난해 말 현재 보유한 현금성 자산만 4100억원인데 시가총액은 3월 12일 종가기준으로 2500억원에 불과하다. 저평가의 원인으로 브이아이피자산운용은 몇 년째 한 자릿수에 머무는 배당 성향과 함께 지배주주가 따로 세운 자회사와의 불투명한 내부 거래를 지목했다. 창업자의 3세에게 ‘살찐 회사’를 세금 적게 내고 물려주려 주가를 일부러 낮게 유지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실제 3월의 주가 수준에서 이 회사 지배주주가 물어야 할 상속·증여세는 약 300억원 정도이다. 만일 비상장사였다면 470억원이 많은 780억원을 냈을 것이란 계산이다. ‘주가 누르기 방지법’이 필요한 이유를 보여준다고 브이아이피자산운용은 밝혔다.
생산성 높이는 ‘머니 무브’ 필요
기업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주가를 ‘밸류 업’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자본의 효율성을 높여 경제에 활기를 돌게 하려는 목적이 크다. 그러려면 자본이 생산성이 높은 곳을 찾아 회사 내의 사업부나 다른 회사로 재배치돼야 한다. 기업이 투자할 곳이 마땅치 않으면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으로 주주에게 돌리고, 이 돈이 벤처나 스타트업 같은 혁신, 모험 산업으로 흐르는 게 생산성 있는 ‘머니 무브’이다.
일본은 이렇게 해서 오랫동안 무기력했던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본 정부는 2013년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선에 착수해 ‘잃어버린 30년’ 탈출의 길을 모색했다. 특히 도쿄증권거래소는 2023년부터는 상장사에 ‘자본비용과 주가 의식 경영’을 요청하며 자본 효율성 중시 경영의 드라이브를 강하게 걸었다. 거래소는 알오이와 피비알이 낮은 기업에 개선 계획을 공시하도록 밀어붙였다. 이걸 도입할 당시 일본도 도요타, 소니 등 대기업이 속한 프라임 시장 상장기업의 약 절반, 스탠더드시장의 60%가 알오이 8% 미만, 피비알 1배 미만 상태였는데, 3년이 지난 지금은 크게 개선됐다. 자본비용을 의식할 때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와 같은 자본 재배치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경영진이 자본비용을 상회하는 수익성을 지속해서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라는 취지라고 도쿄증권거래소는 설명한다.

그래서 어떤 대책을 마련?
피비알이 낮은 기업을 공개하는 방안도 이르면 올해 안에 추진한다. 이억원 금융위원장은 3월 18일 청와대에서 열린 ‘자본시장 안정과 정상화 간담회’에서 “피비알이 낮은 기업은 명단 공개 등 ‘네이밍 앤드 셰이밍’(naming and shaming 공개해서 창피 주기) 방식으로 기업가치 제고 노력을 유도하겠다”고 밝혔다. 구체적으로 피비알이 동일 업종 내 하위 20%에 해당하는 기업을 6개월 마다 공개하는 방안이 검토되고 있다.
주가 누르기를 막기 위해 상속·증여세 기준을 바꾸는 방안도 논의 중이다. 이소영 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상속·증여세법 개정안의 핵심은 상장 주식의 상속·증여 시 주가가 주당 순자산 가치의 80%에 못 미치는 경우(피비알 0.8 미만)엔 비상장 회사처럼 순자산과 순이익을 기준으로 공정가치를 계산해 세금을 매기자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대주주가 주가를 낮게 유지해도 세금을 줄이는 효과를 얻지 못하게 된다.
지난해 7월 상법 개정 이후 기업지배구조 개선과 코리아디스카운트 해소 정책은 빠른 속도로 추진됐다. 이제 남은 과제는 자본이 실제로 비생산적인 곳에서 빠져나와 혁신과 성장의 현장으로 흘러가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꾸는 것이다.
용어 설명
△자기자본이익률(ROE): 기업이 자본(주주의 돈)을 얼마나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이익을 창출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수익성 지표. 100억원의 자본으로 20억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면 알오이는 20%이다.
△주가순자산비율(PBR): 주가를 주당순자산으로 나눈 값으로, 기업의 순자산 대비 주가가 몇 배로 거래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 1보다 높으면 시장이 기업의 미래 성장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뜻. 알오이가 높을수록 피비알도 높아지는 경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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